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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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7)


머나먼 남부에서 하늘은 날씨에 대한 권리를 강탈당하고 있었지만 북쪽에서는 그 권리가 그대로 존중되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이었고 보수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하늘은 폭염이 적절한 의상이라고 생각했다. 잔학한 저주처럼 쏟아지는 햇살은 고가람의 지붕과 처마, 기둥을 불살랐고 댓돌과 축대를 달구었다. 열기가 춤추는 마당은 물결치는 유체처럼 보였다. 무학당에서는 마루나래가 진저리를 치며 마루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두억시니들은 절규하며 그늘로 찾아들었다. 문제는,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그늘이 케이건이 앉아 있는 돗자리 주위였다는 사실이다. 두억시니들은 주저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케이건은 완벽한 무시로 그들을 환대했다. 두억시니들은 안도하며 케이건 주위의 땅에 주저앉았다. 그중 한 놈이 세상을 부정하는 듯한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마당을 파헤치고 시원한 땅에 배를 가져다 댄 채 드러누웠다. 잠시 후 그것은 두억시니들의 최신 유행이 되고 말았다. 두억시니들은 모두 땅을 파헤치고 그곳에 몸 일부를 가져다대었다. 그들의 몸에 달린 무시무시한 부속지(附屬肢)들은 그런 노동에 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도움은 되었다. 주위에서 살벌한 발톱과 뿔 등이 휘둘러지며 땅이 파헤쳐지는 것에 대해 케이건이 보인 유일한 반응은 하품이었다.

두억시니들이 잠잠해지자 케이건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억시니들이 졸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마당 저편으로 걸어간 케이건은 그곳에 있는 샘터에서 물을 길었다. 방풍복을 꺼내어 물에 적신 케이건은 그것을 들고 돌아왔다. 다시 돗자리에 앉은 케이건은 물을 흠뻑 머금은 방풍복을 머리 위에서부터 덮어썼다. 뭔가 분한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두억시니들은 잠시 후 꽥꽥거리며 샘터로 쇄도했다. 그들은 손이나 입 등에 물을 머금은 채 돌아왔고, 파헤친 땅에 물을 뿌렸다. 그리고 그곳에 다시 몸을 가져다대었다. 모두 행복해졌다. 마루 위에서 혀를 빼 문 채 쓰러져 있던 마루나래는 그 모습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루 아래로 내려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기에 불타는 마당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본 다음 마루 위에서 몸을 뒤채며 헐떡거리는 짓을 계속했다.

세계의 보다 쌀쌀한 곳에서 온 방문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계곡으로 돌격했고 물속에 몸을 누인 채 인간은 원래 수중 생물이지 않을까 하는 기원에 얽힌 고민에 잠겨들었다. 좀 더운 지방에서 온 방문자들도 그다지 쾌적한 표정을 짓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비록 더위에는 단련되어 있었지만 야자이나 바나나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은 감당키 어려웠기 때문이다. 착한 승려들은 그들을 위해 비장의 위문품들을 내놓았고 그것은 대단한 호평을 불러일으켰다. 방문자들은 수박과 참외를 씹으며 고향에 대한 애처로운 향수를 달랬다. 매미들은 실성한 듯이 광포하게 울어 젖혔고 바람은 일사병에 걸려 비틀대고 있었다. 대사원의 여름 오후였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녹아 흘러내리는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

옷가지는 물론이거니와 얼굴을 감싸 매고 있는 천 또한 피에 물들어 있었다. 얼굴에 커다란 부상을 입은 듯했다. 피투성이 사내는 비틀거리며 대사원에 들어섰다. 폭염에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은 잠시 그것이 더위가 만들어 낸 환각인지 실제의 현상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승려들과 방문자들은 놀라서 사내에게 달려갔다. 사내는 자신이 발케네에서 왔다고 말했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코네도 빌파가 발케네 사람들을 거느린 채 달려왔다. 피투성이 사내는 코네도의 손을 움켜쥔 채 헐떡이며 말했다.

“대족장님. 파카시 족장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이라고!”

“그렇습니다. 대족장님이 떠나자마자 파카시 족장이 뿔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나섰습니다.”

지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케네의 도둑들은 어쨌든 공평무쌍한 도둑들이다. 그들은 서로 간에도 훔치는 것이다. 코네도 빌파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 권속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살해당하거나 도망쳤습니다. 저도 가까스로 도망쳐 왔습니다. 파카시 족장은 대족장님이 뿔관을 훔쳐 대사원으로 도망친 도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코네도 대족장은 폭언을 내 쏟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승려 한 명에게 외쳤다.

“나는 돌아가야겠소!”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분은 저희들이 보살피겠…….”

“아니오! 데려가겠소.”

“예? 하지만 이런 상태이신데요?”

“이놈에게 들어야 할 정보가 있소. 이곳까지 왔다면 돌아갈 수도 있어! 일어나라!”

피투성이 사내는 놀랍게도 벌떡 일어났다. 대사원의 방문자들은 발케네 사내들의 용맹함에 감탄했다. 코네도는 그 사내를 끌어안아 준 다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코네도 빌파는 대사원에서 유학 중이던 둘째 아들에게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고 토카리 빌파는 배신자들을 저주하며 짐을 챙겼다. 발케네에서 온 방문자들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대사원을 떠났다.

