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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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20)


산들의 우수가 감도는 높은 땅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유료 도로는 어느새 목향이 코를 간지럽히는 보다 낮은 지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불어난 계곡의 물은 상당히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물가의 진 땅에는 앵초 군락이 분홍빛 연무처럼 피어 있었고 곳곳에 자라난 나무들은 여행자들에게 다가오는 숲을 예고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빗줄기에 떨어진 꽃잎들이 진흙과 범벅이 되어 산야를 악취미한 빛깔로 물들여 놓고 있었다.

요새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유료 도로당은 이곳까지도 평탄한 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조금 경사진 곳에는 어김없이 돌계단이 나타났고 작은 개울에도 돌다리가 등장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돌부리에 발이 걸릴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열여덟 번째 아니면 열아홉 번째일 것이다.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던 륜은 티나한의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티나한은 륜을 부축하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정말 신경 쓰이는군. 이봐, 케이건.”

앞쪽에서 걸어가던 케이건이 뒤를 돌아보았다. 티나한은 수염 볏을 비틀며 말했다.

“정말 이렇게 그 자들에게 두억시니 맡기고 떠나도 되는 걸까? 비겁한 행동인 것 같아.”

“그 사람들이 그걸 원했잖소. 티나한.”

“그렇다면 최소한 같이 싸우기라도 했어야 되는 거 아닐까? 그 자들이 두억시니를 퇴치하는 것을 도와주기는 했어야 도리에 맞는 일인 것 같은데 말이야.”

케이건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말을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시간이 얼마쯤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늘에서는 며칠 전 그들에게 목격되었던 하늘치가 조용히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황혼이 하늘치의 등에서 유적을 빛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조만간 산지의 이른 밤이 다가올 거라 판단한 케이건은 걸음을 재촉해 봐야 의미가 없다 판단했다.

“우리에겐 임무가 있소. 티나한. 그리고 그들의 요새는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고하오. 주퀘도 사르마크는 일만 명의 병사를 소모하고도 저 요새에 어떤 결정적 타격도 주지 못했소. 그들은 두억시니를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요.”

“그 주퀘도 사르마크가 도대체 누구지?”

“250년쯤 전의 제왕 병자요. 영웅왕에 비견될 만한 걸물이었소. 그가 왕이 되지 못한 건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 때문이라고 설명될 정도로. 거의 국가 비슷한 것까지 만들었지. 하지만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의 요새를 탐내는 실수를 저질렀소. 5개월 동안 1만 명의 병사를 잃는 대공세를 펼쳤지만, 성공하지 못했소.”

비형은 넋을 잃은 채 케이건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결국 항복 선언을 한 다음 은편 열 닢을 지불하고 그 관문을 홀로 걸어서 지나갔소. 오기를 충족시키는 세련되지 못한 방법이지만, 당시에 그 자는 세련미를 추구할 만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을 거라는 변호가 가능할 듯하오. 이 산맥을 떠난 다음 그 행방이 묘연해졌소. 반쯤 완성되어 있던 국가는 사분오열했고.”

“그러면 되는군요!”

일행들은 놀라서 륜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고함을 질렀던 륜은 흥분하여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되는군요!”

비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륜. 그러면 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과연 그 방법밖에 없을까요?”

륜은 발을 구르며 외쳤다.

“비형!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그 주퀘도라는 사람처럼 하면 되는 거예요. 통행료를 지불하는 거죠!”

“통행료는 이미 지불했는데요?”

“아니요. 두억시니들의 통행료 말입니다!”

티나한과 비형, 심지어 케이건까지도 얼빠진 얼굴이 되어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그들이 넘어온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 사람들은 두억시니가 통행료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싸우기로 한 거죠. 그렇다면 그들은 두억시니를 통행료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예! 목적을 가지고 길을 걷는 자는 다 여행자라고 했던가요? 그러면 그렇게 해주면 되는 거예요! 두억시니의 통행료를 지불해 주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두억시니와 싸울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우리를 추적하는 것이 분명한 그 두억시니들도 그 사람들과 싸우지는 않을 테고요.”

케이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억시니에겐 규칙이 없어. 반드시 그냥 지나쳐 온다고는…….”

“자보로와 슈라도스를 그냥 지나쳐 왔다면서요?”

케이건은 입을 다물었다. 륜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비형과 티나한은 기대감이 담긴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케이건은 다른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돌아갈지 말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케이건은 보좌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석이 나를 시험했군.’

케이건은 왜 보좌관이 두억시니들을 여행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그렇게 강조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륜이 떠올린 해결책을 자신 또한 당연히 떠올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케이건은 자신이 왜 그토록 당연한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했는지도 깨달았다. 케이건은 길잡이였다.

그리고 케이건은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길잡이였다.

