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44화
떨리는 손으로 하나의 동전을 집어든 동천은 조심스레 옆에다가 옮겨다 놓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으아아아… 설마, 귀신(鬼神)이?’
무서워진 동천이 귀신을 생각하고 있을 때, 동천이 놓아둔 동전을 집는 하나의 고운 손이 있었다. 고운 손은 그 동전을 집어서 동천의 앞에다가 슬며시 놓아두었다. 손의 임자는 동천과 눈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냈다.
“씨익…”
동천은 기가 막혔다.
“씨익? 너, 지금 웃었냐? 아우~! 열 받아! 이걸 칠 수도 없고..”
화정이를 때릴 수가 없었던 동천은 분풀이를 못하자 은근히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끄응… 참자. 그래.. 내가 착해서 참는다. 그건 그렇고….. 에휴.”
안타까운 눈으로 구겨진 동전들을 바라보던 동천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화정이에게 명했다.
“야. 너 쓸데없는 짓이나 하지 말고, 이거나 갖다 버려.”
고개를 끄덕인 화정이는 동전 하나를 집어서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한 냥을 갖다 버렸다. 그리고 또 돌아와서…
“어휴! 이 돌대가리야! 한꺼번에 가져다가 버려!”
결국에는 동천의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모두 긁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동전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는 듯 동천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때 소연이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들어왔다.
“밥.. 차릴까요?”
아무리 거금을 잃어버렸어도 그거는 그거고 밥은 밥이었다.
“당연한 소릴 하냐? 가져와.”
상을 들여와 탁자에 음식들을 올려놓던 소연은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으으.. 으드득! 아작! 아그작! 씨부럴… 아드드-득!”
음식에다가 분풀이를 하듯 식사를 하는 동천이 이상해 보였는지 소연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쾅!
갑작스레 탁자를 내려친 동천은 단단한 뼈다귀를 씹어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냥, 처먹어. 나 지금 돈 다 날려서 기분이 안 좋으니까. 으드득!”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던 소연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동천을 보았다. 소연의 시선이 느껴지는 게 좀 그랬던지 동천은 입 속의 뼈다귀를 빼내며 소리쳤다.
“내가 번 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고! 됐냐? 됐어?”
“예에.. 아, 알겠어요.”
겁에 질린 소연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돈이 없어졌다고? 정말로? 어떻게?’
또다시 소연의 눈초리에 얼굴이 따가워지자 동천은 아예 밥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동전들이 반으로 접혀 있더라! 됐냐? 됐어? 나 이제 밥 먹어도 돼?”
지가 먹겠다는데 여기에서 말릴 자가 어디 있겠는가. 소연이 시선을 내리깔자 동천은 그제서야 식사에 열중했다. 조금 후에 소연이 밍기적거리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소연은 친절하게도 동천에게 먹을 것을 디밀어 주었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동천은 별꼴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소연을 빤히 보았다. 무안해진 소연은 화정이에게도 먹을 것을 주었다. 확실히 예전의 소연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강 아저씨에게 주워 들은 적이 있었던 동천은 소연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너 말야.. 혹시, 그날이었냐?”
소연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예? 그.. 그날이요?”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재차 말했다.
“여자들은 그날이면 신경이 예민해진다던가.. 하여튼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고 하더라? 너도 그런 거였냐?”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소연은 지긋이 긍정을 표했다. 그 모습에 낮게 코웃음을 친 동천은 화정이의 얼굴에 묻어있는 밥풀을 떼어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다 지나갔냐?”
“예에…”
할말을 다 했는지 동천은 다시 먹을 것에만 집중을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어대는 소연의 입술이 희미하게 웃어대고 있었다. 식사를 다 마친 소연은 밖으로 나와 싱긋! 웃었다.
“와아… 날씨 참 맑다. 호호호!”
가슴에 얹혔던 게 쑤욱!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던 소연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소연은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날? 그날이 뭐지?’
