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07화
잠깐 동안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동천은 소연에게 다시 흐뭇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좋아. 네가 그렇게 애원하니까 내가 다시 바꿔주기로 하지.”
주인이 바꿔준다고 하자 소연은 저으기 안심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동천의 하인답게 동천에게 인사(아부)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히히! 감사까지야… 하! 하! 하! 하!”
동천은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어 제꼈다. 그렇게 동천이 신나게 웃고 있을 때 수련이 머물고 있는 방문이 빼꼼히 열렸다. 당연히 문을 연 사람은 수련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연 수련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주방에서 동천과 언니가 보이자 당당하게(?)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수련은 큰소리로 동천에게 말했다.
“야, 너 우리 언니 괴롭히려고 왔지?”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귀찮은 계집애가 나왔던 것이다. 동천은 수련에게 다가갔다.
“이건, 네가 낄 일이 아니니까 잠시, 네 방에서 처박혀 있어.”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수련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뭐? 너 지금 말 다했어? 이게!”
딴에는 동천의 머리를 때려준다고 주먹을 휘두른 것 같았는데 동천이 가볍게 피하자 힘껏 휘두른 수련은 중심을 잃고 두 팔을 마구 흔들어댔다.
“어, 어! 으다다다-닷!”
팔을 흔들면서 균형을 잡은 보람이 있었는지, 겨우 중심을 잡은 수련은 쪽팔림을 무마시키려는 듯 동천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다고 동천이 쫄 리가 없었다.
“뭘 꼴아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동천의 언사에 수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별다른 행동은 못하고 그저 혼자 씩씩! 대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론 동천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렴풋이(사실은 확실히.) 짐작한 수련은 분한 마음에 약간의 눈물을 내비쳤다.
<흑..이럴 때 아가씨만 계셨어도…>
“수..수련아.”
소연은 억울해하는 수련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다.
그때, 문밖에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초를 서던 자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시선이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스-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사정화가 등장한 것이었다. 여전히 무표정인 사정화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동천이 보이자 눈을 약간 반짝였다.
“넌, 여기에 왠 일이지?”
난데없는 사정화의 등장에 속으로 헛 바람을 들이킨 동천은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저.. 저 년이 여기에 어떻게…?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런 걸까? 가서 한번 건드려(?) 볼까? 저게 뭐라고 중얼거리네? 어? 근데 저게 왜 나에게 오지?>
“동천..”
동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옙! 아가씨!”
사정화는 동천이 대답하자, 그제서야 굳혔던 안색을 약간이나마 폈다. 안색을 굳힌 거나, 핀 거나, 그게 그거였지만 동천은 남 눈치 보는데(특히, 자신이 맞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 때리려고 왔다가 동천이 뒤늦게나마 대답하자 그만둔 것 같았다. 사정화는 눈동자를 미미하게 움직이며 동천의 위아래를 쳐다봤다.
그런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두 번 묻게 하지 마.”
차가운.. 지극히 차가운 음색(音色)이었다. 동천은 등골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며,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정화는 다시 물었다.
“넌, 여기 왜 왔지? 역천에게 수련을 받는 게 아니었어?”
이미 정신을 차린 동천은 헤헤.. 거리며 말했다.
“그게요. 잠깐 일이 있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헤헤헤..”
사정화는 굽실거리는 동천에게 냉랭히 쏘아붙였다.
“웃지 마.”
사정화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후, 동천은 어중간하게 대답했다.
“예에…”
수련을 보니,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어휴.. 저 싸가지 없는 년. 저저..! 주둥이를 그냥… !>
동천이 수련의 양 볼을 잡고 있는 힘껏 늘어뜨리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정화가 다시 물었다.
“그 일이 뭐지?”
감히 사정화 앞이라 깊은 사색에 들지 못했던 동천은 곧바로 대답했다.
“예. 그게, 뭐냐 하면….”
여지껏 있었던 얘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동천은 숨이 차도 꾹 참으며 마지막으로 여기에 오게 된 이유까지 설명해 주었다.
“헥헥..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오게 된 겁니다. 야, 소연아 물 좀 떠 갖고 와.”
이야기 중에 자신의 주인이 쥐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된 소연은 파랗게 질려 있다가 동천의 명령에 재빠르게 물을 떠서 대령했다. 물을 건네주는 소연을 한번 째려보고 단번에 물을 들이킨 동천은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크-어.. 시원하다.”
“킥킥킥!”
수련은 얄미운 표정으로 입을 가리며 웃어댔다. 동천은 그런 수련이 은근히 신경 쓰였지만 사정화 때문에 죽은 듯이 잠자코 서 있었다. 대신 애꿎은 발가락만 신발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그거라도 안 하면 못 참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정화는 웃는 수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동천은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그래! 한 번 혼내 줘! 저년 대갈통을 한대 쳐! 사정화! 너는 할 수 있어! 제발… >
동천이 속으로 그렇게 응원(?)을 했건만 사정화는 무심히도 동천의 바람을 깨뜨려버렸다. 수련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다시 자신을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동천은 실망했다.
<휴.. 그래, 그럼 그렇지… 네년이 내 말을 들어줄 리가 없지… >
동천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정화가 동천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좋아. 이제 가봐도 돼.”
동천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그만큼 사정화의 대답이 황당했던 것이다.
<으으… 저, 저 년이? 뭐? 이제 가보라고? 쥐새끼를 먹었다가 내용물을 확인했다는데 그 소리를 듣고도 가봐? 아니.. 그런데 뭐, 저런 년이 다 있어? 지 애비는 안 그런데, 저 종자는 왜 저지랄이지? 아차차.. 애비라는 말은 취소다. 애비가 아니라 부교주님으로 정정(訂正)이다. 음.. 어쨌든 저 년은 주워 온 년이 틀림없어.>
사비혼을 은근히 존경했던 동천은 얼른 말을 고쳐서 사정화만을 욕했다. 그리고 이대로 돌아가기는 억울했다. 갈 때 소연을 같이 데리고 가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엄청난 일을 겪어 다소 머리가 굳어진 동천은 어떻게든지 이 자리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동천은 주뼛거리며 사정화에게 말했다.
“저.. 정말로 가요?”
사정화가 대답 대신 자신을 노려보자 동천은 얼른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동천이 나가자 소연은 따라갈까.. 말까..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때 수련이 사정화에게 다가가서 그 시기를 놓치고야 말았다.
“아가씨. 폐관수련 중인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사정화는 수련의 물음에 자신의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여기가 찢어졌어.”
수련과 소연은 사정화가 보여준 곳을 들여다보았다. 흰 무복이라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사정화가 친절하게도 찢어진 부위를 손가락으로 벌려주자 그제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크기는 어른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였다. 찢어진 부분을 보고난 수련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그런 거라면 저를 부르시면 되잖아요.”
사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요?”
왜 자신을 안 부르고 친히 이곳으로 왔냐는 말이었다.
“그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