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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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6장 – 길을 준비하는 자 (7)


륜은 잠을 깼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레 소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륜은 잠자리가 기묘하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대가 그리워진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본 것이 벌써 몇 달 전이었다. 륜은 자신이 노숙 생활과 방바닥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믿었다. 그래서 륜은 무엇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어나 앉은 륜은 요새의 두꺼운 벽에 뚫린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에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여행자 숙소의 가장 큰 방에 배정되었는데, 그것은 오직 티나한의 철창 때문이었다. 가장 큰 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창은 바닥에 대각선으로 놓을 수밖에 없었다. 티나한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 옆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비형은 티나한의 다리를 벤 채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티나한을 마구간에 있을 나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케이건이 있던 자리를 보던 륜은 그가 자리에 없음을 깨달았다. 륜은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여행자 숙소의 구조는 단순했다. 문 앞의 약간 낮은 곳은 신발을 놓게 되어 있었고 그 외의 부분은 돌 위에 짚으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물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들이 몇 개 부착되어 있었다. 온돌 같은 시설은 없었다. 암벽 속에 만들어진 공간인지라 그런 것을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비형은 륜에게 씌워 둔 도깨비불을 없애지 않았다. 비형이 푹 쉴 수 없다는 것에 미안해하며 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건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륜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암벽을 뚫어 만든 사각형의 조그마한 창은 창문이라기보다는 환기구처럼 보였다. 거의 50센티미터가 넘는 암벽을 관통하여 만들어져 있기에 그런 인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륜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몽환적인 폭풍우가 산맥을 휩쓸고 있었다.

그 밤하늘은 결코 섬광에 물든 암흑이 아니었다. 벼락이 작렬할 때마다 공기는 순식간에 가열되어 열류를 퍼뜨렸다. 니름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온갖 색채들이 밤하늘의 패권을 놓고 대회전을 벌이고 있었고 휘몰아치는 광풍은 그 열류에 물들어 하늘을 질주하는 불가해한 짐승들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곳에서는 작렬하는 암흑과 칠흑의 빛이 가장 결백한 색채였다.

그 광경에 매혹되어 있던 륜은 조금 후에야 시선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창이 워낙 깊은지라 볼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어 있었다. 륜은 창문에 머리를 밀어 넣어 시야를 확장하려 애썼다. 그때 륜은 케이건을 보았다.

잠깐 동안 륜은 공포에 빠진 채 케이건을 보았다. 그의 눈에 케이건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하늘에 떠서 폭풍우치는 시구리아트 산맥을 내려다보고 있는 케이건의 모습은 심장이 멎을 만큼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륜이 보다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의 일이었다.

케이건은 암반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선반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하지만 아래쪽에서는 그런 구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없는 듯했다. 실제로 그날 오후 아래쪽에 있었던 륜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륜은 그것이 혹 있을지도 모르는 요새에 대한 공격 시에 감시나 비밀스러운 공격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임을 깨달았다. 혹, 징수소의 경고문대로 뛰어오르려는 레콘에게 물을 끼얹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일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을 해 보던 륜은 갑자기 케이건이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륜은 당주의 방에서 목격했던 일을 떠올렸다. 케이건과 당주와의 친분이 그렇게 두터운 것일까? 요새의 비밀 장소를 케이건이 알고 있을 만큼? 케이건이 있는 선반은 창문에서 볼 때 왼쪽 조금 아래였다. 따라서 륜은 케이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륜은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케이건을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케이건이 륜에게 ‘아버지의 친구’라는 관계를 허락지 않음은 분명했다. 케이건은 요스비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륜과 공유하는 것마저도 거절했다. 케이건이 륜에게 허락지 않은 것에는 ‘친구’나 ‘동료’ 또한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자보로를 구하기 위해 비형의 목을 따 버리려 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륜은 케이건에게 동료애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륜은 언젠가 들었던 ‘머리와 몸 정도만 가져가도 성공’이라는 케이건의 말을 떠올리며 비늘을 잔뜩 곤두세웠다.

<살아 있는 고깃덩이 취급인가. 그러면 얼마 있지 않아 자신도 그렇게 취급될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닐 텐데.>

심장도 적출하지 않은 애송이지만 륜은 사람들 간의 관계가 상호적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상대방을 단 하나의 가치나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 또한 그렇게 되고 만다. 케이건이 륜을 ‘친구의 아들’로 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륜 또한 케이건을 ‘아버지의 친구’로 생각할 수 없었다. 케이건이 허락하고 있는 하나의 의미만이 륜이 가질 수 있는 케이건의 의미였다. 케이건은 그들의 길잡이였다.

