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8장 – 열독 (9)
하인샤 대사원의 외관은 원래부터 통일성이나 조화미라는 요소를 결여하고 있었다. 그 내부에 간직한 위대한 역사와 장대한 전통 덕분에 흠잡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눈이 외부로 향하는 것을 피하고 있을 뿐. 만약 그런 내부적인 힘에서 눈을 돌려 가장 객관적으로 하인샤 대사원의 외관을 평가한다면 하인샤 대사원은 ‘거의 난잡하다’.
불행히도 근래 며칠 동안 행자들과 승려들은 그런 평가가 내부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울한 의혹을 느껴야 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경내를 돌아다녀도 빡빡 깎은 머리 이외에는 만날 수 없는 것이 산사의 단조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사원은 짧은 머리, 긴 머리, 땋은 머리, 올린 머리, 반만 깎은 머리 등으로 가득 차 오히려 승려의 빡빡 깎은 머리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게다가 그 각종 ‘머리’들이 들고 다니는 무장들은 어찌나 흉흉한지 승려들은 자신이 산사에 있는 것인지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말투의 다종다양함은 그런 혼란을 가중시켰다. 빠르게 재재거리는 소리, 느리게 굴러가는 소리, 지금부터 네 모가지를 몸에서 분리해 주겠다는 듯이 울부짖는 소리. 승려들은 그것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언어학이나 수사학을 공부하는 일부 학승들만이 크게 기꺼워할 뿐 대부분의 승려들은 방문자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땅만 보며 걸어 다녔다. 불행히도 모든 방문자들은 승려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다.
대사원의 살림을 담당하는 사제들 또한 방문자들에 대해 골머리를 아파했다. 품위를 아는 많은 수의 방문자들이 사원에 흡족할 만한 보시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대사원의 재정 상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온 방문자들의 다양한 식성이 문제였다. 많은 수의 방문자들이 사원의 담백하고 소박한 음식에 염증을 냈다. 특히 몇몇 강맹한 수렵 부족들은 식사 공양 때마다 노골적으로 분개한 표정을 지어 승려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드러내놓고 불평하는 자는 아직 없었지만 파름 산 뒤편의 밀렵꾼들과 작당하고 몰래 고기를 구워 먹다가 들켜 창피를 당한 방문자는 몇몇 있었다.
방문자들의 존재가 사원의 우환거리로 부상하고 있음은 더없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날 오후, 승려들은 넋이 나간 듯한 방문자들의 모습을 보며 작은 쾌감을 느꼈다.
방문자들은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 한껏 부릅뜬 눈, 어떻게든 눈을 맞춰 보려 애쓰는 눈 등이 향하는 곳에는 쌍신검을 소지한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케이건 드라카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조용히 사원의 경내를 걷고 있었다. 교활하게도 케이건은 가끔 방문자들을 흘끔 바라보고는, 깊이 고뇌하는 표정을 짓다가, 주저하며 다가서려는 몸짓을 하고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케이건이 ‘무학당의 손님’이라는 것을 전해 들은 방문자들은 그런 케이건의 태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하들의 급한 연락을 받고 체통도 잠시 접어 둔 채 부리나케 달려 나온 군웅들은 그런 케이건의 일거수일투족에 호흡이 답답해지는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선뜻 다가서서 말을 붙이는 자는 없었다. 케이건의 태도는 냉엄했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묘한 대치가 오랫동안 계속될 리는 없었다. 케이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방문자들은 모두 세계의 곳곳에서 일가를 이룬 자들이었고 그중에는 효웅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 걸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한 남자가 케이건을 향해 걸어왔다. 사려 깊게도 그는 부하들을 내버려 둔 채 홀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케이건은 경내에 작은 정원 앞에 멈춰 서서 해당화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해당화가 만발하구려.”
“산에는 원추리가 피고 있소.”
