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35화
“누가 왔다고?”
동천의 질문에 소연이 조금은 흥분한 신색(身色)으로 다시 말해주었다.
“아, 글쎄. 대단한 분이 오셨다니까요?”
-따악!
“아야야…”
소연이 머리를 잡고 한 걸음 물러서자 동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분위기를 잡았다.
“너, 말야… 어떤 년이든 놈이든 누군지를 확실히 말해줘야 내가 알 거 아냐. 너 한 대 더 맞아볼래?”
동천의 주먹이 왔다 갔다 거리자 소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말씀드릴게요. 장로님들이 오셨대요.”
동천은 좀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장로? 에.. 그러니까… 곧 죽을 늙은이들?”
소연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가 보죠..”
“접견실에 있어?”
“예. 빨리 가보세요. 그분들 무서운 분들이래요.”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말에 묘한 거부감을 느낀 동천은 낮게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지깐 것들이 아무리 무서워도 나보다 더 무섭기야 하겠어? 그 늙은이들은 내가 입으로 후~하고, 불어도 바람에 날려갈 것들이야! 알겠냐?”
설마… 하는 표정을 짓다가 소연은 꿀밤을 한 대 더 맞았다.
“흑흑..! 맞아요. 이 세상에서 주인님이 제일 무서워요….”
진작 그럴 것이지.. 하는 표정으로 득의의 웃음을 짓던 동천은 아무리 그래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감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가기 싫은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보다 위에 것들을 만나러 가면 행동 하나하나에 언제나 신중(愼重)을 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에이! 짜증 나! 늙은 것들이 뭐 하러 여기엘 와? 이렇게 좋은 날에는 그냥 방구석에서 처박혀 ‘허허! 나 죽을 때 다 됐지?’ 하고 묻고, ‘그렇군. 나 먼저 가이… 꼴까닥!’ 하고 뒤지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만 되면 나 좋고, 너 좋고잖아? 으으.. 이것들 보이기만 해봐라…..”
동천은 상대를 죽일 듯이 밖으로 나갔다. 접견실은 동천의 방에서 제일 반대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천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좀 늦는다고 해도 거리가 멀어서 그랬다고 뻥을 쳐도 되고 또, 먼 거리 때문에 자신의 방에서 마음껏 욕을 해도 상대가 알아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전주가 다가오자 접견실 문을 담당하고 있던 시녀가 황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구! 오래 기다리셨….죠?”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던 동천은 어색하게 굳어지는 자신의 얼굴 근육을 감지할 수 있었다.
‘뭐, 뭐야? 다리 병신과 흰 눈깔? 이것들이 지금 나를 위협하러 온 거야 뭐야?’
자신들의 모습에 소전주가 당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안 칠장로는 멍청히 서 있는 동천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허허. 우리도 방금 왔소이다. 먼저 내 소개를 하지요. 본 장로는 십이 장로 중 일곱 번째를 맡고 있는 칠장로라 하오. 따로 이름은 없으니 그냥 칠장로라 불러 주시오.”
칠장로가 자신의 소개를 끝내자 구장로가 하얀 눈알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십이 장로 중 구장로네. 본 장로도 따로 이름이 없네. 그냥 알아서 부르게.”
동천은 그들이 자신들의 소개를 끝내자 예의상 웃어주면서 다가갔다. 그러나 예의상이라서 그런지 동천의 얼굴은 쉽사리 풀릴 생각을 안 했다. 평소 같았으면 가식적으로라도 밝게 웃어줄 수 있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게 잘 안 됐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구장로의 하얀 눈알이었다.
‘으으.. 씹탱이 늙은이가 눈깔에 분 가루를 칠했나? 왜 저따위지? 그리고 그따위 눈알이면 알아서 눈깔을 내려야 할 거 아냐? 저게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부라리는 거지? 어휴! 생각 같아서는 콱! 뽑아버리고 싶네….’
“언제까지 서 있을 겐가?”
차디찬 구장로의 물음에 동천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 하하! 앉아야죠. 그럼요…”
동천이 겁먹었다고 생각한 칠장로는 눈을 돌려 구장로에게 작은 주의를 주었다. 쓸데없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구장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명백한 거절이었지만 사실상 이런 구장로의 행동은 긍정의 표시였다. 사제가 알았다는 표시를 해주자 칠장로는 동천에게 편안한 웃음을 흘려 보내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허허.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조금은 놀랐겠지만 편안하게 생각하시오.”