<만약 케이건이 죽는다면, 우리는 길잡이가 없어진 것에 짜증을 느낄까, 친구가 없어진 것에 대해 슬퍼할까?>

케이건이 떠났을 때 그들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케이건이 다시 돌아오자 기쁨을 느꼈다. 륜은 그것이 친구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인지 수완 좋은 길잡이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비형이나 티나한 또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복잡한 고민 속에서 케이건을 바라보던 륜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케이건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케이건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륜은 청각에 주의를 집중했다.

륜의 몸이 굳었다.

시구리아트 산맥과 그보다 더 거대한 폭풍우를 향해 케이건이 외치고 있는 것은, 목이 찢어져라 비탄 속에서 외치고 있는 것은 요스비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륜의 몸이 굳은 것은 그 처절한 외침 때문만은 아니었다.

케이건은 요스비를 죽인 나가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저주가 기이했다.

케이건은 아버지의 목숨값을 받아내겠노라고 포효하고 있었다.


폭풍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간혹 숨을 돌리듯 폭풍이 멈췄을 때도 비는 계속 쏟아졌다. 케이건은 거의 아무런 유감도 없는 목소리로 “비가 그칠 때까지 머물겠소.”라고 말했고 티나한은 케이건이 막심한 유감을 느낀다고 말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불쌍한 티나한은 그만 의기소침해진 채 숙소에 틀어박혔고 케이건이 매일의 숙박비를 지불할 때마다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이토록 우울해하는 모습은 유료 도로당의 당원들 중 감수성 예민한 자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숙소에서는 거의 매일 밤 당원들과 티나한이 벌이는 술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첫날 워낙 호되게 당한 티나한은 당원들의 도움을 받아 아르히를 적절히 마시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술판부터는 혼수 상태가 된 당원들 사이에서 홀로 유유히 아르히를 마시는 티나한의 그림 같은 모습이 목격되었다.

당원들은 그들에게 매 끼니마다 네 사람분의 식사를 가져다주었지만 륜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계속된 음주 때문에 입맛이 별로 없는 티나한도 거절했기에 륜 몫의 식사는 언제나 비형의 차지가 되었다. 든든한 배를 꺼뜨릴 방법을 찾기 위해 요새 안을 어슬렁거리던 비형은 거대한 실내 씨름판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

“자신을 죽이는 신이여, 사랑해요!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죠?”

비형과 죽이 맞은 것은 음주보다 몸을 단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당원들이었고, 그때부터 당원들은 굴욕적인 패배 기록을 쌓기 시작했다. 눈두덩이가 퍼렇게 멍들거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당원들은 요새 안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를 향해 악쓰듯 외쳤다. “제발 한 번만!” 뒤에 생략된 말은 물론 ‘이겨 보자!’다. 하지만 그것은 꽤나 그 달성이 요원한 소망일 듯했다. 가장 큰 당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격에 정통 도깨비 씨름을 구사하는 비형 앞에서 당원들은 모래와 친해지는 법을 강제로 배워야 했다.

각자의 취미에 매진하느라 티나한과 비형은 케이건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륜은 케이건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알고 있었다. 륜은 얼굴을 가린 채 케이건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륜이 따라다니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륜은 케이건과 함께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이 축적해 온 장구한 역사를 구경했다.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이 처음 생긴 것은 천사백여 년 전이다. 대확장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지. 그래서 이렇게 책이 많다.”

요새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케이건은 륜이 읽을 만한 것이 없어 지루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일개 요새의 도서관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나가가 볼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책들의 글씨체가 나가가 보기엔 너무 가늘었다. 륜은 케이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대확장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모르지는 않을 텐데.”

륜은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북쪽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케이건은 읽던 책을 조용히 덮고는 특유의 감정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확장 전쟁 자체는 영웅왕의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전쟁은 국소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고 전면전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영웅왕과 그의 아라짓 전사들은 강력했다. 그리고 영웅왕이 죽은 후에도 아라짓 전사들의 강력함은 무디어지지 않았고, 실제로 많은 역사가들은 영웅왕 사후 80년쯤을 본격적인 대확장 전쟁의 개시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너희 나가들은 심장 적출법을 완전히 터득했고 만민 회의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사람들은 영웅왕보다 나을 수 없고 그만큼도 될 수 없는 후대의 왕들에 실망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의 첫 번째 당주가 산맥을 넘는 길을 찾아낸 것도 그 시기였다. 그리고 공세가 시작되었다.”

“긴 전쟁이었지요.”

