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9장 – 북부의 왕 (8)
티나한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잠자리는 바람이 매섭게 불어닥치는 산등성이였지만 거창한 깃털로 덮여 있는 티나한은 이불에 싸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티나한이 숙면에 들지 못하는 것은 잠자리가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정신없이 잠들 만큼 낮에 많이 걷지 않았다. 레콘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날 낮 동안 티나한이 이동한 거리는 어기적거렸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였다. 완전히 소모되지 않은 힘은 그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며 그의 안면을 방해하고 있었다. 티나한은 부리를 부딪친 다음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은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이따금 구름이 갈라질 때마다 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키보렌의 밀림에서 보던 기묘할 정도로 커다란 열대의 달을 떠올리며 티나한은 부리 사이로 새는 웃음소리를 냈다. 추적당하면 소란을 일으키며 느리게 움직이라고? 발자국은 얼마든지 남겨도 좋지만 발의 체온은 남기면 안 된다고? 티나한은 그 경험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상식의 역전 속에서 보낸 몇 달이었다.
다시 그런 경험들을 할 수 있을까?
티나한은 스스로에게 던진 그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보내었다.
티나한은 피라미드 속에서의 끔찍했던 몇 시간을 떠올렸다. 몸에 붙은 도깨비불에 의지한 채 길도 알 수 없는 미로를 헤매며 혐오스러운 두억시니들의 맹공을 버텨내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티나한은 무적왕을 떠올렸고 불에 타 죽은 선지자를 떠올렸고 지그림 자보로를 떠올렸다. 유쾌하면서도 살벌한 추억들이었다. 티나한은 그때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 하나하나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티나한은 그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케이건의 말도 떠올랐다.
‘잔치가 끝났으면 집으로 돌아가야지.’
아직 티나한에겐 집이 없다. 바이소 계곡의 오두막은 발굴 본부일 뿐 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집은 하늘치의 등에 건설될 것이다. 티나한은 아직 건설되지 않은 자신의 집과 아직 얻지 못한 자신의 신부들을 생각했다. 그것이 미래의 일이라는 사실은 티나한을 주눅 들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티나한으로 하여금 케이건의 미래 또한 생각하게 했다. 홀로 키보렌으로 떠난 케이건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를 예견해 보는 것은 티나한을 괴롭혔다. 티나한은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주의를 바깥으로 돌렸다.
티나한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평선 쪽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티나한은 누운 채 그것에 주의를 집중했다. 지평선에서부터 날아오는 그것은 그의 앞쪽 하늘을 지나쳐갈 것 같았다. 몇 분 정도 더 관찰한 티나한은 자신의 예측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티나한은 인간이나 도깨비들의 부러움을 받는 시력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캄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가고 있는 그 물체에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달빛뿐이었다. 티나한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늘치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티나한은 태평하게 누운 채 그것을 바라보며 다시 케이건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혼자 갈 생각일까.’
티나한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티나한은 승려들이 케이건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승려들은 여신의 힘을 손에 넣은 나가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티나한은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티나한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하늘을 날아오던 것은 충분히 커져 있었다. 티나한은 그것이 딱정벌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사원의 연락에 대해 즈믄누리가 보내는 답장인 건가? 티나한은 그 딱정벌레가 날아가는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하인샤 대사원의 방향이었다. 티나한은 자신의 추리가 옳았음을 깨닫고는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티나한은 눈을 번쩍 떴다.
딱정벌레는 누군가를 태우고 있었다. 때마침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딱정벌레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것은 도깨비였다. 당연한 일이다. 딱정벌레에 타고 있는 자는 도깨비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그러나 티나한은 그 이상의 사실을 발견했고, 그것에 놀랐다.
그것은 나늬와 비형이었다.
티나한은 벌떡 일어났다. 눈을 비빈 티나한은 다시 딱정벌레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티나한은 반가움에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어두운 산등성이였고 게다가 하필이면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티나한은 고함을 지를까 생각해 보았지만 곧 비형이 딱정벌레의 날갯짓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계명성이라면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티나한은 갑자기 비형을 불러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형은 아마도 바우 머리돌 성주의 답변을 가지고 대사원으로 가는 것이리라. 그것은 대단히 화급한 일일지도 모른다. 티나한이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비형과 나늬는 이미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빠른 속도를 본 티나한은 바우 성주의 답변이 정말 급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비형과 나늬가 산 저편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한 티나한은 아쉬움을 느끼며 도로 누웠다.
