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10)
케이건이 깨 버린 것은 사실은 코네도의 코뼈였다. 한껏 흥분해 있었던 코네도 빌파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났다. 빗물을 타고 흘러내린 코피가 입 안으로 스며든 후에야 코네도는 코를 만져 보였고 기절할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그러나 코네도는 곧 신음을 그쳤다. 소리를 노출시키면 케이건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얼굴 앞쪽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코네도는 도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불은 잘 옮겨붙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케이건은 바라기를 밖에 놔둔 채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밧줄을 타고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방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나가 한 명뿐이었지만, 전해 오는 이야기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지 나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바라기를 집어 들고 도망치려 했다. 이미 떠났던 발케네의 대족장이 되돌아왔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테고 의심은 자연히 밀렵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일의 그 시점에서, 상황은 지극히 쾌조였다.
그 말도 안 되는 폭우만 아니었다면.
폭우는 불을 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암흑 속에 감춰 버렸다. 달빛도, 별빛도 없는 완전한 밤. 게다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코네도는 그것이 토카리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그 나가를 붙잡아!”
“왜?”
“제길, 바로 이게 나가가 얻었다는 힘이야! 그놈을 잡아! 기절시켜!”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한 사내가 비늘 달린 몸을 만지는 데 성공했다. 그는 칼자루로 륜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켰다. 하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코네도는 둘째 아들을 향해 폭언을 내뱉었다. 젖은 암흑 저편에서 토카리의 숨 막히는 변명이 들려왔다.
“아, 이런! 그 녀석이 너무 많은 구름을 끌어모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이 비는 녀석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녀석이 모아 둔 구름에서 떨어지는 겁니다. 어,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비인 셈입니다.”
코네도는 화를 가라앉히며 비의 양을 느껴 보려고 했고 조금 후 둘째 아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을 깨부술 것 같던 비는 이제 보통의 폭우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보통의 폭우조차 버거웠다.
“젠장. 그놈이 비를 내리게 했다면 그칠 수도 있겠지! 나가를 붙잡은 녀석이 누구야? 그 녀석을 깨워! 이걸 멈추라고 해!”
그러나 그 사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륜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기절시키기 전부터 륜은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륜은 흑사자 모피를 챙길 틈도 없이 밖으로 나왔고 그 상태에서 폭우를 뒤집어써서 이미 그 몸이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그런 영문을 알지 못하는 코네도는 도대체 어떻게 기절시켰기에 깨어나지 못하냐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사내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륜을 깨어나게 하려 애썼다.
그리고 케이건이 그들에게 들이닥쳤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잔영뿐임에도 불구하고 케이건은 계속해서 비명을 만들어 내었다. 결국 분노를 더 참지 못한 코네도가 악을 쓰다시피 외쳤다.
“케이건, 멈춰! 계속 우리를 공격하면 나가를 죽이겠다!”
암흑 속에서 폭우를 맞고 있으면서도 토카리는 부끄러움에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가는 죽일 수 없다. 토카리는 케이건의 비웃음이 들려올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비명도 더 이상 없었다. 토카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케이건은 무지는 죄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충 동의하는 쪽이었다. 비형이나 티나한, 그리고 륜은 무한한 참을성으로 동료의 무지를 견뎌 내었던 케이건에 대해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케이건은 코네도 빌파의 무지함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무지가 이끌어 낸 상황은 증오하고 있었다.
코네도 빌파가 조금이라도 나가에 대해 알고 있다면 나가를 죽이겠다는 식의 협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협박을 했다. 그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륜이 실제로 쉽게 죽일 수 있는 나가라는 점이었다.
케이건은 결국 주먹을 거두었다. 그리고 목소리에 의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암흑 속에서 발케네 남자들은 긴장했다. 그러나 조금 후 그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조금 전과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고 물었다.”
코네도는 부서진 코뼈를 움켜쥔 채 불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뭣하려고?”
또다시 벼락이 쳤다. 케이건은 잔영을 염두에 둔 채 걷는 방향을 조금 바꾸며 말했다.
“여기서 도망칠 수는 없다. 아무것도 볼 수 없잖은가.”
코네도는 케이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밧줄이 어디에 있을지 고민했다. 코네도는 한쪽 방향을 결정한 다음 번개가 치기를 기다렸다.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포기해라. 지금 포기한다면 살려 주겠다.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다.”
번개가 쳤다. 그리고 코네도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 케이건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네도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케이건 또한 예상치 못한 조우에 약간 당황하여 뒤로 물러났다.
“코가 꽤 볼썽사납군. 하지만 용과 대호가 너희들을 뒤쫓게 되면 코가 으스러진 것쯤은 신경 쓸 거리도 되지 못할걸.”
코네도는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누며 다른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용과 대호가 뒤를 쫓는다고? 마치 저 괴수들이 네 것인 양 말하는군. 허튼수작이야! 나는 다 봤어. 그 대호는 여자 나가의 편이야! 너는 대호와 싸웠어!”