“그래. 긴 전쟁이었다. 결과는 자명했지. 전사자나 부상자들이 거의 생기지 않는 나가들과 다치면 몇 달 동안, 심한 경우 몇 년 동안 전쟁에 복귀할 수 없는 인간들 간의 전쟁이었으니. 그 전쟁이 그토록 길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라짓 전사들의 용맹함 외에 다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불세출의 용맹도 죽지 않는 자들과의 전쟁에 무한히 소모될 수는 없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지.”

“결정적인 사건?”

“바라기가 사라졌다.”

륜은 고개를 조금 들어 케이건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도서관에서도 케이건은 등 뒤에 바라기를 걸고 있었다.

“그래. 이 칼. 이 칼은 영웅왕의 검이었고 아라짓 전사들은 이 검의 계승자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걸 뭐라고 부를까. 그것은 영웅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단지 검 한 자루일 뿐이지만, 아라짓 전사들에겐 하나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검이었다. 그 왕의 검이 사라진 거지. 아라짓 전사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왜 바라기도 가지지 않은 왕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너무 미신적이군요.”

“옛날 사람들이다. 그리고 죽지도 않는 괴물들과 매일 싸워야 했던 자들이고, 지금 사람들이야 너희들의 생태에 대해 익숙하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겠냐.”

“그 칼은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된 건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도난당했다면 어딘가에서 나타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어. 게다가 누가 이것을 훔치겠느냐. 지금은 내 손에 들어와 있지만, 역사가들은 그것을 ‘바라기의 실종’이라 부르며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한다. 아라짓 전사들은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결국 쓰러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왕국은 나가들을 상대로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해서 멸망한 것일 수도 있고. 나가들이 대확장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소드락과 심장 적출법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설명하기 위해선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바라기의 실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라기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전설들이 마구 생겨난 것도 그때였다. 이름도 수십 가지고 형태도 수십 가지인 검의 탄생이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겠지만 이곳 북부에서는 대단하지. 너는 이 땅에서 어쩌면 번개처럼 구부러진 칼 ‘날벼락’ 이라든지 휘두르면 폭풍이 일어난다는 ‘폭풍의 검’, 선택된 영웅만이 들 수 있다는 ‘영웅’, 그 이름을 부른 자를 죽이고 말기에 이름을 잊어버린 검 ‘실명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전부 영웅왕의 검과 그에 얽힌 기괴망측한 전설을 가리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이 칼을 보여줘도 이것이 영웅왕의 검 바라기라는 것을 아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나는 예전에 진지한 태도로 영웅왕의 검은 무게가 1톤이었을 거라고 말하는 자를 만난 적도 있다.”

륜은 웃을 수 없었다. 케이건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그래. 염원이 너무 컸고 상실감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런 전설들이 생겨난 거지. 잃은 것이 더 크게 느껴지는 간단한 이치다. 영웅왕의 검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겐 영웅왕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지.”

“당신들에게 영웅왕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였군요.”

“이 북쪽에서라면, 너는 영웅왕이 밤하늘에 별을 배치하는 신들의 작업을 지도했다고 말하더라도 상당수의 동조자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도깨비와 레콘들은 그 당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죠?”

“도깨비들은 대부분 전투보다는 나가에게 땅을 내어 주는 편을 선택했다. 물론 가끔 도깨비가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던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드문 예였지. 그중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아킨스로우 협곡. 10만 명 몰살 사건이죠.”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뜨거워 형체조차 없는 불이 협곡을 격류처럼 치달았다. 저 심장 없는 괴물들이 선 채로 재가 되어 버린 자리에 녹은 바위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후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사람들은 밤이면 협곡에서 솟아오르는 열기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용암처럼 변한 바위들이 내뿜는 빛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이 남긴 말이야. 그건 나가의 실수였다. 놔뒀으면 그냥 물러났을 도깨비들을 너무 잔혹하게 도발했다. 그 도발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도깨비도, 그리고 목격자들도 말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제가 듣기로는 미친 도깨비가 나가의 부대를 습격했다고 하던데요.”

“너는 비형을 봤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미칠 것 같더냐?”

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도 더 이상 다그치지는 않았다.

“레콘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았다. 신부를 찾아다니거나, 혹은 티나한처럼 자기 할 일만 했지. 물론 자신의 가정이나 자신의 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섭게 싸웠지만, 그런 1인 전쟁은 전설은 많이 남겼지만 영향력 있는 역사적 흔적은 남기지 못했지.”

“셋이 하나가 되지 못했군요.”

륜의 정리에 케이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머지 셋이 모여서 나가를 상대했다면 대확장 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와는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깨비는 싸우는 것을 거부했고 레콘은 혼자 싸웠다. 나가들을 막은 건 날씨였지.”

