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12)
케이건은 악몽을 보았다. 행복했다. 악몽 속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살아날지, 죽을지.”
내가 도와주지. 나는 죽었어.
악몽은 주로 추억을 이용하지만 시간 순서대로 내어 놓지는 않는다. 케이건은 마음이 상하고, 그래서 감정을 뒤섞어 내보인다. 엉뚱한 감정들과 부딪힌 추억들이 퐁퐁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진다.
“너는 용의 자손이다. 언제나 그걸 잊지 마라.”
아젤키버.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잊지 않았지만, 용이 나를 잊어 버렸습니다.
잊기 싫은 추억들이 가장 희미하고 잊고 싶은 추억들은 지독하게 뚜렷하다. 케이건은 그것들을 바라보길 거부하고, 그래서 추억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간다.
“열은 내렸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내부에 화농이 괴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오레놀. 너는 돌팔이로군. 내 속엔 진득한 화농이 괴어 있는데.
친했던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해도 주위의 사람들이 그 친구를 역사 속에 나오는 인물로서, 즉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감정이나 대화가 통할 수 없는 무정물처럼 취급하는 모습을 보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진다. 억지로 이야기를 나눠 봐도,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을 어제 만난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케이건에게 사람들은 당혹한다. 케이건과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케이건은 이야기를 관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자, 덤벼 봐! 정말 도깨비를 상대로 판막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바우 성주. 호미걸이를 써야겠소. 앞으로 이십여 년쯤 후에 비형 스라블이라는 도깨비가 그건 호미걸이였다고 주장할 테니까. 어쩔 도리가 없소.
전설처럼 이야기하는 법. 자신의 살아 있는 추억을 터무니없는 옛이야기로 만드는 법. 장식을 몇 개 달고, 왜곡을 덧붙이고, 뚜렷한 기억일수록 모호하게 표현한다. 고어체를 이용할 때는 주의 깊게. 그 고어체는 ‘옛날에 쓰였던 말’이 아니라 ‘옛날 이야기를 할 때 쓰이는 말’을 의미한다. 케이건은 점점 자신이 무정물로 바뀌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의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지게 된 경험의 총합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것을 왜곡한다.
“케이건 드라카. 당신은 정말 북부의 왕이오?”
괄하이드 변경백. 왕이 북부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소? 그 믿음을 잘 생각해 보시오.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홀로 남겨진다. 그 시간을 표현할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껏 케이건 이외에 그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라는 무게추를 잘라 버리는 수밖에. 현재로 부상한다. 케이건은 자신의 모습에 전율한다.
“사실 맛은 별로 기억나지 않아요. 뭔가 기막힌 복수의 맛 같은 것이 날 줄 알았는데, 집에서 늘상 먹던 것이랑 다름없었어요. 시시했지요.”
별비가 섭섭해하겠는데, 내 여름.
한 가지 모습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를 구성하는 무수한 거미줄 모두와 일일이 가공의 연결점을 만들기는 너무 어렵다. 그들은 과거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케이건도 과거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제발 살아나십시오. 케이건. 지금처럼 왕이 필요할 때 당신이 죽어선 안 됩니다.”
그래. 북부에 눈물을 흘릴 일이 많겠구나. 쥬타기. 누군가가 그 눈물을 마셔야겠군.
“좋은 꿈 꾸셨습니까?”
“그다지 좋지는 못했소.”
케이건은 눈을 떴다.
주위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케이건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어딘가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 있었다. 케이건은 그들이 정말 현재의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여러 시간대에 있었던 여러 인물의 모습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면면을 조심스럽게 관찰한 케이건은 그들이 모두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시간대는 ‘현재’였다. 아직 그들이 누군지를 알 수 없다뿐, 현재임은 분명했다. 케이건은 그들이 누구인지 천천히 떠오를 거라 생각했다.
“깨어났군! 정말 다행이네!”
쥬타기 대선사가 달려들 듯이 다가와 말했다. 케이건은 누운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며칠 만에 깨어난 겁니까?”
“엿새만이야. 대사원에 온 이후로, 아니, 그 이전 몇 달 동안 자네는 너무 많은 일들을 했어. 상처도 상처지만 피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거야.”
모두들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말했다.
“그래서 배가 고픈 것이군요.”
“곧 드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케이건은 발 쪽에서 들려오는 오레놀의 목소리와 방문을 열어젖히며 후다닥 달려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케이건은 질문했다.