“신기한 검을 가지고 계시는군. 실용성이 의심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자라난 백발로 이마의 대부분과 얼굴의 상당 부분을 뒤덮고 있는 덩치 큰 노인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얼굴도 풍성한 흰 수염 때문에 코 아래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훌륭하다는 이유로 청년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만한 체격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긴 다리와 거무튀튀한 얼굴, 그리고 꼿꼿한 자세를 차례로 관찰한 케이건은 마지막으로 그 오른팔 뒤에 칼날을 감추듯 거꾸로 쥐어져 있는 병기를 보고는 결론을 내렸다.
“그쪽의 대도(大刀) 또한 상당하군. 그리고 내 것과 달리 그 무기는 이미 실용성이 충분히 증명된 것으로 알고 있소. 괄하이드 변경백.”
노무사 괄하이드 규리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케이건의 말은 덕담이 아니었다.
“과부와 고아들을 생산해 내는 데 탁월하다더군.”
괄하이드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늙은 변경백은 차분한 언성으로 말했다.
“동의하오. 결국 무기란 놈의 정체는 그런 가증스러운 것이지. 하지만 육십 평생에 수치스러운 칼질은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오. 귀하의 이름은?”
“케이건 드라카.”
“음? 그건 이름이 아니오. 흑사자와 용이라니.”
“키탈저 사냥어를 아시오?”
“어쩌다 주워 들은 몇 개의 단어를 아는 정도요.”
“나는 그걸 이름으로 삼고 있소.”
“알겠소. 케이건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요?”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리하 가문은, 그들 자신의 주장을 따른다면 왕국 아라짓의 마지막 신하다. 왕국이 이미 사라진 지 800년이나 지난 현재까지도 고집하고 있는 이 변경백이라는 호칭은 그들의 충성의 대상이 왕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한다면 그들이 왕께 보내는 것은 충성의 감정뿐이라는 의미도 된다. 어쨌든 변경백의 권한은 왕에 필적한다. 왕과 변경백이 주종 관계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현실적인 측면만 놓고 본다면 변경백은 하나의 국가 안에 있는 두 번째 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모든 고찰은 사실과 무관하기에 무의미하다. ‘진짜’ 변경백의 전통은 팔백여 년 전, 변경의 방비라는 변경백 본연의 사명을 저버리고 나가에 대항한 전투에 참전한 후사린 규리하에서 단절되었다. 현재의 규리하 가문은 대확장 전쟁이 끝나고 왕국이 사분오열된 이후 ‘규리하의 거성’을 개축한 과텔이라는 이름의 신흥 부자의 후손이다. 과텔은 규리하의 거성뿐만이 아니라 그 이름과 지위까지도 승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이 규리하 가문의 적손이라고는 감히 주장하지 못했지만 대신 방계로 이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과텔 ‘규리하’의 설명을 믿지 않았지만 구태여 반대할 의무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부자가 규리하의 거성에서 살며 서신 아래에 ‘변경백’이라는 서명을 넣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국그릇을 뺏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규리하의 거성이 있는 지러쿼터 산맥 서부 지역은 일찍이 왕들조차도 변경백을 둘 수밖에 없었던 거칠고 야만스러운 곳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땅에서 어떤 미치광이가 우스꽝스러운 호칭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떤 사람들은 과텔 규리하가 규리하의 거성에 걸려 있는 전투도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규리하의 거성에 살고 있는 후사린 규리하의 망령이 과텔에게 씌었다고 설명하기도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과텔 규리하가 ‘상무 정신’을 강조하기 시작했을 때 규리하 부인은 남편이 미친 줄 알았다. 그렇잖아도 험준하고 볼 것 없는 땅에 살게 된 것에 불만을 잔뜩 품고 있던 규리하 부인은 이혼을 선언한 다음 지러쿼터 산맥 동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과텔 규리하는 만년에 맞이한 이혼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때 과텔 규리하는 자신이 정말 위대한 규리하 가문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었고 충성을 바칠 왕이 돌아왔을 때 변경백으로서의 책무를 다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섯 살 난 딸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다는 악의 어린 소문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보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옛이야기를 조르는 딸의 잠자리 곁에 앉아서 왕의 이야기와 아라짓 전사의 이야기, 그리고 변경백의 이야기 등을 들려주는 자상한 아버지 과텔의 모습을 보다 현실성 높은 추측으로 받아들인다. 과텔이 만년에 이룩한 일은 절대로 광인의 소치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텔은 과감하고 현명한 정책들을 통해 황폐하기 짝이 없던 지러쿼터 산맥 서부에 몇 개 도시가 부럽지 않은 변경백령을 만들었다. 더 이상 그곳을 지러쿼터 산맥 서부라는, 마치 지리학 용어를 연상케 하는 이름으로 부르기 쑥스럽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곳을 규리하 지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과텔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규리하 변경백령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랐지만 그 소망은 그의 생전에는 달성되지 못했다.
