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7장 – 여신의 신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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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7장 – 여신의 신랑 (5)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하인샤 대사원의 거룩한 승려들은 신과 우주와 모든 종류의 ‘본질’이라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관심이 많았지만 무기에 대해서는 도통 아는 것이 없었다. 벽월암에 보관된 이주무 선사의 무구들을 본 티나한은 처음에는 부리를 부딪치다가, 차츰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마침내 온몸을 부풀린 채 유품 보관을 책임지고 있는 페라 대선(大選)과 그의 조수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들 승려들이 고승의 유품을 함부로 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한 정성으로 보관해 왔으나, 다만 무지에서 비롯된 정성이 무기에겐 고문이 되었을 따름이다.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열심히 물걸레질을 했노라고 변명하는 승려들 앞에서 티나한은 말도 꺼내기 싫어졌다.

“쇠칼날에는 물을 대는 게 아니다. 건포로 닦고 동백기름을 발라라. 젠장.”

페라 대선과 그의 조수들은 또 하나의 지식을 얻었노라며 희희낙락했지만 티나한은 수염 볏을 비틀며 케이건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케이건. 이건 무기가 아니야. 이걸 무기라고 부르려면 지나치게 많은 극기가 요구된다고.”

케이건은 별말 없이 화살을 살펴보고 있었다. 전통 또한 승려들이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닦아내어 그 원래 형상을 짐작키 어려운 장엄한 몰골로 변해 있는지라 케이건은 조심스럽게 화살을 뽑아야 했다. 쓸만한 화살들을 추려낸 케이건은 활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걸로 됐소. 이걸 좀 쓰겠소. 페라 대선.”

페라 대선은 지금부터 당신을 겁탈하겠다는 선언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사원의 보물입니다!”

케이건은 말없이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페라 대선을 설득했다.

“페라 대선. 미안하지만 지금 이 분께서는 급히 활이 필요하신 것 같군. 이 사원 전체를 뒤져봐도 활이라곤 이것뿐이잖아. 어쩔 수 없네.”

“활이 필요하다면 유학생들이……”

“활을 가지고 있는 유학생은 없네.”

“그렇다면 산 뒤편의 저 흉악한 밀렵꾼들에게 가면…….”

“밀렵꾼들은 활을 쓰지 않아. 활은 밀렵에 쓰기엔 너무 고급스러운 무기이고 익히기도 어려워. 그 자들은 활 재주 익힐 시간이 있으면 덫이라도 하나 더 놓으려 할 걸.”

무심히 설명하던 오레놀 대덕은 문득 페라 대선과 행자들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제야 대덕은 자신이 밀렵꾼들에 대한 박식함을 지나치게 많이 드러내었음을 깨달았다. 대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미 말했듯이 지금 사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네. 저 무기들로 사원을 지키셨던 이주무 선사께서는 같은 목적으로 저 무구들이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시지 않으실 걸세. 그리고 이것은 대선사께서 전부 허락하신 일일세.”

결국 케이건은 이주무 선사의 활과 화살, 깍지를 들고 나올 수 있었다. 좀 지나치게 손상된 전통 대신 케이건은 허리춤에 화살들을 꽂아 넣었다. 티나한은 ‘새총만도 못한 활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 의미로 부리를 부딪치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걸로 뭘 어쩔 건데?”

케이건은 비형을 쳐다보았다.

“비형.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소. 급히 파름 평원으로 날아가야 하오.”

비형은 나늬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나늬에 올라타는 대신 비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형. 분명히 경고해 두어야겠소. 당신은 지독한 모습을 보게 될 거요. 내가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건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당신은 단순히 나를 그곳까지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그 일에 일조하게 될 거요.”

비형은 사색이 되었다.

“제, 제게 안 그러신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아니오. 하지만 내게는 당신의 딱정벌레가 필요하오.”

“나늬가 필요하시다고요?”

“그렇소. 당신이 나늬를 조종해 주면 좋겠소. 하지만 당신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젠가 티나한이 그랬던 것처럼 나 혼자서 나늬를 타고 가겠소. 그때처럼 당신이 나늬에게 상세한 명령을 내려줘야겠지만.”

“비행이 필요하신 것이군요. 그건 복잡한 비행입니까?”

“대단히 복잡한 비행이 될 거요.”

비형은 주먹을 꼭 쥔 채 말했다.

“가겠습니다.”

케이건은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비형은 주저 없이 말했다.

“견딜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에요. 만일 제가 견디지 못하면, 저를 어르신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럴 수 있지요?”

케이건은 비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소.”

