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46화
넘어진 하녀를 일으켜주던 소연은 주인님이 부르자 마지못해 따라갔다. 길을 걸어가면서 동천은 소연을 보았다. 그녀는 약간 기가 죽어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천은 그런 소연을 보고 넌지시 물었다.
“아까 일 때문에 그러냐?”
“예.”
소연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동천은 신형을 멈추었다.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시무룩한 소연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 아까 걔는 말야. 멀리서 나를 보고 잠시 주춤했었어. 그리고 눈깔을 내려 깔았지. 그건 한마디로 나하고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얘기야. 그래서 내가 약한 벌을 내려준 것뿐이야. 알겠어? 걔가 남자였으면 아주 죽~였어.”
주인님의 말씀을 곰곰이 들어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평소의 주인님 성깔로 볼 때 그 정도면 정말로 많이 참는 거였기 때문이었다. 소연은 수줍게 웃었다.
“알겠어요.”
동천도 웃었다.
‘하여간 얘는 속이기 참 쉽단 말야? 히히히히!’
동천이 그것 가지고 쓸데없이 다리를 걸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건 동천이 신이나 있을 때 충분히 넘겨줄 수 있는 문제였다. 다만, 지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모르면서 자신을 붙잡고(?) 시간을 끌었다는 데에서 화가 나 다리를 건 것이었다. 하여간 별종인 놈이었다.
“좋아. 어서 가보자. 내가 알기로는 약제실이 동쪽에 있다고 했어.”
소연이 물었다.
“정말요?”
못 믿겠다는 소연의 시선에 동천은 어이가 없었다.
“나 참. 내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어갔겠냐?”
어이가 없기는 소연도 마찬가지였다.
“그치만, 이쪽은 서쪽인데요…”
“…….”
한동안 소연을 바라보던 동천은 곧이어 손바닥을 내리치더니 뭔가 생각이 났다는 행동을 보였다.
“아아.. 그랬지? 짜식. 너 잘도 아는구나. 하지만 말야. 이 길로 조금만 가다가 샛길로 빠지면 동쪽으로 가는 길이 있어. 히히! 내가 그래서 이쪽으로 가고 있던 것뿐이야.”
동천이 알아서 둘러쳤건만 소연의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이쪽은 샛길이 없어요….”
마침내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없어지자 동천은 막무가내로 나갔다.
“이씨…! 있어! 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따라와!”
그쪽으로 가면 점점 가는 길과 멀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소연이 따라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동천을 말렸다.
“주인님. 거기에는 샛길이 없어요. 없다니깐요? 우리 그냥 되돌아가요. 그러면 되잖아요. 예?”
동천은 자신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소연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이거 놔! 난 이리로 간다니까?”
중심축이 뒤로 쏠려있을 때 동천이 뿌리치자 소연은 뒤로 넘어갔다.
“아앗..!”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소연은 천천히 치마를 털며 일어나더니 다시 한번 동천을 설득시켰다.
“주인님…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냥 돌아가요.”
자기가 잘못했다고까지 하는데 동천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동천은 마지못해 돌아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할 말은 마저 해야만 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저 앞길에 샛길이 있어.”
“네. 네. 제가 뭘 몰랐나 봐요.”
동천은 씨익.. 웃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가자. 히히!”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할 불상사를 넘기게 된 소연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말로 기쁘게 동천을 뒤쫓아갔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원점으로 돌아온 동천은 소연에게 그럴싸한 의견을 제시했다.
“내가 말야. 좀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것은 늙은 인간일 것 같아. 아무래도 늙은 것들이 여기에서 오래 살아서 약제실을 알고 있지 않을까? 안 그래?”
오랜만에 의견다운 의견을 접한 소연은 놀라며 그 의견에 찬성했다.
“와아..!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동천은 자신은 천재일 거라는 생각을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도연이 자식보다 더 나은 것을 또 하나 찾았어. 난 천재였어. 그 녀석은 똘아이고.. 흐흐. 이것으로 내가 그 녀석보다 더 나은 점을 하나 더 찾게 된 것인가? 혹시, 이러다 나의 숨은 재능까지 드러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아아.. 내 자신이 너무 두렵다.’
혼자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동천은 누군가가 자신을 흔드는 것을 끝으로 그 나래를 접었다.
“주인님. 빨리 가야죠. 이러다가 해 저물겠어요.”