“키탈저 사냥꾼이 아니고요?”

“키탈저 사냥꾼들의 모습이 너희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모르겠다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한 행동은 무장 투쟁도 전쟁도 아닌 사냥이었다. 나가를 대상으로 한 사냥이었지. 만약 저 우둔한 권능왕이 도움이 되기 위해 찾아온 자를 정성껏 맞이하는 극히 간단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키탈저 사냥꾼들도 전사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만, 권능왕은 그런 상식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고, 결국 키탈저 사냥꾼들은 레콘처럼 단독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확장 전쟁을 승리했다고 믿었던 너희들에게는 느닷없이 몰아쳐 온 맹공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우리의 옛이야기에서는 아라짓 전사보다 키탈저 사냥꾼을 더 끔찍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더군요.”

“아라짓 전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키탈저 사냥꾼들과는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맞닥뜨려야 했을 테니.”

“날씨군요.”

“날씨야.”

륜은 침묵했다. 케이건이 다시 책장을 들어 올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 도서관의 궁륭 천장을 바라보던 륜이 나직이 말했다.

“제 아버님이 정말 이곳까지 오셨나요? 이렇게 추운 땅까지?”

케이건은 륜이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 지금껏 말을 이어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거절뿐이었다.

“요스비에 대한 이야기라면 하고 싶지 않다.”

“저는 그분의 아들이에요.”

“상관없어.”

“제기랄, 왜 상관이 없어요! 제가 요스비의 아들이에요. 당신이 아니라!”

륜은 책상을 밀어붙이며 일어났다. 튕겨져 나간 의자가 다른 책상에 부딪혀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케이건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륜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제가 요스비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합쳐 봐야 몇 개월도 되지 않아요! 요스비는 가끔 페이 가문을 방문했던 방문자였을 뿐이에요.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함께 있었던 날은 며칠 되지도 않아요! 그리고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들에서도 요스비는 다른 방문자와 똑같은 방문자였을 뿐이고! 당신은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아버님과 함께 보냈겠죠. 이 무서운 북쪽을 함께 여행했겠지요. 당신이 아버님께 노래를 가르쳐 줬고, 아버님은 당신에게 팔을 먹였죠! 하지만!”

륜은 얼굴을 가린 천을 아래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보세요! 이 나가의 얼굴을 봐요! 제가 그분의 아들이에요. 당신이 아니라! 당신에겐 요스비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권리가 없어요. 설령 있다 해도 저보다 더 크지 않아요!”

“너는 도망쳤다.”

륜은 현기증을 느끼며 책상을 짚었다. 그의 눈앞에서 책상이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케이건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그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너는 심장 적출식에서 도망쳤고, 하텐그라쥬에서 도망쳤고, 나가들에게서 도망쳤다. 그것도 11년이나 걸려서 겨우 내린 결정이었지. 네 권한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게 있다 해도 그건 이미 오래전에 고사(枯死)했을 것 같군.”

륜은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때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것을 되살리려 하지 마라. 륜.”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요스비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네게 있지도 않은 복수의 의무 따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복수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너는 네 동족들에게서 도망쳐 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지금 너는 부끄러워하고 있다. 왜 네게 있지도 않은 복수의 의무를 억지로 네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다음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하는 거지? 단지 요스비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걸 위해서라면, 네 말처럼 네 모습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네 믿음이면 충분하고.”

“복수의 의무가・・・・・・ 없다고요? 아들인데?”

“요스비의 아들은 어쩌면 수십 명일지도 모른다. 요스비가 페이 가문만 방문한 것은 아닐 테니.”

륜은 허탈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말대로였다. 더할 나위 없이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륜은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케이건은 간단히 륜의 위치를 요스비의 무수한 아들들 중의 하나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수십 명이나 될지도 모르는 아들들 중의 하나이니 특별히 제게 복수의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그 임종을 본 아들은 저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요스비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 아들도.”

“그래. 그렇겠지. 원한다면 그걸 기억해 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나가에게 아버지라는 건 없다. 네가 나가에게 있지도 않은 부자 관계를 그토록 인정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너만 납득하는 관계를 빌미로 그걸 납득할 수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징벌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티나한은 자신이 물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세상의 조선공들을 다 찔러 죽이려 들지는 않아. 비형은 자신이 피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양피지를 만드는 자들을 태워 버리지도 않고, 티나한은 그저 물을 피하고 비형은 그의 선조들이 창안해 낸 도깨비지를 쓸 뿐이지. 만약 내가 티나한과 비형을 위해 조선공들과 제지공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하면 티나한과 비형은 황당해하겠지. 마찬가지다. 요스비는, 네가 그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니르면 어이없어할 테지.”

