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24화
사부가 건네준 책자를 만지작거리던 일혼은 문득, 이런 의문이 피어올랐다.
-왜, 이 무공기서들을 자신에게 보여주는가…
그렇다. 사부의 말 대로라면 이 책들은 자신이 봐서는 안될 그런 무공기서였다. 그런데 오늘 자신을 불러서 이렇게 서슴없이 책들을 건네주다니… 뭔가, 이상했다.
“사부님.”
“말해라.”
“어찌하여 이 무공들을 저에게 보여주고 전대의 사혼대님들의 무공 묘리(妙理)를 가르쳐주시는 겁니까? 설마, 저희들로 하여금 이것들과 또 다른 성질의 무공을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사부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대답은 그 웃음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어리석은 놈…”
일혼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가르침을 주시지요.”
사부는 흔쾌히 일러주었다.
“너는 태, 강, 즉, 절. 이 네 가지 묘리가 모두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일혼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작은 빛이 일렁였다. 뭔가 깨달은 눈치였다. 일혼은 즉시 대답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이 무공들은 모두 강함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그의 사부는 씨익.. 웃었다. 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나 보다. 일혼의 사부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마다 웃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맞긴 하다만 좀 짧았다. 흠..이 사부가 재미있는 것을 가르쳐줄까? 태강즉절(太剛則折)의 뜻이 무엇이더냐?”
엉뚱한 사부의 물음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일혼은 깜짝 놀랐다.
“아..? 그런 뜻이……”
태강즉절(太剛則折). 따로 떼어 놓으면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모자란 단어들이었지만 그 단어들을 차례로 나열하면 이런 뜻이 되어버린다. ‘너무 세거나 빳빳하면 꺾여지기가 쉽다..’ 즉, 그 네 가지 무리(武理)를 섞으면,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새로운 무공이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일혼은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바닥은 어느새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때 사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해가 됐느냐?”
“예..”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다른 사제들과 힘을 합쳐 이 무공기서를 하나로 완성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마다할 리가 없었다. 무인에게 새로운 경지의 무공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혼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사부를 바라보니 그는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사부는 일혼의 앞에 놓여진 책자를 감상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제자에게 말했다.
“또, 하나…”
일혼은 잠자코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잠시 후 사부의 말이 이어졌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 장로들이 추론해 보니 만약 이 무공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체계(體系)가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사혼대들은 물론이고 무공을 아는 자라면 아마도 완성된 무공을 익힐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일혼의 공손한 대답에 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나는 이 무공이 완성된다면 아마도…..주군의 무공에 어느 정도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나는 19대조 사혼대님들의 꿈을 이해한다. 비록, 그분들은 꿈으로 끝을 맺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아…물론, 내가 다른 뜻이 있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허나 우리들의 무공을 주군의 무공과 비교해보고 싶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인데…..”
사부가 그 뒷말을 자못 망설이자 일혼은 차분히 채근거렸다.
“하명하시지요.”
“아마도 너희들 대에서 무공을 완성시키지 못하리라 본다. 고작 사성이나 오성 정도가 다겠지. 너희들 다음 대의 사혼대가 그 유지를 이어받는다 해도 내가 살아 생전에는 무리겠지…”
잠시 안타까운 표정에 물들어 있던 사부는 못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몇 대 후의 사혼대가 그 무공을 익힌다 하여, 감히 주군의 무공과 비교할 생각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있다면 엉뚱한 생각을 머금은 녀석들뿐이겠지만.”
맞는 말이었다. 상승의 무공을 창안한 점은 좋으나 그 무공이 탄생 되기까지의 염원(念願)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자존심이 강한 그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완성을 목표로 두고 있으나 창안한 당사자는 익힐 수 없는 무공. 그리고 그 목표를 실행할 수 없는 무공.. 일혼은 가슴이 답답했다.
“어찌하면 좋겠는지요.”
“답은 간단하다. 다른 놈에게 전수하면 되는 것이다.”
“예?”
“못 들었느냐?”
못 들었을 리가 있겠는가? 들었다. 아주 잘 들었다. 그런데 너무 잘 들은 게 탈이었다.
“하지만, 이 무공이 어떤 무공인데 사혼대가 아닌 다른 자에게 전수한다는 말입니까? 불가(不可) 합니다!”
사부는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어리석은 놈. 그러니까 아직도 네가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란 무공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일혼은 감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부의 말대로 오 년여 전부터 더 이상의 진보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다소 편법이기는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오성이 넘게 무공을 합친다면, 네 대에서 무공을 모르는 새로운 아이를 데려다가 사혼대와는 독립된 별개의 선을 그어놓고 그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리고 그냥 내버려둬라. 나머지 무공은 그 아이가 만들어가게 하란 말이다. 단! 그 무공이 몇 대를 내려가서든 완성이 되면 수라마가의 가주님과 자웅을 겨룬다는 조건을 내걸어야 한다. 가능하겠느냐?”
일혼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불가합니다!”
게슴츠레 눈을 뜬 그의 사부는 포기한 듯 돌아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네, 맘대로 해 임마.”
육장로의 이야기가 끝나자 대청 안이 썰렁해짐을 느꼈다. 팔장로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듯했다.
“허? 그래서, 우리들이 여지껏 그 무공들을 합쳐왔단 말입니까? 밑에 애들이(사혼대) 익힐 수도 없는 그런 무공을? 그런 겁니까? 그러니까 일은 우리들이 뼈 빠지게 해놓고 그 무리(武理)는 저 아이가 쏙! 빼먹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말씀해 보시지요!”
육장로의 표정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사제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울분을 토해냈는지 팔장로가 다소 진정을 하자 마침내, 육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너는 내가 그렇게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보이더냐?”
“그럼…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육장로의 입꼬리가 살짝 말아 올려졌다.
“당연하다. 저 아이는 그 무공을 얻는 대신 두 가지 일을 해야만 한다. 첫째는 언젠가는 가주님과 손속을 겨뤄야만 하고 둘째는 그 대결이 끝나고 나면, 다음 대의 사혼대에게 그 무공을 돌려줘야 하는 일이다.”
대형의 고견에 팔장로는 가슴에 막혔던 그 무언가가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아…그런.”
팔장로의 얼굴이 한결 풀어지자 육장로도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야 팔장로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일이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로 남아있던 전대 사혼대님들의 숙원(宿願)도 이룰 수 있고 그들의 무공도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제, 됐는가?”
팔장로는 대형이 제시한 바가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대답했다.
“예. 대형. 그럼, 이제 저 아이에게 물어보지요.”
육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워있는 도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 일어나라.”
순간 도연의 몸이 약간 움찔! 거렸다. 도연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도연을 주시하던 육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들었겠지?”
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예.”
육장로는 자세를 한결 풀고 상체를 약간 숙였다. 도연과 눈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그럴 것이다. 네가 깨어나길 기다린 다음 말을 했으니까…”
육장로는 말끝을 흐리면서 눈부신 안광을 토해냈다. 만약에 거짓말을 했다면 성치 못했을 거라는 무언의 설명인 것이었다. 약간 눈을 감았지만 그렇다고 고개까지 돌리진 않았다. 그 모습에 육장로의 안광이 수그러들었다.
“너는 결정권이 없다. 허나, 나는 강압적인 것은 싫어한다. 결정해라. 허(許)냐. 불(不)이냐.”
결정권이 없지만 허와 불을 선택하라니…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물음이었다. 어느새 얼굴이 굳어진 도연은 무거운 어투로 질문했다.
“불(不)이라면…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