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02화
소홍이 생각했던 환청은 얼마 안가 현실(現實)로 드러났다. 그다음 날 약초를 캐고 갔다 오니 어제 보았던 마차가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소홍은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마당에서 서성이다가 자신을 보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오오.. 소홍아! 이제 오느냐?”
평소의 아버지답지 않게 반가이 맞으며 자신을 대하자 소홍은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그녀의 아버지는 잠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이내 펴고는 웃으면서 그녀를 방으로 인도했다.
“자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
소홍은 아무 말 없이 망태를 내려놓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어제 보았던 사내가 중앙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삿갓을 벗고 있어서 처음에는 그가 어제 보았던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손을 보고는 곧이어 알 수 있었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소홍을 대하며 예의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너라.”
마치, 자신이 주인인 듯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었지만 소홍은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멀뚱히 서 있는 게 다였다. 묵묵한 두 사람이 방 안에 있자 따뜻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가 썰렁해지는 것 같았다.
이에 보다 못한 그녀의 아버지가 나섰다.
“소홍아. 어서 앉아라. 하하! 얘가 오늘따라 수줍음을 많이 타는군요.”
사내는 대답했다.
“괜찮소..”
소홍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홍이 앉자 그녀의 아버지도 같이 앉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 냉랭한 얼굴로 앉아있는 사내에게 실실 웃으며 말을 했다.
“헤헤.. 이 아이가 맞죠?”
그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소홍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내가 소홍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소?”
“예? 아.. 예. 하하! 그런 거야 어렵지 않죠. 소홍아. 이분 말씀 잘 듣거라. 알겠냐?”
소홍은 나직이 대답했다.
“예…. .”
그녀의 아버지는 사내에게 한 번 굽실거리고는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둘만이 남게 되자 사내가 말을 꺼냈다.
“나는 긴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다.”
소홍은 고개를 수그리고 양손은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사내는 그런 소홍의 행동에 잠자코 있었다. 소홍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자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이제부터 나를 따라가야 한다.”
그녀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소홍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힘있게 쥐어진 그녀의 옷자락은 이리저리 선들을 그어냈다. 소홍은 행동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허락하셨나요.”
사내는 의외로 조용히 말하는 소홍의 모습에 미묘한 파문을 느꼈다. 그러나 그 파문은 미미했기에 곧이어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
소홍이 말이 없자 한참 후에 사내가 다시 말했다.
“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일 너를 데리러 오겠다. 그때까지 편히 쉬어라.”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던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멈칫하고는 소홍을 돌아보았다.
“내 소개가 늦었구나. 내 이름은 초혼(草魂)이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초혼은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아이구… 이제야 나오셨습니까? 가시게요? 헤헤..”
“내일 다시 오겠소.”
“그럼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제 딸래미는 제가 책임지고 붙들어 놓을 테니, 걱정 말고 내일 오십시오.”
소홍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자신의 구겨진 옷자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오물오물….”
“꿀꺽…”
조그맣고 앙증맞은 입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산딸기가 마침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소홍은 손을 움직여 또다시 산딸기를 한 움큼 쥐었다. 산딸기는 물러터져 있었다. 조금만 세게 쥐어도 빨간 색소(色素)가 터져 나왔다. 당연히 그녀의 두 손은 피를 칠한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소홍은 산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초혼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덜컹.. 덜컹!
마차가 돌 위를 지나갔는지 심하게 흔들렸다. 마차에 올라선 후 여태껏 눈을 감고 있던 초혼은 그제서야 감았던 눈을 떴다. 소홍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초혼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런지 산딸기를 집어먹는 그녀의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이를 본 초혼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라.”
소홍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초혼의 말이 다시 이어져 나왔다.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자꾸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 마부가 마차를 멈추었다. 초혼이 일어나 마차 문을 열었다. 소홍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따라 나왔다. 소홍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내린 곳은 산길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홍은 마부가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초혼이 자리를 깔고 앉자 소홍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초혼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도 같이 마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소홍은 그런 침묵이 과히 나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손으로 바닥을 휘젓던 소홍은 초혼의 검은 손을 보았다.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소홍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손….”