규리하 지방은 날로 번창했다. 마침내 규리하 사람들은 과텔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졸랐다. 과텔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왕국의 방패인 변경백이며 왕위에 오르는 것은 반역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람들의 요청을 완강히 거절했다. 물론 왕국도, 왕도 존재하지도 않는데 반역을 논하는 과텔의 대답은 도무지 논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규리하 사람들은 과텔의 의도를 존중했고 마침내 과텔 규리하를 변경백이라고 불렀다.
과텔이 사망했을 때 한때 괴소문의 주인공이었던 그의 딸 케나린 규리하는 20세의 꽃다운 처녀로 자라나 있었다. 그러나 케나린 규리하는 그녀를 ‘금편 100만 닢의 지참금을 가진 신부’로 보는 사람들을 당혹케 만들었다. 아버지의 교육이 지나치게 훌륭했던 것인지, 그렇잖으면 자신과 아버지를 버린 어머니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케나린 규리하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자신이 변경백의 지위를 계승한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날아오는 구혼을 모두 뿌리친 다음 과텔 규리하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훌륭한 무인이었던 젊은 장수와 결혼해 버렸다. 머리가 좀 차가운 사람들은 케나린이 경망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금편 100만 닢의 가치가 있다고 판정된 규리하 지방을 다른 자에게 내주기 싫었기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변경백의 지위를 계승한 그녀가 보여 준 일련의 행동은 머리보다는 심장으로 생각하는 자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케나린 규리하는 행정 체제와 군사 체제를 일원화시킨 체제로 규리하 지방을 정비했고 그 결과로 상시 동원 가능한 1만 명의 군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토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케나린의 의도를 떠보기 위한 사절들이 지러쿼터 산맥을 무수히 넘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무수한 사절들이 지러쿼터 산맥의 험악한 기후에 희생당했다.) 그러나 케나린의 대답은 더할 수 없이 단순했다. ‘변경백은 변경백령을 지킴으로써 왕국의 방패가 될 뿐이다. 변경백은 왕국의 심장을 겨누는 단검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불침 선언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케나린의 대답을 ‘왕국이 아닌 토호들의 땅은 언제든 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나린은 절대로 지러쿼터 산맥 동쪽을 넘보지 않았다. 마침내 사람들은 이 고집 센 부녀의 뜻을 존중하여 그 땅을 규리하 변경백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쩌면 그런 칭호의 내면에는 변경백으로서 지러쿼터 산맥을 넘지 말라는 무언의 요청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케나린 규리하는 그런 내면의 요구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녀의 땅을 변경백령으로 불러 준 사실에는 기뻐했다.
