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42화
“으으… 배가 아프다.”
동천은 지금 배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동천의 상태가 딱! 그 꼴이었다. 옆에서 걸레로 가구들을 닦고 있던 소연이 동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직도 아파요? 근 열흘짼데…”
동천은 소연을 째려보며 소리쳤다.
“시끄러워!”
소연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왜 화를 내요.. 저는 걱정이 되어서 물어본 건데… 흑!”
급기야는 울음까지 터뜨렸다. 누가 질질 짜는 것을 귀찮아하는 동천은 화를 조금 줄였다.
“야! 울긴 왜 울어! 그럴 거면 나가서 울어!”
화를 줄이나 안 줄이나 하는 짓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결국 소연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더니 ‘으앙!’ 하고 울어버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리를 질렀더니 다시 위가 경련을 일으켰다.
“윽! 아야야… 씨발. 그깐 놈이 환골탈태를 하다니.. 아이구! 배 아파라!”
바로 그런 이유였다. 계면서를 가지고 온 날 저녁에 도연이 찾아왔었다. 동천은 우선 도연을 걱정하듯이 물어보았다.
<야! 너 괜찮아? 정화 아가씨가 너 안 때렸어?>
그러자 도연은 이렇게 말했다.
<맞을 짓을 하셨더군요..>
겁대가리를 상실한 도연의 대답에 동천은 우선 도연의 배를 걷어차 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때린 놈이나 맞은 놈이나 거의 같은 속도로 물러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동천이 이를 이상히 여기자 어느새 다가온 도연이 전에 일어났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제서야 동천은 그때 그 장로들이 주절거렸던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동천에게 저녁 시간만 도연을 자신들에게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러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동천은 밤잠을 설쳤다. 처음에 배에 통증이 일어났을 때에는 잠을 잘못 자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거진 열흘째 이 증상이 이어져 나가자 굉장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으아악! 너무 불공평해! 으윽! 배.. 배가…”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던 동천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쑤시는 배를 슬슬 문지르며 이 상황을 어떻게 헤치고 나가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놈이 아무리 환골탈태를 했더라도 아직 나보다는 못할 거야. 그 증거로 나는 내공이 없었는데도 걷어찼을 때 같이 물러났잖아? 그래. 아직은 내가 위야. 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란 말이야? 그 녀석이 장로 새끼들한테 무공을 배우면 분명히 언젠가는 경공술만을 배우는 나를 앞질러갈 게 뻔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끄응..! 지금 상황에서 내가 그 녀석보다 위인 것은 경공술하고… 음……’
경공술이라도 열심히 할 생각은 안 하고 다른 쪽으로만 생각하는 동천이었다. 그래도 생각한 보람은 있었는지 동천은 환하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맞아! 내가 그 자식보다 내공도 위야! 이히히! 그래. 이렇게 계속 찾다보면 녀석보다 내가 더 월등한 것이 무한대로 나올게 분명해. 히히! 또 찾아보자.”
동천이 그렇게 생각으로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소연은 자신의 방으로 울면서 달려와 침대 위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흑흑흑… 괜히 나만 가지고 그래.”
열흘 전에 자신이 도둑 취급받은 이후로 소연은 주인님이 뭐라고 핀잔만 늘어놓아도 은근히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문제였지만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조금만 꾸중을 들어도 괜스레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흑흑…”
그렇게 꽤 오랫동안 베개와 씨름을 했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서 눈가를 닦아보니 눈두덩이가 조금 부어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소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내가 요즘 왜 이러지? 주인님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잠시 주위를 환기시킨 소연은 책상 앞에서 글을 써나가는 화정이를 보았다. 자세만 보면 대단한 기품이 느껴졌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보면 형편없는 지렁이 글씨들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개중 처음에 익혔던 글자들은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었다. 그나마 그동안 수고한 소연에게 그 글자들이 위로라면 작은 위로를 해 주었다.
“화정아. 너 그래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구나? 정말로 책에 쓰여 있는 대로 글씨도 점점 익혀나가고…”
화정이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소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연이 어깨를 으쓱거려 주자 화정이는 미소로 답하였다.
“그런데. 넌 언제 말을 할 거니? 나 말야. 요즘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 주인님이 당분간은 밖으로 나가지도 말래. 그래서 수련이도 못 만나고.. 걔도 무슨 일인지 놀러도 안 와…. 흑!”
소연은 자신이 우는 것을 화정이에게 보여주기 싫었던지 그녀의 품으로 자신의 머리를 묻혔다.