소홍의 말에 초혼은 무관심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소홍은 그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미세하게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초혼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손을 혹사시키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소홍은 그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질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초혼은 소홍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소홍의 시선이 초혼의 손에서 벗어나 그의 얼굴로 향했다. 초혼은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말했다.
“아직 알 필요는 없다.”
사그락… 사그락.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서 마부가 숲을 헤치고 나왔다. 그의 양손에는 토끼가 한 마리씩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토끼들이 지금 자신이 먹어야 하는 식사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토끼들은 바둥거리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죽어 있었다. 죽어있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자 소홍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토끼들을 초혼의 앞에다 조심스레 내려놓은 마부는 주위의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을 긁어모아 놓고 작은 소도로 토끼의 가죽을 벗겨냈다. 생살을 찢는 소리가 소홍의 귓가에 생생히 들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곧이어 비릿한 혈향(血香)이 그녀의 콧속을 자극했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웁! 우읍!”
소홍은 고개를 한껏 돌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나오려는 욕지기를 애써 참았다. 마부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힐끔 쳐다보았을 뿐 하는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숙련된 솜씨로 나머지 토끼도 가죽을 벗겨내고 내장을 모두 긁어내었다. 그런 다음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불이 붙자 마부는 토끼의 가죽과 안의 내용물들을 소홍의 반대쪽으로 멀리 내던져 버렸다. 얼마 안가 토끼고기가 익어가면서 구수한 냄새를 퍼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고기가 다 익자 초혼은 토끼의 양다리를 부욱 찢어서 소홍에게 건네주었다.
“먹어라.”
입안에서는 군침이 가득 돌았지만 아까 죽은 토끼의 눈망울을 생각하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소홍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안으로는 인가(人家)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멈추어서 식사를 할 생각이 없다. 이 고기를 안 먹으면 너는 오늘 내내 산딸기만 먹어야 한다.”
소홍은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산딸기만으로도 충분해요.”
초혼은 소홍의 말에 더 이상 먹기를 권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권했던 토끼의 다리들을 종이에 싸서 소홍에게 주었다.
“생각이 바뀌면 먹도록 해라.”
소홍은 건네주는 종이 꾸러미를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곧이어 군말 없이 받아들었다. 갓 익은 것이어서 그런지 받아든 두 손이 화끈거렸다. 소홍은 자신의 무릎 위에 토끼 구이를 올려놓았다. 두 사내들은 토끼 한 마리를 반씩 나눠 먹었다. 그리고 남은 한 마리는 토막을 내서 작은 주머니 자루에 집어넣었다.
“꿀꺽…”
소홍의 입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고기를 다 먹은 후 초혼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차로 들어갔다. 마부는 불이 확실하게 꺼졌는지 확인을 하고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소홍은 자신도 마차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토끼고기를 쥐어들고 마차로 돌아갔다. 초혼의 말대로 인가가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보였어도 그냥 지나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밤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달렸다. 몇 번 쉰 적이 있었지만 그건 말을 쉬게 하느라 멈추었을 뿐이었다. 눈을 붙이기 위해 잠을 자던 초혼은 옆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소리 난 곳으로 눈을 돌리니 소홍이 낮에 자신이 싸주었던 종이를 조심스레 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으므로 초혼은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후에 소홍이 토끼고기를 뜯어 먹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죽여 먹느라고 애를 쓰느라 먹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식어버린 토끼고기를 먹는 데 무려 이각이나 투자한 소홍은 뼈다귀를 종이에 싸서 초혼을 살펴 보았다. 그가 자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소홍은 창문을 열고 바깥에다 종이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와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녀의 행동을 본 초혼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밤은 어느새 주위의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