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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18화


거의 반 시진째 몸을 굳히고 있던 사정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벗어놓았던 옷가지들은 안 그래도 어지러져 있었는데 아까 욕통을 부술 때 더욱 어지러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리저리 움직여서 옷가지들을 주웠다. 축축했다. 다 젖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하나 집어서 꼭 짜낸 사정화는 내공을 사용해 서서히 말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내력을 너무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입안에서 단내가 풍겨져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물기를 말려냈다. 마침내 완벽하지는 않아도 입을 만한 정도로 마르자, 사정화는 옷가지를 집어 들고 욕실을 나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아….”

사정화는 이마를 짚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듯싶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주저함이 없이 이층으로 몸을 옮겼다. 자신의 방으로 도착하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쥐의 시신은 그 자세 그대로 침대 위에 있었다. 쥐를 일별하는 순간 사정화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사정화는 벽에 걸어둔 칼을 집어 들었다. 칼집에서 튀어나온 검은 날카로운 빛무리를 뿜어냈다. 정점까지 치솟아 올랐던 검이 무슨 이유에선지 서서히 내려졌다. 그리곤 다시 칼집 안으로 되돌아갔다.

“너는 이 칼에 베일 자격도 없어…”

그런 이유였다. 사정화는 자신과 열렬히(?) 입맞춤을 했던 쥐의 피를 자신이 아끼는 검에 묻히기 싫었던 것이었다. 대신 쥐를 침대의 이불로 싸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정화는 주저 없이 밟았다.

“퍽! 퍽! 퍽! 퍽!”

이불 안에서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들이 배어 나왔다. 계속 내려치면 바닥까지 물들 것 같았다. 사정화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기에 그쯤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녀는 이불 양쪽 끝을 잡아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잠시 후에 ‘쿵.’ 하고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창문 아래를 무심히 내려보던 사정화는 팔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훔치고 돌아섰다.

몸이 나른거림을 느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옆방으로 건너가 잠을 청했다.


“아~하암! 쩝.. 잘 잤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수련은 침대 위에 앉아서 흐린 눈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언니가 없자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벌써 일어난 건가? 햐~ 언니는 빠르게 일어나는구나.. 가만? 그렇다면 동천이 언니를 부려먹는다는 얘기네? 에이! 나쁜 놈!”

수련은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아직 여파가 남아 있는지 발걸음이 흐느적거렸다. 문을 열고 나와보니 언니가 자신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쭈그려 있는 게 보였다. 수련은 소연에게 다가갔다.

“뭐 하는 거예요?”

“앗? 깜짝이야… 너로구나?”

수련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죠. 근데… 엥? 에..? 웬 물이예요? 후아… 온통 물바다네?”

수련은 그제서야 상황이 판단되는지 황당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 주변이 물난리가 일어난 듯 축축이 젖어 있었다. 소연은 바닥을 훔치고 있던 걸레를 옆에 있는 물통에 꼭 짜낸 뒤 이마를 쓸어내리며 말해줬다.

“나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 아침에 일어나서 나와보니까 이렇게 돼 있더라? 아마 물독이 깨진 모양이야. 깨진 조각들은 내가 이미 치웠고 지금은 바닥의 물기를 빼내고 있는 중이야.”

수련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며 물이 어느 정도 들어찬 물통을 보았다. 아직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소연이 다시 몸을 돌려 바닥을 닦자 그제서야 바삐 움직였다.

“언니, 저도 할게요. 남은 걸레 어디 있어요?”

소연은 안 그래도 바라고 있었던지라 얼른 가르쳐 주었다.

“욕실에…”

“그래요?”

수련은 서둘러 욕실에 갔다가 다시 입을 크게 벌렸다.

“세상에…. 언니!”

거실과는 상대도 안 될 만큼 난장판인 욕실을 보며 수련이 소리쳤지만 소연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도 가보니 그렇게 돼 있었어. 둘 중에 뭐를 먼저 치울까.. 하다가 여길 먼저 치웠던 거야. 그러니까, 너는 거기를 좀 치워줘.”

“예에…”

대답은 했지만 수련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보이는 것부터 치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수련은 좀 무식한 방법이지만 서둘러 일을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자 수련의 입에서 거친 소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아휴.. 누구야? 누가, 이따위 짓을 해댔어? 내가 잡히면 가만히 두나 봐라! 이씨! 아가씨도 와 계신 이때….. 가만? 혹시, 아가씨께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수련은 불길한 생각이 미치자 급히 이층으로 뛰쳐 올라갔다. 언니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선명히 들리지 않았다. 안 들어도 뭐라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가씨께 가요!”

큰 소리로 대답해 준 수련은 사정화의 방이 보이자 문을 두드린 후 들어갔다.

“아가씨…”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련은 불안했다. 그녀를 지지하듯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고, 이불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 살폈지만 이상한 흔적은 없었다. 수련은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뒤돌아서는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바닥 쪽이었다.

“저게 무슨 자국이지..?”

쪼그리고 앉아서 바닥을 살펴보던 수련은 갑자기 기겁을 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앗! 피..피? 히익?”

주저앉은 상태에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뒤로 물러선 수련은 한동안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빨이 저절로 부딪혔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미친 듯이 살폈다.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용기가 샘솟았다. 다소 진정하고 보니, 피는 그곳에만 묻어 있는 게 아니었다.. 수련은 엎드린 자세로 핏방울을 따라갔다.

“히잉.. 무서워. 나, 나갈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몸은 어느새 핏자국의 종착지점(終着地點)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여! 여기는…”

창문이었다. 수련은 난간을 잡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버팀목이 있어서 그런지 일어나기가 수월했다. 고개를 창문 밖으로 내밀자 뒷뜰 아래로 하얀 두루마리가 보였다.

“뭐지???”

자세히 보니 이불이었다. 그 이불은 피에 물들어 있었다. 수련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불이 둘둘 말아져 있었는데 꼭,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호.. 혹시, 저 속에 아가씨가? 꺅!>

수련은 일어난 보람도 없이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으아아아… 으아….. 으………”

얼마나 무서웠는지 소리조차 자신의 뜻대로 터져 나오질 않았다.

“흑흑흑… 엉엉!”

급기야는 눈물까지 쏟아냈다. 수련은 엉금엉금 기어서 방문을 나섰다. 콧물이 흘러 입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다. 수련의 머릿속엔 오로지 아가씨의 생존 여부밖에 없었다. 이층 계단까지 기어가는데 왜 이다지도 길게만 느껴지는지….

수련은 드디어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자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어나서 걸어 내려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었다. 할 수 없이 두 팔과 무릎을 이용해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몸이 밑으로 쏠리자 수련의 두 팔이 그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것이었다. 보통 때라면 상관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결국 그녀는 계단을 굴러야 했다.

“앗?”

수련은 계단 하나하나에 부딪힐 때마다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악! 악! 악! 악! 악!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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