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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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18)


갈로텍은 자신 속으로 깊이 내려갔다. 기억들이 희미해지고 왜곡되는 경계 바로 앞에 도착한 갈로텍은 주의 깊게 기억들을 점검했다. 그중엔 그 자신의 기억이 아닌 다른 기억들도 있기에 갈로텍은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 이 지점은 그렇게 위험하다. 기억들 속에 자신을 고정시킨 갈로텍은 화리트를 불렀다.

<아스화리탈 세파빌 마케로우. 내가 왔어.>

<아, 뒈지셨나?>

먼 곳에서 전달되어 온 화리트의 니름에 갈로텍은 고소를 머금었다.

<아니. 다른 영에게 잠시 자리를 맡겨두고 들어온 거야.>

<함부로 그래도 될까? 수호자가 말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수련자들이 기겁할 텐데.>

<걱정해 줘서 고맙군. 그런 곤란한 경우를 대비해서 평소에 기행을 많이 저질러 둔다고 말해 주면 자네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군. 자네는 지내는 게 어때?>

<이렇게 행복했던 때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

<그것 참 다행이군.>

갈로텍은 누군가가 잊어버린 기억 하나를 끌어와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화리트가 숨어 있는 숲을 향해 닐렀다.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좀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우린 지금 한 몸을 쓰고 있어. 사이좋게 지내도 되잖아? 나는 전령 없이 보통의 죽음을 맞이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그때가 되면 넌 나와 함께 여신께 갈 수 있을 거야. 결국, 좀 늦어질 뿐이야.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해서 삶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한 너에겐 오히려 좋은 이야기잖아?>

<아, 여신께 가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아. 갈로텍.>

<뭐라고!>

<왜냐하면 여신께 갈 필요가 없거든. 여신은 여기에 계시지.>

갈로텍은 화리트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갈로텍은 모든 정신으로 전율했다.

<설마?>

<모르고 있었나. 갈로텍?>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신체(神體)일 리가………….>

어두운 숲 속에서 폭발적인 웃음 정신의 흔들림 무한한 희롱이 터져 나왔다. 갈로텍은 어리둥절하여 그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금 후 갈로텍은 격노했다.

<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신체일 리가……………. 하하하!>

화리트는 갈로텍의 니름을 흉내 내며 다시 웃었다. 갈로텍은 분노를 참느라 한동안 정신을 거의 폐쇄해야 할 지경이었다.

<멋지게 속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군.>

화리트는 정신으로 낄낄거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스스로를 추스르며 닐렀다.

<진심으로 니르는 사람에게 농담은 관둬, 화리트. 나는 전령 없이 죽을 거야.>

<진심으로 니른다고?>

<내 진심을 의심하는 건가.>

<나는 여기서 많은 기억을 보았어. 갈로텍. 전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자들이 넘쳐나더군.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그들 모두는 전령을 시도했어.>

<나는 그냥 죽을 거야. 맹세하지.>

<맹세한 자들도 넘치던데?>

갈로텍은 주퀘도의 이죽거림을 떠올리며 불쾌한 심정이 되었다. 잊혀진 숲 속에서 다시 화리트의 니름이 들려왔다.

<남다른 척하지 마, 갈로텍. 너도 틀림없이 전령을 시도할 거야. 발자국 없는 여신께 가는 것보다 군령의 일원이 되어 영원히 지상을 방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그 날이 왔을 때, 친구. 그다지 착하지 못한 내가 너무 심하게 비웃더라도 참아주길 바라.>

<그럴 기회는 없을 거야.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내가 질문했던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나?>

화리트는 갈로텍에게 그 질문을 들은 이후로 계속 그 생각만 해왔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닐렀다.

<도대체 그걸 알아서 뭘 하려는 거지?>

<그건 대답해 주기 곤란한데.>

<그렇다면 나도 같은 대답을 돌려줘야겠군.>

<이봐. 화리트. 네가 아니라도 그걸 알아낼 방법은 있어. 나는 네게 나가들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주려는 거야. 살아 있을 적 너는 실수만 저질렀어. 죽은 다음이니 좀 늦긴 하지만, 이제라도 네 실수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어? 수련자로서 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의 영광을 빛낼 의무가 있어. 자, 화리트. 마지막 기회야. 그녀의 이름이 뭐지?>

화리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침중하게 닐렀다.

<그녀의 이름은 나늬야.>

갈로텍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리트는 다시 닐렀다.

<아니, 잠깐. 보늬던가? 이런, 헷갈리는데.>

갈로텍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화리트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그의 등을 때렸다.

<가기 전에 하나만 묻지, 갈로텍!>

<대답하고 싶지 않아.>

화리트는 갈로텍의 니름을 무시했다.

<네가 신체일 리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이지?>

갈로텍은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 화리트는 그 주저를 놓치지 않았다.

<이상한 대답이었어, 갈로텍. ‘내가 신체였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체일 리가 없어!’ 라니. 대단히 이상하잖아? 물론 가능성이 적은 일이긴 하지만 그런 강한 부정은 무슨 의미지?>

<네겐 고민거리가 필요하겠어. 화리트. 심심해 보이니까. 그러니, 그건 네 고민거리로 남겨두지.>

<고마운 배려군. 갈로텍.>

갈로텍은 넌더리를 내며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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