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43화
“거기 서라고 했지! 거기 서!”
어느새 밤하늘 사이로 자취를 감춰버린 까마귀를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천은 여러 가지 화가 나는 일이 겹치자 말도 안 되는 오기를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일관된 자세가 부족한 동천은 하도 달려서 옆구리가 결려오자 뜀박질을 멈추고 찬찬히 숨을 골랐다. 시원한 밤바람이 동천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동천의 오기도 그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기 시작했다.
“잡아서 족쳐야 하는데….”
그래도 아직은 미련이 남는 듯했다. 까마귀가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천은 약간의 갈등을 겪은 끝에 결단을 내렸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결국은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은 동천은 아무 방에나 들어가서 사람을 끌고 나와 자신의 처소로 안내하게 했다.
“배고프셨죠? 드세요.”
“우걱! 우걱!”
소연이 대령한 음식을 쉴 새 없이 집어먹던 동천은 곁눈질로 소연을 흘겨보았다.
“야! 넌 왜 안 먹냐?”
소연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별로 입맛이 없어요.”
동천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칫! 배때기가 불렀구만? 처먹기 싫으면 말어.”
소연에게 관심을 끊고 다시 먹을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동천은 갑자기 밥맛이 떨어졌다. 소연이 때문이었다.
“야! 왜 또 질질 짜는 거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도대체 왜 그래? 이유나 알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던 소연은 주인님이 다그치자 고개를 가로로 저어댔다.
“그냥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요….. 저, 이만 가볼게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소연은 침대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화정이를 보았다. 요새 정신이 없어서, 밥을 먹는데 화정이를 놓고 갔던 것이었다. 소연이는 그런 화정이에게 미안함을 가졌다.
“배고프지..?”
화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연이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 잠깐만 기다려. 내가 남은 음식을 가져올게.”
나가서 몇 가지 먹을 것을 가져온 소연은 화정이에게 그것을 주었다. 화정이는 습관이 배였는지 음식이 앞에 놓여지자 거리낌 없이 집어먹었다. 소연이는 그런 화정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안해. 다음부터는… 다음부터는…… 흑흑! 화정아…”
소연은 잘 먹고 있는 화정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녀는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려대며 울먹였다.
“흑흑! 이게 다 그 돈 때문이야! 그 돈 때문에 주인님께 의심을 받고 난 후부터 손에 일도 잘 안 잡히고… 흑흑! 그런 건 없어졌으면 좋겠어…”
의외로 끈질긴 소연이었다.
“아하암..! 오랜만에 수련을 좀 했더니 고단하다. 야! 화정아. 자자.”
소연이 몫까지 다 먹어치워서 배가 땡땡해진 동천은 침대로 가서 누웠다. 화정이는 늘 그렇듯 동천과 눈을 맞추며 옆자리에 같이 누웠다. 화정이가 눕자 동천은 그녀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고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소연이한테 많이 배웠냐?”
“씨익..”
“야, 너도 이제 말을 할 때가 되지 않았냐? 넌 답답하지도 않냐? 아아.. 그래 알았어. 때 되면 할 거라고?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리 잠이나 자자.”
평소 같았으면 조금 더 만지작거리다가 잠이 들었겠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힘든 일을 해서 그런지 몸이 나른하고 절로 눈이 감겨왔다. 동천은 내려오는 눈꺼풀을 재빨리 닫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까만 새끼.. 죽여버려…..”
꿈에서라도 잡아서 족치려는 듯 동천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잠이 들었다. 화정이도 따라서 눈을 감았다. 일각도 못 되어 완전히 잠에 빠진 동천은 헤어날 줄 모르는 꿈나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화정이는 자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는다고 다 자는 게 아니듯이 화정이도 잠을 자는 게 아니었다. 화정이는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아니, 잠이 들지 못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한 소리였다. 요 며칠 동안 그녀의 귓가를 맴도는 흐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흑! 이게 다 그 돈 때문이야! 그 돈 때문에 주인님께 의심을 받고 난 후부터 손에 일도 잘 안 잡히고… 흑흑! 그런 건 없어졌으면 좋겠어…’
화정이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흑흑! 그런 건 없어졌으면 좋겠어…’
다시 눈을 떴다.
“…….”
초점 없는 눈으로 한동안 동천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던 화정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을 거세게 쥐고 있는 동천의 손 때문이었다. 하는 수없이 그녀는 다시 누워야 했다. 그렇게 한 시진이 흘렀을까? 마침내 동천이 쥐고 있던 가슴에서 힘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이히히! 이 새끼…. 잡았다….. 음냐.”