“응? 아, 그래. 좋았어. 어서 늙은 할아범을 찾아보자고.”
“예.”
동쪽으로 무작정 걸어가면서 늙은이를 찾아다니던 두 사람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는지 그들은 지붕 위에서 서까래를 교체하던 늙은 노인을 찾을 수가 있었다. 소연은 기쁜 마음에 그리로 쪼르르.. 달려가 노인을 불렀다.
“할아버지!”
지붕 위의 노인은 밑에서 모기만 한 소리가 들려오자 그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그마한 꼬마들 둘이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귀여운 여자아이와 좀 싸가지 없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애새끼.. 이렇게 둘이었다. 올해로 예순일곱인 홍칠(弘七)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그래 아이야. 무슨 일이냐?”
소연은 노인이 자신 쪽을 내려다보자 손을 흔들어주며 물었다.
“저기, 약제실은 어디로 가야 하죠?”
홍칠은 잘 안 들리는 듯 고개를 한껏 숙이고 반문했다.
“뭐라고? 박제실(剝製室)?”
소연은 엉뚱한 대답이 들려오자 아니라고 고개를 휙휙 젓더니 조금 더 크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요. 약! 제! 실! 이요!”
아까보다 큰 소리가 효험을 봤는지 홍칠은 허허롭게 웃었다.
“오오.. 그래. 나 약 잘 먹는다. 허허! 어린것이 기특하기도 하지.”
기특하다는 소리에 멋쩍게 머리를 긁던 소연은 곧이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답답해했다. 옆에서 이를 다 지켜보고 있던 동천은 소연이보다 더 답답한 마음에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저, 영감탱이가 맛이 갔나… 이봐! 약제실이 어디냐고!”
그래도 욕은 알아듣는지 홍칠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홍칠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펄쩍 뛰며 동천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저. 저, 고얀 놈을 봤나? 이놈! 네놈은 애비. 할애비도 없느냐? 감히 누구더러 반말을 해대느냐?”
입에 거품까지 물어대며 길길이 날뛰는 늙은이의 발악이 동천에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이봐! 영감! 죽고 싶어? 어디다가 삿대질이야?”
홍칠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여.. 영감? 내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내 성깔 더러운 소전주 소문은 들었다만 네놈은 그 소전주 보다 더한 놈 같구나! 이놈! 너 거기에 가만히 있어라!”
세상에 지 욕하는 소릴 듣고 가만히 있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게 더군다나 동천일 경우에는….
“뭐?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내가 성격이 나쁘다고 그래? 누구야! 엉? 누구냐고!”
어찌나 동천의 목소리가 컸는지 귀가 나쁜 홍칠조차 다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싸가지가 더럽게도 없는 꼬마 자식을 줘패려던 홍칠의 몸은 굳어버린 것도 그때를 맞춰서였다.
‘저.. 저 꼬마 자식.. 분이 소, 소전주라고?’
홍칠은 지붕 위에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왜 하필… 왜 하필 이럴 때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의 해맑은 얼굴이 떠오르는 것일까? 홍칠은 그들의 모가지가 하나하나씩 댕겅! 잘려지는 것을 상상했다.
“허-억?”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던 홍칠은 곧이어 흰자위를 보이며 지붕 위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홍칠의 신형이 처마 끝에서 약간 튕겨지며 떨어져 내리자 겁에 질린 소연은 짧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꺄-악!”
“에이, 씨발!”
동천은 홍칠에게 얼른 몸을 날렸다. 그러나 거리가 약간 짧은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발을 놀린 동천은 경공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힐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과했는지 동천의 신형이 홍칠의 낙하 지점을 지나고야 말았다.
“꺄-악!”
동천은 이 일이 무사히 끝나면 저 지지배의 주둥이를 한 대 쳐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될까보냐?”
바로 앞에 보이는 벽을 내친 동천은 그 탄력을 바탕으로 뒤로 물러서 홍칠을 무사히 받아낼 수가 있었다. 동천은 홍칠을 안은 그 자세로 뒤로 넘어졌다.
“흐윽.. 흐으으… 흐윽.”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가쁜 홍칠의 숨결이 동천의 숨통을 자극했다.
“케엑! 콜록, 콜록! 이 영감 도대체 오늘 뭘 처먹은 거지? 아주 썩은 냄새가… 으악! 이 영감. 침 떨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