“여기 도깨비가 있습니까? 좋은 꿈 꿨냐고 묻던데.”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도 맞출 수 있습니까?”
“비형.”
케이건의 얼굴 옆으로 비형의 얼굴이 다가왔다. 비형은 큼직한 웃음을 얼굴에 건 채 따스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우 성주님의 전언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길동무도 한 명 데려왔고요. 그 분의 이름도 맞출 수 있겠습니까?”
“티나한도 돌아왔소?”
반대쪽에서 티나한의 큼직한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티나한은 큼직한 눈 주위의 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외치다시피 말했다.
“너무 늦게 살아났잖아!”
“미안하오.”
티나한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케이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케이건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사모 페이와 륜 페이 중 하나가 죽었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데.”
방 한쪽에서 아름다운 이중창이 들려왔다.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
비형 쪽에서 나가의 얼굴 두 개가 나타났다. 비형은 웃으며 옆으로 비켜 주었고 륜과 사모는 걱정 반, 기쁨 반의 얼굴로 케이건을 내려다보았다. 사모가 먼저 말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묻고 싶은데.”
“되살아난 당신이 쇼자인테쉬크톨을 주장했을지도 모르니까.”
“이제 그건 주장하지 않아.”
“왜 그런지 설명해 주겠나?”
사모는 턱을 가슴에 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케이건. 네가 지금 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의심스러운데.”
“괜찮아.”
사모는 륜을 돌아보았다. 륜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사모는 빠르게 이야기했다.
“최대한 간단히 이야기하지. 륜은 여신의 힘을 이용해서 나를 깨우려고 했어. 륜은 그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성공했어. 나는 거의 되살아나기 직전이었어. 하지만 목이 잘리길 원했기에 살아나기 직전의 상태에서 버티고 있었지. 그러면서 륜이 사용하는 힘이 무엇일지 고민해 보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죽어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더군.”
“그건 언제였지?”
“륜이 나쁜 놈들에게 붙잡혀 있고 너는 칼꽂이가 되려는 순간이었어.”
“음.”
“나는 휩쓸려 나온 흑사자 모피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입었어. 뜨거우니까 쉽게 찾을 수 있지. 쉬크톨은 바로 근처에 있더군. 그러고 나서 나쁜 놈들을 쫓아 버렸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륜이 어떻게 해서 그 힘을 얻게 되었는지 들었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텐그라쥬는 현재로선 힘들여 돌아갈 필요가 없는 도시지. 당분간은. 그래서 나는 쇼자인테쉬크톨을 주장하지 않아.”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내 바라기를 되찾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 도움을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야. 하지만 지금 그 칼이 몹시 필요하군.”
사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반대쪽에 있던 티나한은 화난 기색으로 말했다.
“케이건! 난 네가 그렇게 시야가 좁은 사람일 줄 몰랐어!”
“티나한.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 칼이 절실히 필요하기에…….”
“아니, 넌 정말 시야가 좁아. 어떻게 머리 위에 있는 걸 찾아 헤매는 거야?”
케이건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비형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맡에서 무엇인가를 들어 올렸다. 케이건은 도깨비의 손에 들린 바라기를 발견했다.
“어떻게?”
티나한은 킬킬거렸다.
“그 때려 죽일 도둑놈들은 말이야, 손해가 막심하지만 그래도 귀한 검을 얻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도망치고 있었지. 앞쪽에 뭐가 있는지 잘 살피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케이건은 그제야 사태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7미터짜리 철제 회초리로 곤란한 도벽을 훈도할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는 레콘 같은 것?”
“정확해! 내가 바라기를 몰라볼 리는 없지. 그놈들을 자근자근 밟아 준 다음 대사원으로 끌고 왔어. 지금 그놈들은 곳간에 갇혀 있지. 정말 훌륭한 도둑이라면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에서 막아서는 사람도 잘 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그렇다면 이제 됐소.”
케이건의 단정 짓는 듯한 말투에 사람들은 약간 긴장했다. 케이건은 쥬타기 대선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대선사님.”
“응? 그래. 말하게.”
“하루 더 졸도해 있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대사원에 체류 중인 모든 사람을 모아 주십시오. 법당 앞마당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대선사는 움찔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케이건은 자신의 선언대로 ‘졸도’ 해 있었다. 대선사는 깨워 볼까 하는 유혹을 느꼈지만 결국 포기했다. 케이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휴식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옆에서 벼슬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채 노려보고 있는 레콘의 모습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