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6)
비형은 벼슬 끝까지 화난 레콘이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자보로 사원의 주지인 고다인 대덕이 성문 통과세가 은편 다섯 닢이라는 것을 말하자마자 티나한은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을 한 창에 꿰어 버리겠다고 날뛰었다. 비형과 륜은 좀 말리라는 듯이 케이건을 바라보았지만 케이건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순진한 사람들이군요.”
고다인 대덕은 피로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왕? 왕은 무슨. 그 꼴에서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직 이 성 안의 사람들은 왕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진짜 왕이라면 아랫것들의 그런 장난질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아랫사람들 역시 그런 웃기지도 않은 속임수를 쓸 생각은 못 할 테고. 지금 위엄왕의 병사라는 것들의 기강은 산적들이나 황야를 떠돌아다니는 제왕병 환자들의 그것보다 낫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제야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티나한. 앉으시오. 나는 그 돈을 지그림 자보로의 병사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본 대가로 생각하고 있소. 성문을 지키라고 보낸 병사들 수준이 그 정도이니 다른 자들은 볼 것도 없소. 그런데 고다인 대덕께서도 순진하시군요.”
티나한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고다인 대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웃지도 않으며 말했다.
“대덕의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왕의 첩자가 꼭 자신을 첩자라고 소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헛. 이 땡초가 왕에게 무슨 위협이 될 거라고 지그림이 첩자씩이나 파견하겠습니까.”
“위협이 아니라 도움입니다. 지그림 자보로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대덕과 손을 잡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생각해 낼 겁니다. 저는 얼마 전 파계승 한 명이 달라붙은 제왕병 환자를 보았습니다. 그 파계승은 우수한 지식으로 그 친구에게 많은 권위와 논리를 만들어 주더군요. 조만간 대덕께도 비슷한 제안이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왕을 위해 지혜를 바치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대덕은 곧 걱정스러운 안색이 되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부디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저는 하룻밤 귀 사찰에 재워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 점을 지적해 드린 것일 뿐, 나머지는 대덕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제발 이 미욱한 중에게 한 말씀만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그림 자보로는 자신을 위엄왕이라 참칭하게 된 이후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듯이 굴고 있습니다. 안하무인도 그런 안하무인이 없지요. 그런 자가 제게 제안을 해온다면 전 두려워서 어떻게 대답도 할 겁니다.”
케이건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비형이 보기에 그것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후회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케이건이 입을 열었을 때는 언제나처럼 단조롭고 친절한 말이 흘러나왔다.
“먼저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지그림 자보로는 전쟁 준비 중입니까? 돈을 모으고 있는 것을 보곤 그런 의심을 했습니다만.”
고다인 대덕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예. 병사를 모으고 무서운 병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나 티나한 님의 저 병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못 봤습니다만.”
“언제쯤 전쟁을 일으킨답니까?”
“여러 가지 소문이 있습니다만 가을철이라는 이야기가 좀 그럴듯하게 들리더군요. 추수한 곡식들이 쌓여 있을 테니까.”
“그건 별 도움이 안 되는군요. 지그림 자보로는 그보다 일찍, 혹은 더 늦게 전쟁을 일으키는 편이 좋습니다. 추수한 곡식을 지키려는 자들에게서 그것을 빼앗기보다는 땅을 뺏은 다음 곡식을 추수하는 편이 좋으니까. 어디를 친다는 말은 없습니까?”
“아, 그건 상대적으로 좀 뚜렷한 편입니다. 메헴과 자보로 사이의 오랜 원한이 있으니까요. 과거 마립간들이 있을 때도 메헴과 자보로는 몇 번이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위엄왕은 이번에야말로 메헴을 정벌해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높일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메헴 쪽에서도 전쟁 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메헴이군요. 그렇다면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봉문(封門)하십시오.”
고다인 대덕은 놀랐다.
“봉문이오?”