“그 두억시니는 우리에게 방해가 될 거다. 륜. 그것도 아주 위험한 종류의 방해지. 이대로 놔두면 유료 도로당이 그 두억시니들을 해결해 줄 거다. 굳이 돈을 주고 우리 고민거리를 구입할 필요는 없다.”

<이 철혈!>

다행히 니름이었다. 말로 바꿔 입 밖에 꺼내기 직전, 륜은 자보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을 위엄왕에게 건네는 것이 어떠냐는 말로 륜을 시험했었다. 륜은 이것 또한 시험일 거라 짐작했다. 무슨 시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륜은 단호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지불해 가며 고민거리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 양심을 구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겁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자들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은 제 양심에 위배됩니다. 제가 가진 돈도 많습니다. 제가 그 자들의 통행료를 지불하겠습니다.”

케이건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비형.”

“예?”

“곧 해가 질 거요. 당신이 날아가는 것이 가장 좋겠소. 돌아가서, 두억시니의 통행료를 우리가 대납해도 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요금이 얼마나 될지 물어보시오.”

비형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늬 위에 올라탔다. 나늬는 순식간에 날아올라 그들이 내려온 길을 거슬러 날아갔다. 티나한은 기운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내 적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어. 통행료를 지불하고 그놈들을 이리 오라고 해. 내가 해결하겠어!”

케이건은 티나한의 용맹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위협적인 두억시니를 3,000마리나 상대하겠다는 것은 절대로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을 삼가지도 않았다. 티나한은 걱정 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륜은 덜컥 겁이 나는 것을 느꼈다. 직접 판단한 것은 아니지만 륜은 케이건과 티나한이 ‘보통 이상의 두억시니’라고 평가한 것을 들었고 어쨌든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려면 두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공포가 양심에게서 자신을 뺏아가는 것을 저지하려 애쓰며 륜은 불안한 얼굴로 도로를 돌아보았다.

비형은 케이건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다. 케이건은 의아한 얼굴로 딱정벌레의 착륙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땅에 내려선 비형의 얼굴을 보고는 더욱 의아해했다. 비형의 표정은 꽤나 해괴했다. 비형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통행료를 대납할 필요는 없겠는데요?”

케이건이 모두를 대신해서 질문했다.

“어째서 그렇소?”

“다른 사람이 이미 두억시니의 통행료를 대납했거든요. 날아가던 도중 그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 사람은, 어, 훨씬 빨리 달릴 수도 있지만 두억시니를 천천히 유인하며 요새에서 멀어지고 있더군요. 저 또한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그 사람의 작업을 도와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사람이 꽤 좋은 대화 상대였음을 분명히 해둬야겠군요. 헤어지기 직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이제 요새에서 충분히 멀어진 것 같으니 전속력으로 쫓아가겠다. 도깨비. 도로를 만드는 인간들의 뜻을 존중하여, 유료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의 회동을 가질까 하는데 그대 생각은 어떠신가? 라고 하더군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죠?”

륜은 반가움 반, 놀라움 반인 얼굴이 되었다. 케이건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서 사모 페이에게 뭐라고 말해 줬소?”

“사모 페이였다는 걸 맞추는 거야 놀랍진 않은데 제가 무슨 말을 했을 거라는 것은 어떻게 아신 거죠?”

케이건은 당신 성격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짐작했소.”

“그러셨나요. 음. 이렇게 말했지요. 케이건은 당신의 눈에 도깨비불을 붙인 다음 다리를 썰어줄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계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나요?”

케이건은 어차피 화를 내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 시점에서는 더욱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티나한이 격노하여 비형을 꾸짖었기 때문이다. 티나한은 계획을 적에게 알려주는 얼간이는 마땅히 수치와 통한을 느껴야 된다는 내용을 꽤나 동어반복적으로 떠들어대었다. 비형은 한참 후에야 겨우 사모의 말을 전해 줄 수 있었다.

“사모 페이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불장난 치면 팔을 끊어서 휘두를 테니 조심하라고. 그게 진심일까요?”

륜은 탄성을 질렀고 티나한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케이건은 우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선언에 담긴 진실성을 확인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유익할 것이 없겠소. 게다가 두억시니들까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다면 상황이 더욱 난처하군. 티나한. 륜을 업으시오. 그리고 비형. 나를 나늬에 태워주시오. 대호의 속도를 고려한다면 아무래도 좀 달려야겠소. 그러고 나서 천천히 그녀를 상대할 방법을 고려해 봅시다.”

티나한과 비형, 그리고 륜은 케이건이 얼마 동안 달릴 생각인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불쌍한 듯이 바라보았다.

하루하고 반나절 후, 비형은 케이건을 들이받으려 드는 나늬를 달래느라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리고 륜은 케이건을 향해 불을 토하려 드는 아스화리탈을 말려야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 야수들의 포악한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 하루 반나절쯤 후 파름 평원에 도착할 것 같소. 조금 더 달려보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여 티나한을 포효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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