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7)
자보로 씨족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자보로를 건설했는지, 아니면 자보로의 이름을 따서 자보로 씨족의 이름을 정한 건지는 자보로 씨족 사람들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자보로는 실로 고도(古都)지만 자보로 씨족도 대단히 오래된 씨족이다. 그리고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도시와 씨족은 역사 또한 공유한다. 유구한 역사 동안, 자보로를 다스리는 마립간은 항상 자보로 씨족에서 배출되었다. 그것은 너무 오래되어 아무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전통이다. 실제로 자보로를 다스리는 사람은 자보로 씨족에서 나와야 한다는 규칙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것을 인정했던 마립간 또한 없다. 그러나 마립간이 사망하면, 장례식에 참석한 자보로 사람들은 마립간의 추억을 기리면서도 그 현실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보로 씨족 회의 쪽으로 쏠렸다. 심지어 씨족 회의가 지연되면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자보로 씨족을 다그쳤다. 그리고 마침내 자보로 씨족이 그들의 수장을 선출하면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자보로의 차기 마립간으로 옹위했다. 물론 이 유구한 전통이 도전을 받았던 적 한 번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통에 반기를 든 저항자는 자보로 씨족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씨족 안에서 반대를 발견하고는 그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 자보로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왕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잘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왜 귀찮게 하나?”
자보로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잠재적 저항자로 하여금 야망을 포기하도록 만들었고 실재적 저항자로 하여금 수모와 분노 속에 자보로를 떠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도 자보로가 사망하고 지그림 자보로가 자보로 씨족의 새로운 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전통이 단절 없이 이어지게 한 자보로 씨족에게 갈채를 보내었다. 그러나 지그림 자보로는 그를 수장으로 뽑아 준 씨족의 우두머리들과 그를 지그림 마립간이라 부를 준비를 갖추고 있던 자보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그림 자보로가 자신을 위엄왕이라 칭하자 자보로 사람들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씨족의 최연장자들과 자보로의 존경받는 유지들이 직접 방문하여 지그림 자보로를 설득했지만 지그림 자보로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지그림 자보로와 자보로 사람들 사이에 정면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자보로 사람들이 전통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 때문이었다. 씨족의 원로들과 도시의 유지들은 결국엔 지그림 자보로가 수백 년 동안 지켜져 온 전통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반성할 거라 확신했다. 사람들의 그런 태도는 지그림 자보로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갈기를 달고 몸을 검게 물들여도 고양이는 흑사자가 될 수 없단 말이냐!”
자보로 사람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한 채, 마치 철부지 아들이 세상 무서운 줄을 깨닫게 되길 기다리는 어버이처럼 지그림의 비위를 맞추며 잠자코 기다렸다.
따라서 성벽 위에서 지그림 자보로의 큰아버지이자 대장군 인 키타타 자보로가 빙긋 웃으며 말했을 때 그가 심술궂은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음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분명했다.—위엄왕 이외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부르면 미친 듯이 화를 내곤 했지만—
“위엄왕 폐하. 폐하의 왕권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군요. 저 가소로운 도전자를 손수 처리하시겠습니까?”
위엄왕은 어리석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면을 상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말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위엄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성벽 아래를 오락가락하는 대호를 쏘아보았다. 키타타 자보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위엄왕의 반응보다는 대호에게 더 호기심을 느꼈기에 역시 성벽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별비와 무라 마립간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난 그들에게 그들의 성벽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대호의 모습은 각별했다. 그것은 철이 들면서 잊어버린 어린 시절의 환상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 돌아온 광경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그들에게 검은 모피 망토로 몸을 감싼 채 대호의 등에 올라타 있는 기수의 모습은 불가해하게까지 느껴졌다. 위엄왕은 그 사람의 존재에서 겨우 적절한 대응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호만이라면 상관없지만 사람이 있으니, 일단 말부터 걸어봐야겠군.”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잠시 야유와 조소를 유보했다. 위엄왕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외쳤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 땅에 호의를 가지고 왔는가, 아니면 증오를 가지고 왔는가? 그리고 어떤 자이기에 그 위험한 생물을 타고 있는 것이냐?”
검은색 망토로 온몸과 머리까지 감춘 기수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나는 사모 페이라고 한다. 이곳엔 호의도 증오도 없이 왔다. 내 요청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 대호와 나의 관계는 내 요청과 별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위엄왕은 턱이 빠질 듯한 얼굴로 말했다.
“놀라운 목소리군! 여자인가? 아니, 여자라도 저런 목소리는 못 낼 것 같은데?”
키타타 자보로 또한 조카의 말에 동감했다. 키타타는 왕에게 어떤 신령한 존재일지도 모르니 말을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위엄왕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마음을 열고 듣겠노니, 사모 페이. 어떤 요청인지 말해 보라.”
“너희들의 담장 너머에 나가가 한 명 있다. 그를 내게 보내기를 바란다.”