“예. 봉문하시고 안거하십시오. 고대의 진짜 왕들도 사원의 봉문은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에 도망친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 사원이 봉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봉문을 하게 되면 저희들은 대사원으로부터도 고립됩니다.”
“지그림 자보로가 왕놀음을 오랫동안 하지는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과를 받아야 할 키탈저 사냥꾼들이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는 현명한 자보로 씨족이 곧 지그림에게 제동을 걸 거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물론 이것은 제 제안일 뿐입니다. 제 생각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만, 결정은 대덕께서 하실 일입니다.”
고다인 대덕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나누기 전, 케이건은 다시 티나한을 놀라게 할 만한 돈을 시주하며 객실에 군불을 때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지라 대덕은 꽤 놀랐다.
사원의 행자들도 어처구니없는 요청에 의아해했지만 어쨌든 객실에 불을 땠다. 행자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방풍복과 천을 벗은 륜은 방바닥이 뜨거운 것에 꽤 놀랐고 비형은 그에게 온돌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륜은 대단히 당혹했다.
“나무를 태워서 가열한다고요?”
비형은 당황하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비형도 좀 쉬어야 해. 계속 네 몸에 도깨비불을 붙여 두면 제대로 잘 수 없어. 비형. 륜의 몸에서 도깨비불을 제거하시오.”
륜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무를 태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 때문이라면 그냥 차가운 방에서 자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너 깨울 일이 너무 귀찮다. 위험할지도 모르고.”
비형이 조심스럽게 륜을 거들었다.
“저, 케이건. 지금까지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는데요. 방의 불을 빼고 지금까지처럼 륜에게 불을 붙여 주면 안 되겠습니까?”
“모처럼 쉴 수 있는 곳에 왔으니 오늘 하루는 푹 쉬시오. 길잡이로서 권고하는 거요. 륜. 이미 장작이 된 나무를 불태우는 거다. 신경 쓰지 말고 자라.”
륜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케이건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비형이 그의 몸에서 도깨비불을 제거했다. 성문 통과세와 시줏돈을 보고는 케이건이 부자인 듯하다고 생각하게 된 티나한은 그에게 하늘치 유적에 대해 관심이 없냐고 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별 관심이 없다고 대답하고는 머릿속으로 여정에 대해 궁리했다.
케이건이 메헴을 우회하는 여정과 그 다음 여정에 대한 생각을 대충 마무리했을 때 륜과 대화 중이던 비형이 그에게 질문했다.
“케이건. 미안하지만 아까 했던 말 좀 다시 해주겠어요?”
“어떤 말을 말하는 거요?”
“당신이 주지 스님께 한 말 말입니다. 사과를 받아야 할 키탈저 사냥꾼이 없다는 것. 그래서 왕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죠?”
케이건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모순에 별 관심이 없소. 다만 널리 알려진 말이라 인용했을 뿐이오.”
“모순이오?”
“흔히들 그렇게 말하지. 키탈저 사냥꾼들에게 사과해야만 왕이 돌아올 수 있는데, 사과를 받아야 할 키탈저 사냥꾼이 없기 때문에 왕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하지만 키탈저 사냥꾼이 남아 있더라도 그건 여전히 말이 안 되는 저주요. 그 저주를 보시오. 키탈저 사냥꾼에게 사과해야만 왕이 돌아올 수 있소. 그런데 키탈저 사냥꾼들에게 사과할 사람은 왕밖에 없소. 앞뒤가 맞지 않잖소?”
잠시 생각해 본 륜과 비형은 곧 그것이 모순임을 깨달았다.
“정말 그렇군요? 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저주를?”
케이건은 이부자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키탈저 사냥꾼들은 모순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소.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를 저주할 때 항상 모순 형태로 저주했소. 그리고 티나한. 이야기하는 바는 잘 들었지만 아무래도 하늘치 유적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 같은 것이 생기지 않소. 지금으로선 우리의 관심사를 우리의 여행 자체에만 한정 지어 놓고 싶소. 됐소? 그럼 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