발케네 사람들이 질풍처럼 대사원을 떠난 사건은 폭서 속에 정체되어 있던 대사원에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군웅들은 자신들이 고향을 비워 둔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고 자위했다. 미약한 정보에 입각하여 이곳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그들은 대부분 빈틈없는 사람들이었고, 믿을 만한 자들을 남겨 두고 오는 대비까지 철저하게 해 두었다. 지배자들은 오직 저 발케네의 도둑들만이 이토록 빨리 뻔뻔함을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짙은 향수를 느꼈다. 그리움보다는 걱정에 가까운.

오후가 불안의 찌꺼기와 숨 막히는 열기만 남겨 놓고 사그라들 무렵, 쥬타기 대선사는 종규 해석소에서 퇴장했다.

철야로 이루어진 종규 해석 때문에 대선사는 초췌해진 모습으로 걸어 나와 오레놀 대덕을 슬프게 만들었다. 오레놀 대덕은 서둘러 음식과 이부자리를 준비했다. 대선사는 오레놀이 억지로 떠먹이다시피 하는 음식을 조금씩 삼키며 말했다.

“종규 해석소는 내게 구두 견책을 내렸다.”

“그러리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호규 원장이 요구한 것이 멸적이었다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겠지.”

그릇에 물을 따르던 오레놀은 그만 손에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오레놀은 그걸 닦으면서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대선사는 심로에 지친 얼굴을 힘들게 펴며 말했다.

“네가 레콘이 아니라 다행이구나.”

“멸적이라니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종단의 우두머리를 파문하겠다는 겁니까?”

“아마도 라샤린이 꾸민 일일 거다. 그는 확실히 투사지.”

“그, 그렇다면 라샤린 선사가 대선사님의 지위를 노리고………….”

“오오, 박복한 내 신세 같으니. 이놈아! 이야깃꾼이나 들먹일 황당무계한 소리는 치우거라. 선사 또한 종규 해석의 결과가 구두 견책으로 끝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멸적이라는 말로 겁을 주고 싶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스님들이었다.”

“다른 스님들이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이겠지. 지금 이 순간이 자칫 잘못하면 종단 전체의 파멸로 치닫게 될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임을 알리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나는 라샤린의 그런 판단에 동의한다. 우리는 지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오레놀도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낭떠러지를 슬기롭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가 결정되기는 했다. 일단, 사모 페이가 깨어나야 한다.”

“사모 페이요?”

“그래. 그녀는 정신 억압자이니 뱀들을 억압할 수 있을 거다. 우리는 일단 저쪽과 이야기를 해 봐야 해. 그러려면 그녀가 필요하지. 그녀는 좀 어떠냐?”

“케이건 님에게 들은 바로는 륜 페이가 여신의 힘을 사용하여 그녀를 깨우려 애쓰고 있다 합니다.”

이번에는 쥬타기 대선사가 놀랄 차례였다.

“그가 ‘정말로’ 여신의 힘을 쓰고 있느냐?”

“예. 이것으로 우리는 케이건 님의 추리에 대한 증거를 얻은 셈입니다. 신명을 가진 수호자들은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륜은 자신이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신합니다만 그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사 상태인 사모와 몇 번 접촉하기는 한 모양입니다만 의사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제게도 조언을 구했습니다만, 저 또한 신이 아니잖습니까? 신의 힘을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조언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대선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신이 아닌 누구도 조언해 줄 수 없겠구나.”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륜이 신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면 저 남쪽의 수호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않다. 수호자들은 여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륜은 중도 포기한 수련자라고 하지 않더냐? 그는 여신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지를 뒤흔드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의지를 흔드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다. 륜은 지금 대단히 어려운 일에 여신의 힘을 쓰려고 하고 있으니 시행 착오가 많을 거다.”

오레놀은 이해했다. 대선사는 식욕이 가신 듯 음식을 물리며 말했다.

“그녀가 동생의 간청을 받아들여 깨어나면 좋겠구나. 어쨌든 우리가 결정한 다른 몇 가지 문제도 있다.”

“무엇입니까?”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 다른 신체로 전령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지.”

오레놀은 그 말을 생각해 보다가 그만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 그 말씀은 그러니까………… 누군가가 하텐그라쥬로 가서 억류된 신체를 구출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꼭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오레놀. 다른 신체로 전령하실 수 있는 방도를 찾는다고 했지.”

“하지만 그런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쥬타기 대선사는 침울하게 동의했다.

“현재로선 나 역시 그 외에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해야겠구나. 하지만 머리를 짜내어 생각해 봐야지.”

오레놀은 회의적인 생각이 자신을 잠식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때 대선사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은 이것이다. 우리는 왕을 되찾아야 한다.”

“왕을…….”

“그렇다. 만약 나가들이 대확장 전쟁을 재개한다면 우리는 그에 앞서 북부의 왕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왕의 이름 아래 북부의 대통합을 이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가들의 공세에 저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오레놀은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으시잖습니까.”

대선사는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그분도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실 수는 없으실 거다.”

“대선사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 상황은 지독히도 무서운 것이지만, 우리보다 턱없이 긴 시간을 사용하시는 그분께는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대선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까, 예닐곱 살짜리 꼬마애가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야!’라고 외치는 꼴과 비슷할 거라는 거냐?”

“비유적으로, 그렇습니다. 어쨌든 그분께 이토록 위험한 상황이니 왕이 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던 사람은 결코 우리가 처음이 아닐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요청해야지. 우리보다 앞서 요청했던 그 많은 사람들처럼.”

대선사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레놀은 대선사가 일단 자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것은 옳은 명령이었다. 종규 해석의 팽팽한 긴장감과 닥쳐올 앞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철야했던 대선사는 그대로 잠들어 버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결국 대선사는 오레놀이 펴 준 이부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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