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08화
사정화는 연공실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가문의 내공 심법인 수라진결(修羅眞訣)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법이 막바지에 이르러서인지 흰 무복이 다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약간 검푸른 기류가 그녀의 전신(全身)을 휘돌며, 그녀의 아름다운 생머리칼을 찰랑… 흔들어 주었다. 잠시 후 사정화는 긴 호흡으로 자신의 주위에서 돌고 있는 기류(氣流)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기류를 흡입한 사정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
-번쩍!
미미하긴 하지만 사정화의 눈에서 검푸른 광망(光芒)이 쏟아져 나왔다. 사정화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진기를 유통시켜 보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약간의 미소를 내비쳤다.
“이성(二成)…”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웃음을 거두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자신의 성취감을 표현하고 말았지만 만약에 그 무공의 까다로움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아마, 크게 놀랐을 것이 분명했다. 9살에 이성이라니..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들어도 수라진결을 이성 가까이 연공 하려면 적어도 15살 정도가 되어야만 가능했다. 단, 그것도 엄마 뱃속에서부터 수련을 했다는 전제 하에서만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나이로 이성의 성취를 거머쥐었다는 것은 들리는 소문이(몇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사정화는 조금씩 진기를 풀었다. 이성까지 익히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한 성취는 아니라서 기혈(氣穴)이 약간씩 들끓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옥(寒玉)으로 만들어진 침대를 지나서, 구석에 자리한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밤톨만한 벽곡단을 꺼내 들었다.
“오물, 오물.. 꿀꺽.”
꼭꼭 씹어서 마지못해 삼킨(맛이 없다.) 사정화는 정해진 순서를 풀어놓듯 거리낌 없이 연공실을 나섰다. 너른한 통로를 지나 서재로 걸어간 사정화는 서재 끝 부분에서 옥로무녀검법을 꺼내 들었다. 사실 이 무공이 굉장하다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역시 그녀의 가전 무공보다는 한 수 떨어졌다. 가전 무공에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타 무공을 익히기는 싫었지만, 수련을 가르키려면 자신이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무공을 익혔다. 이 부분에서 사정화 수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다음번에 수련을 가르칠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 사정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검을 집어 들었다.
옥로무녀검법은 아름다운 곡선과 음유(陰流)한 기운을 조합시킨 뛰어난 검법이었다. 수련은 아직 기초적인 무공지식과 검법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진도는 한없이 더뎠다. 그래서 생각을 바꾼 사정화는 기초 무공 서적들을 수련에게 여러 권(20권 이상.) 주고 이것들과 병행해서 익히라고 했다. 당연히 수련이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고 그것들을 받아갔다. 그리고 그 책들은 지금 방 한구석에서 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련의 진전이 느렸지만 사정화는 이를 알지 못했다.
목검을 들고 연무장 한가운데서 멈춘 사정화는 1장 2절을 펼치며 몸을 천천히 회전 시켰다. 휘리링-! 거리며, 작은 아지랑이들이 목검을 따라 말아 올려졌다. 목검이 대각선으로 올려졌다가, 다소 빠른 속도로 직각으로 내려졌다. 다시, 반대쪽 대각선으로 올라갔다가 정점(頂點) 끝에서 작은 빛 무리를 토해냈다. 그때 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콰-직! 파밧!
“앗?”
목검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깨어져버린 것이었다. 목검은 작은 조각들로 분산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사정화는 급히 피했다. 수라분광신법(修羅分光身法)을 이용해 뒤로 이동했지만 한두 개만은 피하지 못했다. 하나는 급히 손으로 떨쳐냈지만 다른 하나는 손쓸 틈이 없어서 피해 버렸다. 그러나 옆구리 쪽으로 스쳐 지나간 조각은 그녀의 옷을 날카롭게 베어버렸다. 찌직! 거리는 소리에 옆구리를 살펴본 사정화는 눈에 띄게 얼굴을 굳혔다.
옷이 찢어진 것이었다. 다른 옷 같았으면 찢어졌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이 옷은 그 의미가 남다른 옷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가 손수 짜서 만들어준 무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이별로 나중에 크면 입으라고 총 세 벌의 옷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중 제일 작은 옷이 지금 사정화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그러니, 사정화의 안색이 굳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사정화는 손에 쥐어 있는 부서진 목검을 내던지고 수련을 부르기 위해 신호용 끈을 잡아당겼다.
-주르륵…!
“응?”