나무에 기대어 놓은 철창에 바람이 부딪혀 흐느꼈다.
5분 후, 티나한은 갑자기 튕기듯 일어났다.
“에라이, 썅!”
티나한은 배낭과 철창을 한 동작에 집어 들었다. 다음 순간 낭은 그의 등에 걸려 있었고 철창은 어깨 위에 걸렸다. 티나한은 껑충 뛰어올랐고 땅에 닿자마자 그가 지금껏 떠나오던 방향을 향해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다. 티나한이 바위 하나를 짓밟은 순간 그 바위는 수만 년 동안 지켜 왔던 자신의 중심을 잃고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티나한은 반대 방향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산봉우리들이 발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에 황홀해하며 티나한은 부리가 떨어져 나가도록 외쳤다.
“요술쟁이가 돌아왔다! 잔치 아직 안 끝났어!”
파름 산의 북사면에서 기묘한 모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의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온 듯한 그들은 허리를 낮춘 채 어둠 속을 빠르게 걸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모기들이 탐욕스럽게 피를 빨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관찰자가 본다면 별 주저 없이 그들이 나가일 거라 주장했겠지만 그들은 인간이었다.
대단한 극기심을 발휘하며 산을 오른 인간 무리는 잠시 후 파름 산의 정상 조금 못 미치는 곳에서 남사면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들은 잠시 그곳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인샤 대사원의 정경이 발아래에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었다. 몇 군데에서 비치는 불빛을 제외하면 대사원의 모습은 달빛에 포근하게 안겨 있듯 고요해 보였다. 깊은 밤이었고 대부분의 승려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대사원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잠시 후 한군데로 모여들었다. 소리를 낮춘 속삭임이 빠르게 오갔고 곧 그들은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북사면에서보다 더욱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약간 열성이 지나친 일부 모기들은 그곳까지 그들을 따라와 흡혈의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다른 곤충들은 울음소리를 멈춘 채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절벽을 돌고 바위를 넘어 그들은 곧 아래로 통하는 소로를 발견했다. 그곳부터는 하인샤 대사원의 경내에 속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무기에는 재가 묻어 있어 빛을 반사시키지 않았다. 경내로 들어왔기에 그들은 발소리까지 유념하며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주의 깊은 행동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소로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들은 행자 한 명과 정통으로 맞닥뜨렸다.
양쪽 모두 너무 놀라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행자는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 열 명 남짓한 숫자였고 한결같이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었다. 겁이 난다기보다는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꼼짝도 못한 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더욱 그런 인상을 자극했다. 잠시 후 행자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초보냐?”
조금씩 당황에서 헤어 나와 오고 있던 복면 사내들은 행자의 말에 다시 당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행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초보 티 무진장 내는구나. 이 웃기는 복면은 뭐야? 동물들이 너희 얼굴 봐 뒀다가 복수할까 봐?”
남자들은 당황한 듯 자신의 복면을 만졌다. 행자는 딱하기 그지없다는 투로 말했다.
“밀렵질이 처음이라 길을 잃은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이쪽으로 넘어오는 얼간이가 어디 있냐? 눈은 뒀다 뭐하려고? 너희들 소굴은 산 반대쪽이다.”
복면 사내들이 약간 덜 당황했다면 행자의 말에서 어떤 오해가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나치게 당황하고 있었다. 심리적 공황 속에서 복면 사내들은 행자가 제발 비명이라도 질러 줬으면 좋겠다고 정말 그런다면 곤란하겠지만ᅳ 생각했다. 그때 행자가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무기를 발견했다.
“손에 든 그건 뭐야?”
복면 사내들은 당황하여 손에 든 칼을 뒤로 치웠다. 행자는 눈을 부릅떴다.
“이놈들! 뭘 잡은 거지? 내놔 봐!”
지적을 받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행자는 그 움직임이 좀 빠르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행자는 배가 타 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고통과 경악으로 행자는 눈을 부릅떴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행자는 곧 허리를 숙였다. 들고 있던 검으로 행자의 배를 찔렀던 남자는 쓰러지려는 행자를 부축했다.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남자들 가운데서 숨 막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 스님을 죽이다니……!”
행자를 찔렀던 남자는 그를 조심스럽게 눕힌 다음 검을 뽑았다. 세심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행자는 끔찍한 고통에 진저리를 친 다음 정신을 잃었다. 고함을 질렀던 남자가 다시 말했다.
“어, 어쩔 생각입니까! 스님을 죽이다니요!”
