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13화
아침에 일어나 운기조식을 마치고 아침밥을 먹고 난 동천은 기분이 좋았다.
“랄랄라~! 상쾌한 아침.. 좋았어! 오늘도 무사히 농땡이를 쳐보세나! 히히히히! 랄랄랄라~”
옆에서 화정이가 호응(웃어주자)해주자 동천은 더욱 신이 나서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동천은 화정이에게 다가갔다.
“화정아. 그러고 보니 네가 어제 공부를 못했구나? 쯧쯧.. 그러면 안 되지. 좋아. 내가 공부를 시켜주마. 자, 이리 와 앉아.”
화정이는 반색을 하며 동천의 말에 따랐다. 웃는 게 보통 때와 똑같았지만 동천은 지 혼자 화정이가 반긴다고 생각했다. 서탁에 앉힌 다음 동천은 손수 붓과 화선지. 그리고 먹과 벼루를 준비했다. 벼루에 약간 물을 붓고, 먹을 갈던 동천은 그것도 귀찮았는지 화정이를 시켰다. 의외로 화정이는 먹을 잘 갈았다. 그래서 동천은 생각했다.
<소연이 이년! 화정이에게 얼마나 먹을 갈라고 시켰으면 얘가 이렇게 먹을 잘 갈아? 이 계집애.. 내 오늘 가서 당장 잡아와야지..!>
동천의 생각이 끝나는 순간 화정이의 동작도 멈추었다. 동천은 욕독경의 말을 상기시키고 재빨리 화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 줬다.
“아이구~! 우리 화정이 끝내주게 잘한다! 좋아. 이제 내가 부르는 대로 써봐. 알았지?”
동천은 화정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았다.
“음.. 뭘 쓰라고 할까? 옳지? 내가 부르는 말을 써봐. ‘한번만 안아주세요~ 마지막 부탁이예요.. 이렇게 헝클어 놓은~ 내 맘을 달래주세요. 한 번만 안아 주세…’ 응? 야! 왜 안 쓰냐? 엥? 일(一)자 하나밖에 안 썼네? 화정아. 빨리 써봐.”
동천이 재촉했지만 화정이는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손을 움직였다. 동천은 그녀가 쓰는 것을 차례대로 읽어나갔다.
“천(天).. 지(地)… 일(一)… 이(二)… 삼(三)…. 이게… 아? 사(四). 에.. 그리고, 수(水)…. 또 그리고… 천… 지… 일…. 이…. 삼…. 사…. 수…. 또또 그리고, 천…. 지…… 야! 그만 써! 누가 이따위 걸 쓰랬냐? 그리고 거의 한 달 동안 배운 게 고작 이거냐?”
화정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은 도대체 이 계집애의 대가리에 뭐가 들었나.. 했다.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고 했지만 동화를 삭혔다.
<음… 칭찬. 칭찬… 동천아. 화를 내면 안 되느니라…..>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 암~! 너무너무 잘했어! 아이구 착해라! 넌 누구 닮아서 이렇게 똑똑(?)하니? 으하하하! 자.. 다시 써봐! 그렇지.. 오오. 잘한다! 어허? 명필이로다! 재녀(才女)가 탄생했도다! 얼씨구~”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응? 누구냐?”
문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접니다. 주인님.”
“응?”
“도연입니다.”
“뭐?”
“도연입니다.”
“누구라고?”
“도연입니다.”
“뭐시라?”
“도연입니다.”
“뭐라꼬?”
“……”
동천은 더 이상 말이 없자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유치한 동천이었다.
“잘못 들었나? 히히!”
밖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도연입니다…”
약간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동천은 그런 반응을 보이는 도연의 모습에 통쾌해했다.
“어? 너냐? 짜식! 그러면 진작에 그렇다고 얘기하지… 들어와라.”
동천의 승낙이 떨어지자 도연은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동안 별일 없었는지요.”
“나야.. 응? 너, 그 꼴이 뭐냐? 으히히히! 가관이네? 킥킥..”
안으로 들어온 도연은 한 팔에 붕대를 감고, 다른 한 팔엔 목발을 짚고 있었다. 물론, 다리에도 한쪽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도연은 자신의 전신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묵뚝뚝하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래.. 내 얘기는 다 들었다. 그 쥐새끼가 그랬다며? 쯧쯧! 조심 좀 하지. 그런 건 다 밑에 애들한테 맡기지 그랬어.”
동천은 쥐새끼 부분에서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도연은 그런 동천이 화가 나 있는 줄 알았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동천은 도연에게 손을 저었다.
“됐어. 됐어… 그건, 그렇고.. 너, 몰래 빠져나왔지?”
주인의 물음에 도연은 눈을 들어 대답했다.
“제 임무를 다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동천은 속으로 지랄한다고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하하! 네, 마음만은 잘 알겠는데. 상처가 도지면 나중에 문제가 있게 된다. 그러니까, 다 낫거든 와라. 알겠냐?”
도연은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주인님. 귀찮게 하진 않겠습니다. 그냥 수련장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겠습니다.”
그게 귀찮게 하는 거기 때문에 돌려보내려 했던 건데 도연이 말을 안 듣자 동천은 마침내 화를 냈다. 그래서 그런지 동천의 얼굴에 하나둘씩 주름이 새겨졌다.
<그냥, 한 대 쳐서 기절시킬까? 아냐.. 치는 김에 저 다친 발목을 아예 부러뜨릴까? 그래.. 그래볼까? 좋아. 도연아. 나를 원망 말거라. 히히히!>
동천은 마음을 굳히고 도연에게 다가갔다. 도연은 주인이 자신에게 묘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안색을 굳혔다. 동천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 이 새끼가 째려보네? 으음…>
동천이 마음속으로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나타났는지 역천이 화가 난 얼굴로 도연을 밀쳤다. 그 바람에 도연은 힘도 못 쓰고 쓰러져 버렸다. 그런 도연을 바라본 동천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힘없이 쓰러질 줄 알았으면 진작에 칠걸.. 했었던 것이다.
“제자야…”
도연을 바라보던 동천은 사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예. 사부님. 어쩐 일로 오셨나요?”
역천은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났는데 그 화가 쉽사리 풀리지 않는 듯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동천은 왠지 불안했다.
“네 사형이 정말로 내 꿈에 나타난다고 그러디?”
동천은 그제서야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나온다고 뻥을 쳤는데 간밤에 그 사형이 나타나질 않자 그 의문을 풀려고 사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동천은 화가 난 듯한 사부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얼른 둘러댔다.
“안 나타났어요?”
역천은 단호히 말했다.
“그렇다!”
동천은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다..? 사형이 분명히 꿈에서 뵐 거라고 했는데….?”
“정말이냐?”
동천은 사부가 자신을 약간 의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자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럼,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 이예요? 생각해 보세요. 사형이 사부님의 꿈에 안 나타나면 당연히 제가 의심을 받을 텐데 왜 쓸데없이 그런 짓을 하겠어요?”
듣고 보니 그랬다.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었다. 이곳에 올 때 약간이나마 동천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역천은 당당한 제자의 모습에 모든 의심을 풀어버렸다.
“내가 뭐라고 했냐? 왜 그렇게 날뛰냐..?”
사부의 어감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동천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동천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헤헤, 그냥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