위엄왕은 당황하여 그의 대장군을 돌아보았다. 키타타는 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성문을 지키던 병사를 소환했다. 잠시 후 다거트 슈라이트를 포함하여 많은 수의 병사들이 왕 앞에 달려와 부복했다. 키타타가 빠르게 질문했다.
“너희들이 오늘 성문을 지키고 있었느냐? 나가가 이 땅에 들어왔다는데, 사실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벌써 보고를 드렸을 겁니다. 각하.”
“젠장. 너희들은 나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예? 아,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문을 통과한 사람은 모두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이었습니다. 나가는 없었습니다.”
위엄왕은 당황한 표정으로 키타타를 바라보았다. 키타타 또한 의아한 듯 바깥의 사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타타를 포함하여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는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한 자가 뭔가를 잘못 알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병사들을 돌아보던 키타타는 그들 중 하나가 약간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키타타는 그 병사에게 성큼 다가서며 느닷없이 말했다.
“왕에게 허튼소리를 고했다간 목숨을 간수하기 어렵다! 확실히 나가가 없었느냐?”
지적을 당한 병사는 다거트 슈라이트였다. 다거트는 기겁하며 말했다.
“저, 저, 사사, 사실은 정체가 확실치 않은 방문자가 한 명 있긴 했습니다. 저 대호가 들이닥치기 직전에 남문으로 들어선 자들인데, 네 명이었습니다. 인간과 레콘, 도깨비가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막 사람들이 입는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체구는 보통 인간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키타타는 어이가 없었다.
“확인하지 않았다는 거냐?”
다거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키타타는 그를 탓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키타타는 눈앞에 있는 젊은이들이 콧물을 마시던 어린애였을 때부터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도저히 절도 있고 엄격한 병사라 부를 수 없는 청년들이었다. 지그림 자보로가 왕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만큼이나.
하지만 위엄왕은 부하 병사의 그런 방만한 태도에 격분했다. 위엄왕의 무시무시한 욕설에 다거트는 쩔쩔매며 말했다.
“하지만 나가일 리가 없잖습니까? 나가 잡는 건 도깨비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에는 도깨비가 있었어요. 게다가 나가는 우리 땅에서는 얼어 죽는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 자는 옷은 펑퍼짐한 것을 입었지만 떨지는 않던데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럼 넌 도깨비를 잡으려고 이야깃꾼 세 명을 데려갈 테냐! 이 인두로 눈알을 지져 버릴 놈 같으니!”
다거트는 대경실색하여 자신의 눈을 꽉 누른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죄송해요, 지그림 아저씨!”
다거트의 결정적인 실언이었다. 도무지 위대한 왕과 그의 강대한 병사 간의 대화라고 보기 힘든 장면을 보며 얼굴을 씰룩거리던 사람들은 그 말에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위엄왕은 미쳐 날뛰며 검을 뽑아 다거트를 베어 죽이려 들었다. 키타타 자보로가 황급히 왕을 만류했다.
“고정하십시오. 폐하. 아직 자신의 임무에 익숙지 않은 병사들입니다. 왕의 관용을 보이시는 것이 훨씬 위엄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왕의 위엄이라는 말에 위엄왕은 폭풍 같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검을 휘두르진 않았다.
“무슨 말인가. 대장군?”
“한낱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왕의 땅에 들어왔다면 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위엄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백부를 바라보았다.
“나가를 보호하라고?”
“그게 아니라.”
키타타는 ‘이 얼간아! 네가 왕이라고?’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보호하든 처벌하든 그건 왕의 권한이라는 말입니다. 저자에게 왕의 땅에 들어온 자를 내놓으라 요청할 권한이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흥분을 가라앉힌 위엄왕은 겨우 키타타의 말을 이해했다. 다거트를 한 번 사나운 눈길로 흘겨보고 나서, 위엄왕은 다시 성벽 아래를 향해 말했다.
“왕의 땅에 들어온 자에 대한 책임은 모두 짐에게 있다. 나가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네가 어찌해서 그 나가를 내놓으라 하는가?”
사모는 조금 후에야 대답했다.
“또?”
“또라니? 뭐가 또라는 거냐?”
“또 왕이야? 이 땅엔 참새보다 왕이 더 많은 것 같군.”
화를 낸 사람은 이번에도 위엄왕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위엄왕이 격분하여 고함을 지르기 직전, 사모는 조금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래도 너는 좀 그럴듯하게 보이는군. 이렇게 커다란 담장을 가진 왕은 아직 못 봤어. 네 이름은 아마 담장왕이겠군.”
“위엄왕이다!”
“위엄왕? 알겠어. 네가 조금 전 왕의 책임에 관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하지만 그 나가를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보여줄 수 있어.”