어쩌면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리하는 조금 변형된 형태의 제왕병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부녀는 훌륭한 지배자들이었다. 지금까지도 규리하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지배자를 변경백이라 부르고 ‘상무 정신’을 강조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웃을 수 없는 이유도 그에 기인한다. 물론 이 전설적인 부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라고 생각한 야심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규리하를 지배한 변경백들은 지러쿼터 산맥 동쪽으로부터의 도전을 언제나 무참하게 분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왕병자들에게 규리하 변경백령은 악몽의 땅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미치광이나 어릿광대 정도로 취급되는 제왕병자들은 규리하 변경백령에서만큼은 참살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무도한 반역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지금 케이건의 앞에 서 있는 노무사 하이드 규리하는 평생에 걸쳐 다섯 번이나 지러쿼터 산맥 동쪽으로부터의 도전을 격파하여 산맥 서쪽에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리하의 전설이 새파랗게 살아 있음을 증명해 보인 자였다. 그가 그토록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던 것은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인구가 늘어남으로써 서진의 동기가 유발된 때문이다. 하지만 괄하이드 규리하를 보며 케이건은 당분간은 지러쿼터 산맥 동쪽 사람들이 좀 참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괄하이드 변경백은 보석을 감정하는 듯한 눈으로, 하지만 자신이 감정하는 것이 보석인지 돌멩이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변경백이오. 변경백이 무엇인지 아시오?”
“왕의 재산을 갈취한 자들 중 가장 속 편한 자요.”
괄하이드는 이 도전적인 대답에 눈썹을 곤두세웠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주면 좋겠군.”
“왕이 돌아온다면 현재 왕의 재산을 타고 앉아 있는 자들은 불법 점유자들이 될 거요. 하지만 변경백의 경우엔 상관이 없지. 변경백의 동의가 없다면 왕도 변경백령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케이건은 그래서 다른 자들보다 속 편하게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한 셈이었다. 물론 왕의 귀환을 기다리며 왕의 국경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괄하이드 변경백에게는 기분 나쁜 해석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기 유쾌한 언사는 아니군. 케이건 드라카.”
“기분을 맞춰 달라는 요청은 들은 적이 없소.”
“그렇다면 요청하겠소.”
“거절하겠소.”
괄하이드 변경백은 ‘요놈 봐라?’ 하는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기색은 없었고, 그래서 케이건은 실망했다. 그는 괄하이드 변경백이 광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노무사는 바위 같은 인물이었다. 케이건은 사람들이 괄하이드 변경백에 대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유감스럽지만 할 수 없지. 어쨌든 당신은 내가 왕의 귀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음을 이해할 거라 생각하오.”
“이해하오.”
“나는 얼마 전, 대사원의 존경하는 사제들이 매우 심상치 않은 일을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전달받았소. 내게 그것을 알려 준 것은 이 사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사촌동생이오.”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괄하이드의 사촌동생이면 나이가 꽤 많을 것이다.
“만학도이신가 보군.”
“그는 만년을 이곳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대사원에 들어왔소. 그래서 나는 대사원에 약간의 전답을 기증했소.”
기나긴 세월 동안 그런 보시를 받아왔으니 대사원의 땅을 모두 합치면 광대하다는 말도 모자랄 지경일 것이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괄하이드 변경백은 계속 말했다.
“나는 몇몇 수하들과 함께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어제 간신히 이곳에 도달했소. 도착해 보니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군. 세상의 토호나 효웅, 군웅들은 모조리 다 몰려든 것 같소. 옛적의 만민 회의장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나 싶을 지경이오. 늦게 도착한 덕분에 아직 아는 것이 적지만, 나는 당신이 그 일에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전해 듣게 되었소.”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당신과 승려들이 행하는 일은 왕의 귀환과 관련이 있는 일이오?”
“왕의 귀환?”
“더 쉽게 풀어 말하길 원하는 거요? 이렇게 묻겠소. 당신과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들은 현재, 혹은 가까운 장래에 왕을 찾아내거나, 혹은 키탈저 사냥꾼들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거나, 혹은 영웅왕의 검을 찾아낼 생각이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왕을 만들어 낼 생각이오? 당신이 괜찮다면 나는 당신이 왕이 될 자인지도 확인하고 싶군.”