소연도 그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뭐,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때에 그것 가지고 신경쓰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화정아~! 우리, 공부하러 가자!”
문 밖에서 소연이가 부르자 화정이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천은 그녀가 나가건 말건 그냥 두었다. 배가 불러서 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고개를 젖혔다.
“아아…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사부님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시고 계실까. 이 착실한 제자를 생각하고 계실까? 아니면 이 뛰어난 제자를 생각하고 계실까? 아니면…”
잠시 사부를 생각하던 동천은 얼마 안 가 꾸벅, 꾸벅.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동천의 달콤한 잠은 의자가 뒤로 넘어가서야 끝을 맺었다.
-콰당..!
“으아악! 잘못했어요! 잘못… 뭐야?”
아직 세가에서 미미에게 맞던 버릇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동천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행동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동천은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불고 있어…”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짐작건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인 것 같았다.
잠에서도 깨어났고 수련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어진 동천은 왜 도연이 안 찾아오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쫄랑쫄랑 기어와서는 자신에게 그 묵뚝뚝한 얼굴을 디밀었을 텐데 막상, 그런 일이 없어지자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었다.
“수련장에 한번 가봐야겠다. 가서 몰래 지켜본 다음 그녀석이 없으면 직무유기로 내공을 폐쇄한 다음에 사지 근맥을 홀딱 잘라서 똥통 청소나 시키는 거야. 어때? 그럴싸하지 않아? 히히히!”
지 혼자 말해놓고 중얼거리던 동천은 서둘러 수련장으로 달려갔다. 꺾어지는 모서리 부분에서 걸음을 멈춘 동천은 살짝 고개를 내밀어 뒷마당을 살펴보았다.
“씨발…”
동천의 중얼거림을 보아하니 그곳에 도연이 있는 것 같았다. 도연은 여전히 목검을 들고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동천이 보기에는 눈꼴이 시릴 정도였다. 동천은 잔뜩 불은 얼굴을 하고는 도연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야. 너 여기서 뭐 하는 짓이야? 이곳에 왔으면 빨리 나를 부르러 왔어야 하잖아!”
도연은 동천이 걷어찼건만 별다른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동천은 그게 더 수상해 보였다. 도연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 문제는 이제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주군께서 오시리라 믿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제 믿음대로 주군께서 이렇게 오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연의 대답은 분명히 아부가 아니었다. 진실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동천에게는 아부로 들렸다.
“이히히! 그러냐? 험험. 그건 당연한 거다. 대 암흑마교 약왕전의 소전주인 내가 어찌 수련을 빼먹겠느냐! 내 어서 수련을 시작해야겠구나!”
신이 나서 물통을 들고 우물가로 달려가던 동천은 어째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꼭,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수련에 몰두했다. 진이 다 빠질 정도로 물통을 나르던 동천은 떨림을 주체 못 하는 팔을 들어 수련장에 물을 부었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동천이 드러눕자. 목검을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던 도연이 자세를 풀고는 수건과 물통을 들고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점심이 다 됐으니, 식사를 하시고 한 시진 정도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도연이 건네준 물통을 잽싸게 잡아챈 동천은 통 안이 다 빌 정도로 다 마셔버린 후에 가쁜 숨을 내뱉었다.
“푸하아―! 헉헉… 밥이고 지랄이고, 나 죽겠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동천에게 도연이 물었다.
“제가 업어다 드릴까요?”
사나이 체면에 그럴 수는 없었다. 동천은 코웃음을 친 다음 매몰차게 거부했다.
“됐어, 임마! 내가 다리 병신이냐? 웃기는 소리 말어!”
“알겠습니다. 저도 식사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도연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 나가자 동천은 빌빌대며 일어났다. 흔들리는 한쪽 다리를 손으로 잡아챈 동천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야, 임마!”
저 멀리서 도연이 고개를 돌리자 동천은 약간 비웃음을 보이며 한 걸음 내디뎠다.
“업어 줘!”
그 말을 끝으로 동천은 바닥으로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