“그걸 봤다면 유학생이군. 역시 밀렵꾼이 아니군.”
케이건의 담담한 대답에 고함을 내질렀던 사내, 즉 토카리 빌파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케이건은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오후에 어떤 방문자들이 대사원을 떠나는 것 같더군. 의심을 피하기 위해 떠났다가 되돌아온 것이겠지. 승려들에게 물어보면 그게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알 수 있겠군.”
코네도는 둘째 아들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지인들의 말대로 ‘아들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다들 지경이었다. 똑똑한 도둑이라면 상대방이 무슨 소리를 하건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적 허영을 알게 된 그의 둘째 아들은 상대방의 말에서 찾아낸 빈틈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결국 코네도는 케이건을 죽여야겠다고 결정했다.
케이건은 빗방울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번개도 더 이상 치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여러 명의 적 사이를 걸어 다니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하려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케이건은 누군가에게 부딪힐 것을 각오하며 계속 걸었다.
“대사원에 불을 지른 너희들의 행위는 용서되지 않을 거다. 포기해라. 지금 포기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변호하겠다.”
암흑 속에서 갑자기 불꽃이 튕겼다.
케이건은 손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코네도는 케이건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손에 든 점화통을 집어 던지고는 달려들었다. 케이건은 있는 힘껏 몸을 옆으로 던졌지만 코네도의 장검은 이미 내려 떨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 밤 케이건은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그의 동작은 느렸다.
케이건은 옆구리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케이건은 물 위에 쓰러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황급히 다가온 발이 그의 몸에 닿았다. 케이건을 발견한 그 발은 곧 케이건의 복부를 밟았다. 케이건은 이를 악물며 두 번째 공격에 대비했다.
검이 복부를 꿰뚫었다.
케이건의 눈앞으로 과거가 번갯불처럼 스쳐 지나갔다.
케이건은 마침내 완성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동일 시간 내에 두 가지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세 가지, 네 가지, 그 이상의 의미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과거를 모두 받아들였다. 단지 과거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완전한 수용이었다. 케이건은 그때까지 거부했던 그 모든 과거를 향해 사과했다. 코네도의 검이 비틀리며 뽑혀 나갔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케이건은 생각했다. 괜찮은 마무리군.
코네도는 케이건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단번에 절명한 것일까? 그러나 그는 주도면밀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허리를 굽혀 케이건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코네도는 케이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암흑 속에서 코네도는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자제력이군. 케이건. 비명을 참다니. 죽은 척하면 내가 떠날 거라고 믿었나 보지?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케이건은 웃고 싶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지 않은 까닭은 자신이 마침내 모든 과거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코네도는 장검을 꽂아 넣고는 멱을 따기 위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왼손으로 케이건의 얼굴을 확인한 코네도는 차갑게 웃었다.
“자네 검은 잘 쓰겠네. 케이건.”
코네도는 단검을 케이건의 목으로 가져갔다.
검이 살을 꿰뚫는 잔인한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악!”
코네도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져 본 코네도는 그것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음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그때 암흑 속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무장인 상대를 공격하고 쓰러진 상대의 목을 따는 데나 사용되는 그런 팔은 없어져도 그렇게 섭섭하지 않겠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코네도는 고통을 잊었다. 그 지독히 아름다운 목소리는 거의 마성(魔聲)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였다. 물론 짧은 시간일 뿐, 코네도는 다시 지독한 고통을 느끼며 황급히 일어났다. 코네도는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그런 태도에 약간 감명을 받은 듯했다.
“용감한 태도지만, 관두는 것이 좋겠어.”
무엇인가가 그의 장검을 후려쳤다. 고통 때문에 검을 제대로 쥐지 못했던 코네도는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코네도는 상대방이 어떻게 그 장검을 볼 수 있었는지에 더 놀랐다. 이 목소리는 도대체 누구지? 이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때 저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나가를 내려놔.”
륜을 붙잡고 있던 사내는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했다. 그는 황급히 단검을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은 곧 멈춰졌다.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목젖을 눌렀기 때문이다. 사내는 코네도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공포를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죽이고 싶진 않아. 내려놔.”
사내는 륜을 놓았다. 륜은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물보라가 일어났다.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 돌아가.”
누군가가 점화통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빗줄기 속인지라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는 짧은 순간 동안 불빛으로 마당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발케네 사내들은 흑사자 모피를 몸에 두른 여자 나가의 모습을 목격했다.
케이건은 희미해지는 시선 속에서 그녀, 사모 페이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쓰러진 륜을 안아 일으키고 있었다. 코네도 빌파는 두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케이건은 그중 한 명이 바라기를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도통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고함을 내지르려던 케이건은 목소리 대신 피를 토하고 말았다. 륜을 부축하던 사모는 그런 케이건의 모습에 놀라며 달려왔다. 케이건은 손을 들어 발케네 사내들을 가리켰다. 생각으로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케이건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다. 사모는 걱정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케이건?”
가슴이 저미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케이건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