“시끄러워! 죽을 자리는 아니었어. 치료가 잘 되면 살 수도 있 어.”
“혹 살아난다 해도 군웅들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멍청이! 이 녀석이 하던 말 생각 안 나? 이 녀석은 우리가 밀렵꾼인 줄 알고 있어. 아마 살아나도 밀렵꾼들이 자기를 공격했다고 말할 거야.”
사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행자를 찔렀던 남자는 다시 말했다.
“흐음. 덕분에 좋은 것 알았다. 밀렵꾼인 척하면 되겠군. 가자!”
한 명이 쓰러진 행자를 가리켰다.
“이 친구는 어떻게 하죠?”
“상처를 지혈하고 잘 보이는 곳에 눕혀 둬. 그다음은 그 녀석의 재수가 좋기를 바라야지.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너도 처리가 끝나면 곧 따라와. 어디로 와야 하는지 알지?”
남자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행자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들은 소리를 죽인 채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들은 무학당이 보이는 절벽에 도달했다.
무학당으로 들어서는 오솔길은 여전히 몇몇 행자들에 의해 감시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거친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소리를 내지 않고 그런 일을 하느라 몹시 지쳤지만 그들은 가까스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무학당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들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대호는 마루에 잠들어 있었고 두억시니들 또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주위를 꼼꼼하게 살피던 남자 하나가 곧 케이건을 발견했다. 케이건은 무학당 맞은편의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깐 채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케이건이 앉아 있는 모습에 경악했다. 하지만 얼마 후 충격이 가시자 그들은 케이건이 앉은 채 잠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쌍신검을 바닥에 찌르고 그 고동으로 어깨를 받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모습이었다. 남자들은 긴장감에 숨소리를 낮추었다.
“여차하면 깨어날 것 같은데요.”
“….바쁘게 만들어 줘야지. 시작하자.”
그들은 주위의 나무에 밧줄을 묶었다. 하지만 밧줄을 아래로 던지는 대신 그 자리에 사려 두고는 허리춤에서 도자기 병을 꺼내었다. 주병처럼 생긴 그 병들은 볼록한 배와 가느다란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주둥이는 굵은 심지로 틀어 박혀 있었다. 남자들 중 한 명이 점화통을 꺼내어 불을 피웠다. 곧 부시에 불이 옮겨 붙었고, 그러자 사내들은 황급히 병을 불에 가져갔다.
심지에 불이 옮겨붙었다. 사내들은 무학당의 지붕을 향해 화염병을 집어던졌다.
첫 번째 화염병이 지붕에 부딪혀 쨍그랑하는 소리를 내자 케이건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뱀처럼 움직인 케이건의 손은 바라기의 칼자루를 움켜쥐었고 그대로 바라기를 밀었다. 땅을 밀어내는 효과에 의해 케이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케이건은 그대로 스르르 몸을 돌려 오솔길을 겨냥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잠에서 깨어났다.
케이건은 눈을 뜨고 오솔길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케이건은 약간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또다시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낸 케이건은 눈을 부릅떴다.
무학당의 지붕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루나래가 마당으로 뛰쳐나와 어깨털을 곤두세웠다. 두억시니들도 당황하여 일어났다. 그때 케이건은 하늘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가늘게 뜬 케이건은 곧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화염병을 발견했다. 케이건은 어떤 식으로 불이 일어났는지 깨닫고는 고함을 내지르려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렵꾼들이다! 밀렵꾼들이 공격한다!”
케이건은 주춤했다. 그 외침은 절벽 위쪽에서 들려왔다. ‘뭐 하려는 수작이지? 케이건은 그 외침에 다른 승려들이 깨어날 거라 판단하고는 주저 없이 무학당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두억시니들이 케이건을 막아섰다.
케이건은 얼굴을 찌푸리며 두억시니들을 노려보았다. 마루나래 또한 그들 앞으로 달려 나와서는 어깨털을 꼿꼿이 세운 채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케이건은 손을 들어 지붕을 가리켰다.
“불을 꺼야 해! 륜과 사모를 깨워야 한다고!”
안타깝게도 마루나래와 두억시니들은 케이건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케이건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라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마루나래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발톱을 곤두세웠다.
하늘에서 불줄기가 쏟아졌다.
화염은 마루나래와 케이건 사이의 공간을 맹렬하게 훑고 지나갔다. 마루나래는 뒤로 훌쩍 뛰었고 케이건 또한 바라기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다. 다시 하늘을 본 케이건은 꼬리를 격렬하게 진동시키고 있는 용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스화리탈!”