“아버님은 저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닐렀습니다!”

“그랬겠지.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복수해 줄, 마치 인간의 아들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쓸데없는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지 않아도 너는 그의 아들이다.”

륜은 넘어졌던 의자를 바로 세워 거기에 앉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무언가 비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해방된 듯한 기분도 느꼈다. 륜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케이건은 사모 페이도 인정하지 않았던 부자 관계를 담담하게 인정해 주었다. 사모 페이를 제외하면 요스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그가.

시구리아트 관문 요새의 징수소장이 격렬한 공복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갑자기 보편성을 한참 뛰어넘는 특기할 만한 미각을 개발하게 된 것도 아니다. 징수소장이 요금표를 씹어 먹고 싶어졌던 이유는 단지 그가 매우 분노했기 때문이다. 씨근거리며 다시 한번 요금표를 바라본 징수소장은 자신이 찾던 항목이 거기 없다는 우울한 현실만을 재확인했다. 징수소장은 낙심하며 도로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징수소장으로 하여금 매우 특이한 충동을 야기시켰던 그것은, 징수소장의 애타는 소망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뚜렷해진 모습으로 관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징수소장은 징수원들 전부를 붙잡고 애원하고 싶어졌다. 제발, 누가 저건 검은 모피로 몸을 가린 채 대호를 타고 다가오고 있는 여행자가 아니라고 말해 줘.

그러나 내리는 빗속을 조용히 걸어오고 있는 것은 검은 모피로 몸을 가린 채 대호를 타고 다가오고 있는 여행자였다.

갑자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징수소장은 옆을 바라보았고 징수원 한 명이 징수소의 문을 잠그는 것을 발견했다. ‘좋은 생각이군.’ 징수소장은 칭찬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그 생각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관문 앞에 도달한 대호는 걸음을 멈췄다. 창문의 높이 때문에 대호 위에 타고 있는 여행자를 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징수소장은 감히 머리를 내밀지 못했다. 다행히도 대호가 몸을 숙여 그 무서운 기수를 아래로 내려 주었다. 기수는 대호의 갈기를 가볍게 붙잡은 채 창문을 통해 징수소장을 바라보았다.

“여길 통과할 생각입니까?”

“그래.”

징수소장은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기막힌 목소리였다. 며칠 전부터 요새에 머물고 있던 여자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에 징수소장은 몽롱한 기분까지도 느꼈다. 징수소장은 잠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목 졸린 까마귀나 낼 법한 소리라는 사실에 슬퍼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대호에 대한 통행료를 잘 모르겠습니다. 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위쪽에 문의를 해 봐야겠습니다.”

징수소장은 그렇게 말하며 등 뒤로는 재빨리 징수원에게 손짓을 보내었다. 징수원 하나가 위로 달려갔다.

“통행료? 여길 통과하려면 돈을 내야 하나?”

“예? 잘 모르시나 보군요. 당신이 걸어온 길은 전부 우리가 만들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가로 이 길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에게 돈을 받습니다.”

검은 모피로 몸을 가린 여자는 잠시 침묵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그녀를 보던 징수원들은 옆에 있는 대호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 나가 그녀를 안으로 데려오고픈 충동을 느꼈다. 여자는 조금 후 말했다.

“하긴, 길이 잘 정돈되어 있더군. 그렇다면 지불하는 것이 옳을 것 같군. 알겠어. 얼마지?”

징수소장은 하대를 하는 여인에게 좀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특별히 화를 낼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통행자들은 통행료 앞에 평등하다. 그 말은 특별히 공경하지도, 천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게다가 징수소장은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인이라면 하대를 듣는 것쯤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대호에 대한 통행료를 잘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승용물이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무서운 생물을 타고 있으신 겁니까?”

여자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그 통행료라는 것이 일률적이지 않고 세분화되어 있나 보군?”

“예. 인간과 레콘과 도깨비, 모두 다릅니다. 레콘이 제일 비싸지요. 몸무게가 무거운 편이고 달리기라도 하면 도로를 손상시킬 위험도 커서.”

“그렇다면 나가에게도 다른 요금을 받겠군?”

“예? 나가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나가들이야 저 한계선 남쪽에 있으니 저희들로선 별로 고려할 일이 없지요.”

“꼭 그렇지는 않을 거야.”

여자는 그렇게 말한 다음 모피를 벗어 보였다. 다음 순간 징수소장은 왜 여자가 통행료라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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