칠장로를 대하자 동천은 얼굴 근육들이 서서히 풀려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런 기회를 동천이 놓칠 리가 없었다. 동천은 절대로 흰 눈깔 영감은 안 쳐다보겠다고 다짐하며 얼른 대꾸해주었다.
“아이구. 아니에요. 놀라다니요. 헤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오셨나요?”
동천의 질문에 칠장로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신색으로 말을 했다.
“실은 도연이 일 때문에 왔소이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도연이 튀어나오자 동천은 급히 반문했다. 동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도연이요?”
칠장로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런 거물들이 도연의 일로 찾아오자 동천은 또 그 녀석이 어떠한 말썽을 부려서 이들이 따지러 온 줄 알았다.
‘그 개새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평소에 눈깔 치켜들고 나한테 대들 때 그냥 처리했어야 했는데… 아아. 나의 넓고도 깊은 아량 때문에 일이 이렇게 벌어지다니….. 착한 것도 죄란 말인가..?’
앞으로는 냉정해질 땐 확실히 냉정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동천은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자신에게 최대한으로 피해가 오질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의외로 아무런 생각이 안 나자 동천은 당황해했다.
‘이럴 수가.. 이것이 나란 말인가? 기껏 이런 하찮은 문제에 직면하고도 이 위기를 벗어날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말인가? 아아.. 하늘님. 제게 힘을 주소서! 당신의 그 거룩한 능력으로 제가 이 위기에서 벗어날 지혜를 주소서…. 하늘이시여. 부탁입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평소에 급할 때만 찾는 동천을 하늘이라고 계속 봐줄 리 만무했다. 그때 동천의 귓가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 그렇게 된 거요. 알겠소이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동천은 내심 당황해했다. 그러나 구장로가 나직이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보이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지요. 헤헤! 그게 뭐 어렵겠습니까? 그럼요.. 예. 맘대로 하세요.”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자 구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칠장로의 바퀴 달린 의자를 잡았다. 칠장로는 예의를 아는지 먼저 찾아온 사람으로서 간단한 인사를 꺼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우리들은 이만 가보겠소이다. 허허.”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웃으면서 간다기에 동천은 얘기가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지들이 알아서 간다는데 동천이 이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아이구.. 벌써. 가시게요? 조금 있으면 맛있는 음식들이 올 텐데..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계시다가 가시지요.”
구장로가 물었다.
“정말인가?”
“예? 아, 예… 맛있는 게 조금만 있으면….”
동천은 예의상 해본 말인데 흰 눈깔이 정말로 알아듣자 간이 철렁! 내려앉음을 경험해야 했다.
‘설마.. 늙은이가 먹을 것 때문에 더 있다가 가진 않겠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동천은 자신의 생각에 별로 자신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사형. 그거 나오면 그거나 먹고 갈까요? 맛있다는데…”
구장로는 생긴 것답지 않게 먹을 것을 밝히는 듯했다. 다급해진 동천은 이 일에 열쇠를 쥐고 있는 칠장로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내주었다. 제발 그냥 가달라는 시선이었다. 칠장로는 그런 동천의 시선을 받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소전주가 저렇게 간절한 시선을 보내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 간단하게 요기나 하고 가자.”
‘저.. 저. 병신이…’
동천은 기가 막혔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실실 웃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그러셔야 제가 마음이 놓이거든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빨리 가서 더욱 푸짐하게 만들라고 말하고 오겠습니다.”
구장로는 기다려지는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게나.”
“그럼…”
생각과는 달리 천천히 밖으로 나온 동천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신경질이 나서 애꿎은 기물(器物)들을 발로 차며 부서버리기 시작했다.
“에이! 씨발 놈의 영감탱이들! 끼리끼리 논다더니 아주 병신들이 짝짝꿍 잘도 놀고 자빠졌네! 뭐? 먹고 갈까요? 그래 이 눈깔 병신아. 내가 니 음식에다 독을 탈 테니까 어디 잘 처먹고 뒤져 버려라! 그리고 내가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고? 지랄하네.. 지도 속으로는 처먹고 싶어서 보이지 않게 혓바닥을 돌리고 있던 자식이… 으아악! 하여튼 이 병신들 다 죽여 버릴 테다! 씨익..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