“흑흑! 이게 다 그 돈 때문이야! 그 돈 때문에 주인님께 의심을 받고 난 후부터 손에 일도 잘 안 잡히고… 흑흑! 그런 건 없어졌으면 좋겠어…”
또다시 화정이에게 눈물을 뿌리고 난 소연은 이제 울기에도 힘이 부치자 조용히 떨어졌다. 슬픈 얼굴로 화정이를 올려다본 소연은 앉아 있어서 자신의 키와 동등해진 화정이의 머리를 감싸 안아 주었다. 화정이는 소연의 기분을 모르는지 마냥 좋아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연은 화정이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화정아. 너, 이 글씨 틀렸어…”
동천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자신이 도연이 보다 나은 것을 찾기가 힘이 들었다. 대충 십여 가지가 나왔는데 그건 환골탈태와 별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마침내 동천은 비장의 한 수를 꺼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은 적자생존(適者生存). 다른 말로 하면 우승열패(優勝劣敗). 음.. 간만에 문자 나왔다. 좋았어! 그렇다면 경공과 내공으로 승부 한다!”
굳게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은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내일부터…”
“좋았어! 승부는 오늘부터다!”
굳게 마음을 다지며 밖으로 나온 동천은 어느새 배의 통증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증이 없어지자 동천은 신나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히히! 하늘님도 나의 의지를 알고 계신 거죠?”
뒷마당에 나가보니 도연이 혼자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연이 그러고 있자 왠지 투지가 끓어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동천은 주먹을 다잡으며 도연에게로 걸어갔다. 도연은 동천을 일별하고는 인사를 했다.
“다 나으셨는지요.”
동천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니가 알아서 뭐하게?”
“수하 된 도리로서 물어봤습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야! 비켜! 나 수련해야 되니까.”
도연을 떠밀며 수련 장소에 다가간 동천은 간단한 기초 운동부터 하다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엥?”
동천은 도연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에 물이 없어?”
도연은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주군께서 근 보름 이상을 수련에 소홀히 하셨기 때문에 다 말라버렸습니다.”
동천은 멍하니 수련 장소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물이 단 한 방울도 존재하지 않았다. 동천은 크나큰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우째 이런 일이….’
그때서야 동천은 하늘의 뜻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씨발놈아! 니가 이것 때문에 내 배를 안 아프게 해 준 거지? 그래. 이게 내가 너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대가더냐? 너 말야! 자꾸 이딴식으로 나가면 좋을 게 없을 줄 알어. 알겠어?”
씩씩거리며 애꿎은 하늘에게 욕을 퍼부어 댄 동천은 도연에게 소리쳤다.
“야! 물통 가져와!”
심술보 때문에 지 바로 옆에 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호통을 친 동천은 도연이 군말 없이 가져다주자 거칠게 잡아채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나간 후, 근 두 시진을 왔다 갔다 하던 동천은 오랜만의 수련이라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쑤심을 느꼈다.
“헉헉.. 에구 힘들다. 이씨..! 이건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는데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평생 이곳에만 물만 붓다가 돌아가시라는 소리야?”
힘이 들고 화가 난 동천은 들고 있던 물통을 집어던졌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더욱 획기적으로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에 빠졌다.
“이런 걸로는 도연이를 따돌리기가 힘들어.. 뭔가.. 뭔가가….”
결국에는 생각나는 게 없어서 수련을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하면서 동천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자 수련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어느 때는 하마터면 딴 길로 새어나가서 길을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자 도연이 다가와 말했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보던지 말던지….”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뵙든지 말든지….”
모든 것을 대충대충 넘겨버린 동천은 여전히 획기적인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동천은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엣취! 어.. 시원타. 응? 뭐야? 왜 갑자기 날이 어두워진 거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본 동천은 곧이어 자신이 너무 생각에만 잠겨 있던 나머지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모른 채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에이씨! 이 자식이 의리 없게 그냥 가? 싸가지 없는 놈…”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동천이 의리를 찾아대자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동천을 비웃듯 소리를 질러대며 날아갔다.
“까아아-악… 까악….”
“이게 어디서 재수 없게 울고 자빠졌어?”
동천은 화가 나서 날아가는 까마귀에게 돌을 던져댔다. 그러나 그게 맞을 턱이 없었다. 안 그래도 팔이 아파왔는데 거기에다가 무리하게 힘을 써대자 통증이 느껴졌다. 제 몸 귀한 것은 아는지 동천은 돌 던지기를 멈추었다.
“저런 미물(微物)까지 나를 비웃다니… 휴우.”
나직이 한숨을 내쉰 동천은 풀이 죽은 얼굴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야! 이 까만 새꺄! 너 이리 안 와? 너 잡히면 죽는다!”
동천은 흥분해서 까마귀를 좇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