“만일 내 대답이 그 질문들 중 하나에 대한 긍정이라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나는 왕의 귀환을 바라오. 당신들이 합당하며 의심할 수 없는 왕을 나에게 보여준다면, 나는 그 왕에게 그의 방패를 보여 주겠소.”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자들 중 일부는 우리가 왕을 만들 생각이면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재목이라고 믿는 것 같던데. 만약 내가 여기 있는 자들 중 한 명에게 하인샤 대사원의 추대라는 망토를 입혀 왕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에게 내놓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케이건의 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자들에게도 들렸고, 그 자들은 귀가 번쩍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숨죽인 채 변경백의 대답을 기다렸다. 변경백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가 아라짓 왕국의 정통성을 이을 수 있는 자라면 규리하는 그를 지지할 거요.”
일부 극히 일부였다. 못난 인사들은 속으로 환호를 올렸다. 그 못난 인사들은 규리하의 막강한 힘이 자신을 지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대다수 쟁쟁한 자들은 변경백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기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건 또한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의 말이 맞군.”
“무슨 뜻이오?”
“사람들은 괄하이드 규리하가 산에게 부동심(不動心)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군.”
변경백은 피식 웃었다.
“부풀려 말하길 좋아하는 자들의 허언일 뿐이오.”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당신이 평가하기에 아라짓의 정통성과 상관이 없는 자라면, 그 자가 아무리 하인샤 대사원의 위광을 등에 업은 자라도 무시하겠다는 말이로군. 그리고 필요하다면 하인샤 대사원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일이라도 감수할 테고.”
“정확하오.”
조금 전 속으로 환호했던 못난 인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괄하이드 변경백은 이제 사나운 무인의 자세를 뚜렷이 드러내며 말했다.
“잘 아시겠소? 당신들이 혹 왕을 찾아낸다면 규리하와 나는 진심으로 감사할 거요. 하지만 당신과 승려들이 어처구니없는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면 규리하와 나는 절대로 그것을 좌시하지 않을 거요! 자, 이제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말해 주시오.”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돌렸다.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시간 후면 의식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케이건은 광분까지는 아니더라도 괄하이드 변경백이 상당한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은 벌써 열리고 있었다.
“나를 시험하시오.”
“뭐라 했소?”
“당신은 조금 전 내 칼의 실용성이 의심된다고 했소. 과연 그런지 시험해 보라는 거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오?”
“내가 왕이 될 만한 자인지 알아볼 기회를 주는 거요.”
괄하이드 변경백의 눈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승려들은 당신을 왕으로 만들 생각이오? 그렇잖다면 당신은 승려들이 찾아낸 왕이오?”
“당신은 이미 하인샤 대사원의 판단은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소. 당신 자신의 팔과 그 대도로 시험해 보시오. 나 또한 당신을 시험해 봐야겠거든.”
“나를 시험한다고?”
“당신에게 규리하를 맡겨 둬도 될지, 그렇잖다면 당신과 당신 가문의 모든 사람을 추방하고 규리하를 내 영토로 삼아야 할지 결정해야겠소.”
괄하이드의 팔이 경련했다. 케이건의 말은 지독하게 무례했다.
“당신이 ‘진짜’ 왕이라 하더라도 변경백령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당신이 ‘진짜’ 변경백이라면 그렇겠지.”
케이건의 말은 괄하이드의 가장 아픈 부분을 잔인하게 찌른 셈이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수염을 푸들푸들 떨며 케이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케이건은 끝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신은 진짜 변경백이 아니오. ‘내’ 변경백의 땅에 제멋대로 눌러앉은 정신 나간 제왕병 부녀의 후손일 뿐이지.”
“감히……. 감히 과텔과 케나린을 그렇게 부른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앞에서?”
“한 번 더 말해 줄 수도 있소.”
괄하이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거꾸로 쥐고 있던 대도가 섬뜩한 빛을 뿌리며 날아왔다.
“용서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