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6)
보늬 당주가 다시 잠든 후에야 보좌관은 휘장 너머로 돌아왔다. 보좌관은 케이건이 휘장 너머를 볼 수 없도록 주의하며 나왔지만 케이건은 어차피 그쪽을 보지 않았기에 그것은 별로 필요 없는 주의가 되고 말았다. 의자에 앉아 깍지 낀 두 주먹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는 케이건에게 걸어온 보좌관은 나직한 어투로 말했다.
“은편 열 닢이오.”
케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나가에 대한 통행료는 은편 열 닢이오. 인간과 같지.”
“용은?”
“그 용의 통행료는 면제하겠소. 도로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니.”
케이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좌관을 향해 목례한 다음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보좌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도.”
케이건은 멈춰서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보좌관은 붓을 들어 도깨비지 위에 글을 써내려갔다. 케이건은 보좌관이 쓰는 글을 읽었다. 그것은 케이건에 대한 통행료를 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보좌관은 종이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도장을 찍은 다음 그것을 케이건에게 건네었다.
“이것을 가지고 내려가서 보여 주시오. 가지고 있다가 다음에도 통과할 일이 있거든 보여 주도록 하시오.”
케이건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이런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은 아니었는데.”
“물론 아니오. 우리는 그렇게 규칙을 제멋대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오. 이건 엄연한 대요금표의 적용이오.”
“내게 면제 사유가 있소?”
보좌관은 대요금표의 금속판들을 힘겹게 넘긴 다음 한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보좌관이 가리킨 부분을 읽은 케이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군.”
“그렇소.”
케이건은 보좌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던 보좌관은 케이건이 입을 열려 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케이건은 입을 다물었다. 보좌관은 지필묵을 수습하며 케이건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가 보시오.”
케이건은 도깨비불을 집어든 다음 그 방을 나왔다.
긴 계단을 내려가면서, 케이건은 11년 만에 알게 된 요스비의 죽음과 보늬 성주와의 예기치 않았던 재회, 그리고 그에 대해 알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보좌관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았다. 케이건은 비가 쉬 그치지 않을 테니 요새의 여행자 숙소를 이용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고, 산맥을 넘은 이후의 여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길잡이였다.
케이건 드라카는 길잡이였다.
문득 케이건은 손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오른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것은 허옇게 변할 정도로 주먹 쥐어져 있었고, 손가락을 펴자 손톱에 찔린 손바닥이 나타났다. 상처들 중에는 작은 핏방울이 배어 있는 것도 있었다. 상처 입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케이건은 잠시 후 핏방울을 핥았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아르히를 과음한 끝에 기절하다시피 한 티나한과 징수소의 창문을 통해 딱정벌레 나늬에게 “미녀니까 한 닢만 받겠습니다! 어? 이름만 같다고요?” 등의 주사를 늘어놓고 있는 비형의 모습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는 케이건은 언제나와 같은 길잡이 케이건이었다. 징수소의 한쪽 구석에 서서 침묵한 채 바라보던 륜은 그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륜은 침묵했다. 징수원들은 케이건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통행료를 합산해서 제시했다. 케이건은 산양을 건네줌으로써 지불을 끝낸 다음 징수원들에게 여행자 숙소로 안내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거의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비형을 부축했다. 하지만 티나한은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었고, 그래서 모든 이들의 암묵적 합의하에 징수소 바닥에 방치되고 말았다. 티나한은 그날 밤 늦게야 벼슬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두통을 호소하며 여행자 숙소의 일행에게 합류했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밤이 되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렸다. 바위 위에서, 마루나래는 사모 페이의 등에 몸을 붙인 채 앉아 있었다. 사모 페이는 모아 쥔 두 무릎을 가슴에 당겨 붙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지만 사모 페이는 두억시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여섯 시간 동안 계속해 온 일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벌써 몇십 명(사모는 주저하면서도 ‘명’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었다.)의 두억시니가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고 그보다 많은 수가 범람하는 계곡물, 혹은 뒤에서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다른 두억시니에게 떠밀려 격류에 휩쓸려 내려갔다. 두억시니들이 퍼낸 강물 때문에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수렁처럼 바뀌어 있었다. 진흙과 빗물 속에서 광기 어린 헛수고가 영원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사모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실,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했다.
사모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이었다.
그녀의 손으로 베푸는 죽음에 대한 결단.
사모는 결단을 내렸다.
사모는 일어났다. 흑사자 모피 속으로까지 파고든 빗물 때문에 그녀의 동작은 느렸지만 마루나래는 긴장하며 일어났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턱을 쓰다듬어 준 다음 그 등에 올라탔다. 사모의 의지를 받은 마루나래는 가벼운 동작으로 산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시퍼런 안광을 번득이며 내려오는 대호를 보며 두억시니들은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뒤로 조금씩 물러난 두억시니들은 쏟아지는 비 속에서 침묵한 채 마루나래와 사모를 바라보았다.
마루나래의 등에 앉은 사모는 격류 건너편,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두억시니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모는 다시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전달했다. 그 개념에 따라 마루나래는 강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두억시니들의 눈, 혹은 다른 것들이 마루나래의 움직임을 쫓았다.
강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에는 강물 또한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귀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었지만 사모에겐 큰 불편을 주지 않았다. 사모는 마루나래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쉬크톨을 뽑아들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두 손으로 쥔 채 높이 들어 올렸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사모는 쉬크톨을 사정없이 옆으로 휘둘렀다.
거대한 나무에 쉬크톨이 박혔다. 사모는 힘겹게 쉬크톨을 뽑아든 다음 다시 휘둘렀다. 물소리마저 잠재울 듯한 나무의 비명과 함께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사모는 얼굴을 때리는 나뭇조각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몇 번 더 쉬크톨을 휘두른 사모는 쉬크톨의 칼날이 단단히 박히자 허리를 굽혀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돌멩이로 쉬크톨의 칼등을 내려쳤다.
나무와 쇠가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사모는 계속해서 돌멩이를 휘둘렀다. 불꽃이 튀어 오를 때마다 쉬크톨의 날이 나무 속살을 가르며 나무 내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녀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고인 은루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돌멩이를 휘두르는 사모의 손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쉬크톨이 나무의 중심부까지 파고들자 사모는 돌멩이를 팽개쳤다. 땅바닥을 구르는 돌멩이에는 사모의 살점이 묻어 있었다. 사모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 쥔 채 사납게 외쳤다.
“마루나래!”
“어루루루룽!”
산맥을 진동시키는 포효와 함께 마루나래가 뒷발로 일어섰다. 그리고 거대한 두 개의 앞발로 나무를 밀었다. 3톤이 넘는 마루나래의 체중으로 두어 번 밀어붙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무는 허리가 부러지며 쓰러졌다.
강 건너편에 호되게 부딪친 나무가 몇 번 더 진동했다. 비탈을 따라 조금 구르던 나무는 곧 튀어나온 바위에 걸리며 고정되었다.
사모는 튕겨져 나간 쉬크톨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두억시니들은 아직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 될 수 없는 말을 나누고 있었다. 사모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루나래를 엎드리게 한 다음 사모는 그 등에 올라탔다.
“가자!”
마루나래는 빗줄기를 꿰뚫으며 바람처럼 산비탈을 타고 올랐다. 마루나래가 산 정상 가까이 뛰어오를 무렵 저 아래쪽에서는 두억시니들이 ‘외나무다리’라는 개념을 힘겹게 시험하고 있었다. 정상에 오른 다음, 사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 속을 향해 그녀가 살해한 나무에 대한 사과의 니름을 닐렀다.
먼 곳의 산봉우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