용은 케이건을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대호를 쏘아보았다. 마루나래는 아스화리탈을 향해 사납게 포효했지만 공중에 떠 있는 용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아스화리탈은 그런 대호를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케이건은 불에 타 들어 가기 시작하는 무학당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스화리탈이 다시 날아들었다.
아스화리탈은 대호가 절대로 뛰어오를 수 없는 높이에서 불을 토해 내며 서서히 날아들었다. 케이건은 눈썹이 타 들어 가는 느낌을 받으며 물러나야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이 대호와 두억시니들을 몰아붙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마루나래는 으르릉거리며 이리저리 뛰었지만 아스화리탈은 폭포수 같은 불길을 토해 내어 거침없이 대호를 밀어붙였다.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의 뜻을 깨닫고는 용의 뒤편으로 돌아 달려갔다. 마루나래가 포효하며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용이 그 앞을 막아섰다.
케이건은 방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모는 처음에 무학당에 데려다 눕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륜은 그녀의 곁에 기절한 듯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케이건은 순식간에 사태를 깨달았다.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여신의 힘을 하루 종일 무리하게 사용한 끝에 륜은 지쳐 빠진 채로 잠들어 있었다. 케이건은 륜에게 다가가 뺨을 두드렸다. 그 와중에도 지붕 위쪽에서는 우지끈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 뺨을 토닥이던 케이건은 그래도 륜이 일어나지 않자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륜은 기겁하며 눈을 떴고 그 순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도로 눈을 감았다. 천장의 온도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일어나, 륜!”
“케, 케이건?”
“불이 났어! 어서 일어나!”
륜은 눈을 감은 채 케이건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났다. 케이건은 한 손으로 륜을 끌어안듯이 하고 바라기를 쥔 다른 손으로 얼굴 앞을 가린 채 다시 문 밖으로 달려 나왔다. 마루까지 순식간에 뛰쳐나온 케이건은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기겁하여 외쳤다.
“사모! 사모는 어디 있어요?”
케이건은 입술을 깨물며 무학당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학당은 불구덩이로 바뀌고 있었다. 케이건은 륜을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다른 손의 바라기도 집어 던졌다. 그것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쥐고 있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케이건은 다시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도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케이건을 보던 륜은 그제야 사모가 안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륜은 공포에 질려 케이건을 따라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아스화리탈이 그에게 날아와 앞을 가로막았다. 그냥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얼굴에 달라붙어 버렸다. 륜은 비틀거리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 충격과 착상에 관련된 해묵은 농담이 현실이 되었다. 땅에 부딪히자마자 륜은 자신이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착상으로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얼굴에 올라탄 채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있는 용을 옆으로 치워야 했다. 륜은 헐떡거리며 외쳤다.
“아스화리탈, 아스화리탈! 비켜!”
마구 휘두른 손이 아스화리탈에게 부딪쳤다. 아스화리탈은 훌쩍 날아올랐고 허공에 뜬 채 걱정스러운 기세로 륜을 내려다보았다. 륜이 또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면 어쩌나 하는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륜은 아스화리탈에게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륜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닐렀다.
<라르간드!>
이제는 익숙해진 느낌이 륜을 에워쌌다. 륜은 여신의 힘이자 신에게 깃드는 것을 느끼며 간절히 소망했다.
<당신의 힘은 물이지요. 제발 도와주세요! 폭우를!>
하늘이 천둥으로 포효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케이건은 사모를 붙잡았다. 벽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위에서는 불티가 후두둑 떨어졌다. 악전고투 끝에 사모를 안아 들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케이건은 연기를 잔뜩 들이마시게 되었다. 케이건은 쿨럭거리며 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때 불길을 이기지 못한 서까래가 케이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케이건은 사모와 함께 우당탕 쓰러졌다. 케이건은 신음을 토하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헐떡이는 바람에 더 많은 연기를 들이마셨고 케이건은 허파를 통째로 토해 낼 듯한 격한 기침을 하게 됐다. 입으로 피리 소리 같은 것을 내며 케이건은 사모가 어떤지 돌아보려 했다. 그 순간 케이건의 눈앞이 캄캄하게 바뀌었다. 케이건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를, 폭우를!>
륜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계속해서 닐렀다. 빗줄기가 그의 머리와 어깨를 사정없이 때렸지만 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폭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