망토 속에서 사모의 두 팔이 나왔다. 어둠 속에 사람들은 비늘 덮인 그 팔을 보며 사모가 무슨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사모가 두건을 들어 올리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두건 뒤에서 비늘에 덮인 얼굴이 드러났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보시다시피 나 또한 나가다. 이건 나가끼리의 일이야. 불신자들은 상관할 필요가 없다. 설명이 되었나.”
사모의 이 점잖은 말은, 그러나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위엄왕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이 괴물!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거냐! 한계선을 넘다니,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저 괴물과 대호를 쏴라!”
병사들 서넛이 쭈뼛거리며 활을 꺼냈다. 키타타가 당황하며 말했다.
“나가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건 나가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더 끔찍한 괴물이겠지! 당장 쏴라!”
사모는 어이없다는 듯이 성벽 위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처도 취하지 않았다. 위엄왕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땅을 때리고 퉁겨 올랐지만 대호와 사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엄왕은 병사들의 조악한 활 솜씨에 분노하며 직접 활을 들어 화살을 먹였다. 위엄왕이 쏜 화살은 사모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사모의 망토 속에서 솟아오른 쉬크톨이 화살을 퉁겨 내었다. 위엄왕은 사나운 욕설을 퍼부었지만 사모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왼손을 내밀어 대호의 커다란 머리를 가볍게 짚었다.
대호가 뒤로 돌아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위엄왕은 다시 외쳤다.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성문을 열고 추격하라!”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키타타의 말에 위엄왕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그때 위엄왕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 시퍼런 불꽃 두 개가 성벽 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소름 끼치는 광경에 질린 위엄왕은 잠시 후에야 대호가 다시 돌아섰음을 깨달았다.
대호는 달렸다.
위엄왕이나 키타타가 어떤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번개처럼 달려온 대호는 성벽을 20미터쯤 남겨 둔 지점에서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 가공할 도약은 사람들에게 거의 비행처럼 보였다. 레콘의 도약에 익숙한 병사들은 머리를 감싸 쥐며 엎드렸으나 다른 사람들은 기가 막혀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키타타만이 위엄왕의 어깨를 잡아채 뒤로 밀치며 다른 손으론 검을 뽑아 들었다.
성벽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점에서 대호는 성벽을 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호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뒷발로 성벽을 박찼다. 굉음과 함께 성벽이 진동했다. 다시 땅 위에 내려선 대호는 갈기와 어깨 털을 잔뜩 곤두세운 채 성벽 위를 노려보았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거의 몸이 아파 올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대호가 너무 낮아서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으르릉거렸기 때문이다.
위엄왕은 키타타가 집어던진 자세 그대로 머리를 묻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키타타는 조카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흉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검을 내밀며 외쳤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대호는 두 번 다시 자보로 성벽을 넘을 수 없다!”
사모는 키타타를 바라보다가 다시 대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대호는 성벽을 향해 사납게 으르릉거릴 뿐 사모가 보내는 개념을 무시했다. 사모는 참을성 있게 계속 개념을 보내었다. 마침내 대호가 훌쩍 몸을 날려 뒤로 뛰었다.
멀찌감치 물러난 대호는 또다시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키타타는 무의미한 짓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다. 조금 전보다 더 낮은 궤도로 도약하는 대호를 보며 키타타는 흉벽을 짚으며 고함을 질렀다.
“결코 넘을 수 없어!”
그러나 사모는 성벽을 넘을 생각이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순간 사모는 쉬크톨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 창을 던지듯 칼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대호가 성벽에 부딪히기 직전, 사모는 대호의 등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리고 쉬크톨을 성벽 틈새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돌과 금속이 부딪치는 마찰음. 대호는 다시 성벽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땅에 내려선 대호가 맨몸임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키타타와 몇몇 담대한 사람들은 황급히 흉벽 너머로 머리를 내밀었다.
사모 페이는 성벽 중간쯤에 쉬크톨을 꽂아 넣고는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실로 묘기라 할 수 있는 재주에 키타타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성벽 중간에 매달려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그때 몇몇 사람들이 당황하여 비명을 질렀다. 키타타는 다시 대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키타타는 피가 식는 공포를 느꼈다.
대호는 세 번째로 도움닫기를 하고 있었다. 기수가 없어 한결 몸이 가벼워진 대호는 무서운 속도로 뛰어올랐다. 키타타는 사모 페이를 내려다보았고 사모가 두 발로 성벽을 딛은 채 등을 내미는 모습을 보곤 아연실색했다.
대호는 사모의 등을 박차며 다시 뛰어올랐다.
대호는 최대한 발톱을 오므린 채 사모의 등을 짓밟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척추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쉬크톨이 사정없이 뽑혀 나오며 사모는 저 멀리 튕겨졌다. 수십 미터나 날아간 사모는 다시 땅 위를 한참 동안 굴러갔다. 그러나 키타타는 그 비장한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했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자보로 성벽을 넘어온 대호가 그를 향해 포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