사정화의 한쪽 눈썹이 휘어졌다. 느낌이 달랐던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팽팽하게 당겨져야 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줄이 딸려왔다. 이상히 여긴 사정화는 다시 줄을 당겼다.
-주르르륵…
“……”
자신의 키만큼이나 딸려나온 줄을 말없이 바라보던 사정화는 이내 계속 당겼다. 줄들은 술술 풀리는 실타래마냥 사정화의 손으로 감겨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줄은 끝을 보였다. 중간에 줄이 끊겨진 듯했다. 줄의 끝부분을 집어보니 무언가가 뜯어서 잘라 놓은 듯했다. 그 줄을 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 사정화는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잠시 나가보는 것도…”
한 달 이상 동굴에 머물렀던 사정화는 동굴 밖으로 나갔음에도 눈이 시리지 않았다. 지금은 날이 저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천히 풀잎들을 밟아가며 걸어갔다. 사브락 거리는 소리들이 그녀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주위를 살피다가 그녀를 알아본 사내들은 다급히 부복대례를 했다. 순간 사정화는 분노의 빛을 띠었다. 자신만의 공간에 외인(外人)이 침입했던 것이다.
“너희들.. 여기엔 어떻게 들어왔지?”
엎드려 있던 사내들은 그녀의 위엄에 벌벌 떨며 자초지종을 되도록이면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사정화는 분기를 거두었다. 그녀는 가타부타 없이 약간 눈을 찡그렸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쳐갔다. 몇 번이나 그런 귀찮은 인사를 받은 그녀는 예전에 동천이 쓰던 집과 자신의 집 사이의 통로에 몇몇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있었고, 그 중 한 사내가 얼굴에 피칠을 한 사내를 업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정화는 그들에게 물었다.
“왜 여기에 몰려 있느냐?”
그들은 순간적으로 놀라 하더니, 이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엎드려 절을 했다. 기절한 사내를 업고 있는 사내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 바람에 업혀있던 사내는 힘없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사내는 낮게 “켁..” 하는 것 같았다. 모두 인사를 마치자 한 사내가 부복한 그 자세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의 뒤에 쓰러진 사내가 잘못하여 이층에서 떨어졌사옵니다. 그래서 지금 약왕전으로 데려갈려고 호송하려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동천의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도 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사정화는 그들 같은 고수가 왜 이층에서 떨어져 다쳤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왜? 귀찮으니까…
“데려가.”
그 말을 끝으로 사정화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무사 둘이 부복 대신 직각으로 인사를 한 후,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오게 된 거야.”
아가씨의 말을 다 듣고 난 수련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수련은 내친김에 사정화를 졸랐다.
“아가씨. 여기 며칠만 묵었다 가요. 제가 아주아주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그래서 동천의 마수(魔手)에서 우리 예쁜 소연이 언니도 구해주세요. 예? 아잉.. 아가씨잉~~!”
사정화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흔들어대는 수련을 무심히 보다가 소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연은 깜짝 놀라며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녀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자 소연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그전에 뵙고, 참으로 오랜만이지요? 호.. 호… 호….!”
인사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정화는 알아서 고개를 끄덕여 준 후 고개를 돌렸다. 사정화를 계속 조르던 수련은 소연이 울 것 같아 하자 의아해했다.
“언니, 왜 그래요? 동천은 갔어요. 그리고 이제 아가씨만 계시면 그 녀석은 별 볼 일 없다구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잠깐만 기다려요. 알았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집요하게 사정화를 물고 늘어졌다.
“아잉.. 아가씨. 제가 매일마다 안마도 해드리고, 옆에서 재미있는 얘기들도 해드릴게요. 예? 아~가~씨~~!”
코맹맹이 발음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수련의 모습에 결국은 사정화도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도 가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생각도 어느 정도 공헌을 했다.
“좋아. 대신 일주일이야.”
기껏해야 삼 사일로 잡고 있었던 수련은 생각지도 못했던 횡재에 입을 크게 벌리며 기뻐했다.
“네! 네! 그러구 말고요! 아가씨 정말 고마워요!”
“됐어..”
사정화는 자신의 방으로 걸어 올라갔다. 한껏 기뻐하던 수련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이층으로 올라가던 그녀를 급히 제지시켰다.
“앗? 아가씨! 이층은 쥐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라 가시면 안 돼요!”
쥐가 크면 얼마나 크겠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정화는(동천에게 들었어도 동천이 워낙, 뻥을 잘 쳐서 믿지를 않았다.) 쥐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기에 됐다는 말을 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수련은 사정화가 이층으로 올라갔어도 무서워서 발만 동동!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