동천이 몸을 반대로 돌리자 그녀의 가슴속에 묻혀있던 손이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이제 자신을 방해하는 요소가 사라지자 화정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스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한 곳을 향해 다가갔다. 삼단 서랍장이었다. 그중 두 번째 서랍으로 손을 가져간 화정이는 그곳에서 작지만 두툼한 주머니 하나를 꺼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돌려보던 화정이는 한가지 벽에 부딪히고야 말았다. 이제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
그녀는 또 다른 주인인 소연이의 울먹임을 되새겨보았다.
‘없어졌으면… 없어졌으면……’
화정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없어진다의 뜻이 무얼까?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화정이는 손에 힘을 뺐다.
“툭..!”
돈주머니가 무의미하게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그녀는 멀거니 그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화정이는 고개를 숙여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 돈주머니를 풀어보았다. 안에는 동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두컴컴한 방안이라서 그런지 동그랗고 까만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화정이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보았다.
“꾸욱…”
간단하게 찌그러졌다. 이건가? 라고 생각한 화정이는 하나하나 꺼내 들어서 동전들을 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기고 난 동전들은 미련 없이 바닥에다 던져버렸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작을 군말 없이 해내는 화정이의 주위에 반으로 접혀진 동전들이 여기저기 쌓여가기 시작했다.
“땡그랑…”
이미 떨어져 있는 동전 위에 또 다른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끝으로 화정이의 모든 작업이 끝을 맺게 되었다. 일이 다 끝이 나자 화정이는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다 된 건가? 이게 없어진다는 의미일까?
“…….”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라는 생각이 미치자 화정이는 동전들을 다시 주워 담기 시작했다.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담아버린 화정이는 그것들을 원래의 자리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결론이 나질 않자 화정이는 없어진다는 의미를 확실히 알아낸 다음. 그때, 일을 끝마치기로 했다. 화정이는 대자로 누워서 자고 있는 동천에게 다가가 동천을 품에 안았다. 자연스럽게 동천의 손이 화정이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약간 몸을 비틀던 그녀는 곧이어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잠이 잘 올 것만 같았다.
“랄라랄라~! 내 사랑스러운 돈들아. 어디 좀 보자.”
요즘 동천이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예전에 벌어들인(?) 돈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돈을 본다는 생각이 들자 도연이의 생각은 쥐뿔도 나질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서랍 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든 동천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한가득 움켜잡았다.
“오오…! 나의 사랑 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동천은 얼른 동전들을 꺼내보았다.
“으아악? 이게 뭐.. 뭐야? 이것들이 왜 이러지?”
자로 잰 듯 정확히 반으로 딱 접혀진 동전들을 접한 동천은 당혹감을 뛰어넘어 황당함에 접어들어 있었다. 동천은 혹시, 꿈이 아닌가 해서 눈을 비벼보았다. 그리고 다시 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동천은 그래도 못 믿겠는지 들고 있던 동전들을 툭툭, 쳐댔다.
“야. 동전들아. 야.. 정신 차려! 넌 그 모습이 아니었잖아…”
그런다고 무생물인 동전이 대답을 해줄 리가 만무했다. 어이가 없어진 동천은 신경질을 내며 동전을 던져버렸다.
“이런 썅!”
-좌르르르….!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어서 바닥에 쏟아부어 댄 동천은 하나라도 건지려는 듯 꼼꼼히 살펴댔다.
“으으.. 제발. 하나만이라도 건지자… 하나만이라도…. 제길. 이것도 아니고…”
동천이 정신없이 온전한 동전들을 찾고 있을 때 동전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인 화정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인님이 하는 짓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주인님은 어제 자신이 접어 논 물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더니 그것들을 한곳으로 모아놓고 있었다.
“…….”
아아… 저것이 없앤다는 의미구나.. 주인님의 행동으로 그제서야 없앤다는 의미를 알아낸 화정이는 자신도 주인님을 거들어 주기로 했다.
“응?”
절망 어린 심정으로 동전을 구별하던 동천은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화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동천은 미련 없이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씨발.. 이것도 아니고…”
동천은 구겨진 동전을 옆으로 던졌다. 그렇게 끊임없이 동전들을 구별하던 동천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라? 동전이 줄어들지 않네?’
바로 그런 생각이었다. 아니겠지.. 하는 마음에 계속 동전을 살펴보던 동천은 얼마 안 가 두려움을 느꼈다.
‘안 줄어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