비형은 굳은 얼굴로 나늬에 올라탔다. 케이건은 오레놀과 티나한, 륜 등을 차례로 바라보고는 말없이 비형의 등 뒤에 탔다. 나늬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파름 산의 하늘로 날아오른 나늬는 하인샤 대사원의 하늘을 빙글 돈 다음 곧장 평원을 향해 날아갔다. 두어 시간쯤 날아갔을 때 비형은 지평선을 뒤덮은 먼지 구름을 발견했다. 비형은 뒤를 돌아보았고 케이건은 손짓으로 내려갈 것을 명령했다. 아래를 살핀 다음 비형은 조그마한 소택지 옆의 언덕에 나늬를 착륙시켰다. 억새가 잔뜩 우거져 몸을 감출 수 있으면서도 지대가 다른 곳보다 높은 장소였다. 나늬에서 내린 케이건은 두억시니들의 방향을 잠시 바라보고는 주위의 억새를 꺾기 시작했다.

바닥에 억새를 깔아 놓은 케이건은 그 위에 주저앉았다. 오른 다리를 펴고 왼발로 오른쪽 허벅지를 받친 케이건은 시위를 얹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부려 놓은 활이라 잘 얹혀지지 않는 듯했지만 케이건은 침착하고 끈기 있게 시위를 얹었다. 양쪽 고자에 시위가 걸리자 케이건은 비형에게 도깨비불을 요구했다. 비형이 땅바닥에 도깨비불을 만들어 주자 케이건은 느긋한 동작으로 불 보이기를 했다.

할 일이 없었던 비형은 가끔 남쪽을 바라보았고, 그때마다 두억시니들이 일으키는 먼지 구름이 더욱 커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두억시니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느린 동작으로 활을 불에 쬐고 발로 밟았다. 비형은 초조감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활의 모든 부분에 불 보이기를 한 다음 케이건은 현을 몇 번 당겼다. 만족할 만큼 얹혀졌다고 판단한 듯 케이건은 깍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비형의 바람대로 다음 행동에 들어가기는커녕 케이건은 활을 내버려 둔 채 그보다 더 한가롭기도 어려울 만큼 편안한 동작으로 깍지를 만지작거렸다. 비형이 참다 못해 재촉했지만 케이건은 “활이 식어야 할 것 아니오.”라고 일축한 채 두억시니들이 다가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기다렸다. 비형은 그제야 케이건이 말한 한 시간이라는 것이 활을 얹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른 준비는 더 필요 없다는 말인가? 비형이 다시 두억시니들을 돌아보았을 때 케이건이 활을 쥔 채 부스스 일어났다. 비형은 반가운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지만 케이건은 두억시니 쪽을 슬쩍 보고는 도로 앉았다. 비형은 어이가 없었다.

“기다려야겠소.”

비형은 나늬에 걸터앉았다. 케이건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쨌든 3,000마리의 두억시니가 정면에서 돌격해 오고 있는 시점에서 취하기 매우 어려운 거동이라 할 것이다. 인내심을 잃고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비형이 다시 재촉했을 때 케이건은 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형은 반색하며 일어났으나 케이건은 또다시 두억시니 방향만 흘깃 쳐다보고는 도로 앉았다.

“좀 더 기다려야겠소.”

마침내 다가오는 두억시니들의 발소리를 느낀 나늬가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땅이 울리고 있었고 황야에는 기괴한 바람이 불었다. 아스라하지만 오싹오싹한 두억시니의 괴성이 그 바람을 타고 비형을 엄습했다. 케이건이 또다시 일어났을 때, 비형은 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더 기다려야겠지요?”

“아니오.”

비형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케이건은 두억시니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비형은 케이건의 옆에 가서 그와 시선을 맞춰 보려 시도했고, 케이건이 하늘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의 깊게 하늘을 보던 비형은 곧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케이건은 활과 화살을 챙겨 들며 나늬에게로 걸어갔다.

“저 하늘치에게로 날아갑시다.”

두억시니들의 뒤편 하늘에서, 거대한 구름을 찢어 발기며 하늘치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구리아트 산맥에서부터 일행과 같은 방향으로 날아오던 그 하늘치였다. 비형은 나늬에 올라타는 케이건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나늬는 하늘치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할 텐데요?”

“300미터까지는 접근하잖소?”

“그런데요?”

“그 정도면 충분하오. 눈이 많으니까.”

“예? 눈이 많다니오?”

“하늘치 말이오. 하늘치에겐 눈이 많소.”

케이건의 손에 들린 활과 하늘치를 번갈아 쳐다보던 비형은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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