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47화
홍칠의 입에서 거품 섞인 침이 질질 흘러내리자 동천은 재빨리 홍칠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밑으로 하강하던 홍칠의 침이 작은 곡선을 그리며 홍칠을 따라갔다.
“헉헉..! 저 늙은이가 죽~을려고!”
엄청 당황했던 동천은 한차례 위기가 무사히 넘어가자 이마를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벌 떨고 있던 소연은 일이 잘 해결된 것을 보고 동천에게 다가왔다.
“사..살았어요?”
동천은 대답 대신 소연의 위아래 입술을 한꺼번에 잡아채서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아아아! 주, 주인아….! 아, 아….”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소연이 고통스러워하자 동천은 그제야 소연의 입술을 놔주었다. 그리곤 호통을 쳤다.
“너 때문에 귀가 따가워서 혼났잖아!”
소연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죄..죄송해요. 그게 일부러 지른 게 아니라…”
동천은 쉽게 화가 가라앉지 않는 듯 소연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게 소리 지른 거 차원이냐? 아주 발악을 하던데?”
소연은 고개를 숙이고 울먹였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소연을 너무 몰아붙였다고 생각한 동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화를 풀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다음부터는 조심하면 되는 거야.”
“정말요..?”
“히히! 넌 속고만 살았냐?”
소연은 눈물을 닦아내며 밝게 웃었다.
“헤헤헤…”
“야~! 너 웃으니까 정말 예쁘다!”
다분히 분위기를 띄워주는 주인님의 말이었지만 그래도 소연이는 기분이 좋았다. 예쁘다는 데에는 그녀도 배겨날 재주가 없었다.
“뭘요…”
“정말이라니까?”
“아이 참…!”
둘이 그러고 있는 동안 홍칠의 가쁜 숨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끼릭.. 끼리릭-!
어디에선가 거친 마찰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찰음의 주인공은 의자였다. 그것도 좀 특이한 바퀴 달린 의자였다. 정상인이라면 심심풀이가 아니고서야 끌고 다닐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내의 손이 바퀴를 밀어냈다. 의자의 목적지는 낡은 문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내 텅 빈 공간이 메꾸어졌다. 그곳은 약재 기구들이 여기저기 가지런히 놓여있는 제조실이었다.
-끼리릭…
그가 손으로 바퀴를 밀자 다시금 거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조실로 들어온 사내는 먼지가 나직이 쌓여있는 약탕기를 집어들었다. 주위가 폐쇄된 탓인지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사내는 약탕기의 먼지를 털어냈다.
“…….”
-끼릭.. 끼릭…!
다시 자리를 옮긴 사내는 바닥에 떨어진 녹슨 집게를 주워들었다. 사내는 집게의 끝 부분을 비벼보았다. 붉은 쇳가루가 잘게 부서지며 흩날렸다. 사내는 웃었다. 그것이 만족의 웃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웃음을 풀지 않았다.
“그대로군….”
아마도 이 사내가 오래된 이곳을 찾아온 것은 옛일을 떠올리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오 년 만인가?”
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저곳에 거미줄들이 서로들 다투며 쳐져 있었다. 개중에 임자가 있는 거미줄은 얼마 없는 듯했다. 이곳은 활기(活氣)가 없었다. 그래도 사내는 좋았다.
“시간에 비해 다른 것들은 너무도 빠르게 잊혀져 가는구나…”
한탄 섞인 심중을 드러낸 사내는 눈을 감고 조용히 자신만의 추억에 빠져버렸다. 그는 그 추억에서 쉽게 빠져 나오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 이리로…!”
신 의원은 동천이 모셔온(?) 환자를 재빨리 자리에 눕혔다. 새파란 몰골로 기절해 있는 홍칠의 진맥을 잡아본 신 의원은 홍칠에게 침을 몇 대 놔주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내일 해 뜨는 장면을 못 볼 뻔했습니다.”
홍칠이 내일 해를 보던 말던, 그건 동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만 동천이 신경을 쓰는 건 약제실의 행방이었다.
“영감은 영감이고 나는 나니까, 약제실이 어디야?”
약간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소전주가 물어보는 요지가 약제실이자 신 의원은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
“바로, 옆인데요…”
신 의원의 대답에 제일 기쁜 것은 소연이었다.
“어머? 정말요? 와아.. 다행이다.”
동천도 기뻤지만 소연에게 선수를 빼앗긴 탓인지 뚱한 표정을 보였다. 동천은 소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
아까는 정신없이 홍칠을 업고 와서(물론, 동천이 업었을 리가 없다.) 못 봤는데 여유 있는 지금에야 보니, 확실히 약제실이라고 쓰여 있는 묵빛 현판이 보였다. 동천과 소연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소전주가 이곳에 왔다는 보고를 받은 제주(劑主)는 혹시나 해서 나와 있다가 동천이 약제실로 들어오자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전주님.”
상대편의 깍듯한 인사를 흐뭇하게 받아들인 동천은 중간 단계를 과감히 생략하고 자신이 여기에 찾아온 이유를 꺼내들었다.
“산삼(山蔘)있지?”
“예?”
“아, 산삼 있냐고.”
제주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있기는 한데 몇 년 산을…”
동천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제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 예. 물론 있습니다. 십년산은 널려 있습니다.”
제주의 이야기에 동천의 검지 손가락이 좌우로 찬찬히 흔들렸다.
“넌, 내가 고작 십 년짜리 도라지를 드시려고 찾아온 줄 아냐?”
눈치 빠른 제주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찌 소전주님께서 고작 십년산을 드시겠습니까? 헤헤. 그럼, 백년산을….”
“그래. 있지?”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소전주라도 줄 수 있는 산삼이 아니었다. 이미 임자가 있었던 것이다. 소전주의 성질을 뻔히 알고 있는 제주는 최대한으로 굽실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 뿌리가 있기는 한데… 그건 소교주님께서 미리 예약해 놓으셔서…”
동천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뭐? 소교주?…..님꺼?”
한순간 소전주가 소교주님과 맞먹으려는 줄 알고 내심 긴장하고 있던 제주는 소전주의 끝말에 ‘님’ 자가 들어가자 그제야 긴장을 풀어헤쳤다.
“예. 그리고 원래 약재를 원하시면 약재창고(藥材倉庫)로 가셔야 합니다.”
제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눌한 말투가 동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소교주……님께서 미리 예약을 해놨다… 이거지?”
다분히 시비조로 동천이 물어보자 제주는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저야, 약왕전에서 밥을 빌어먹고 사니 당연히 소전주님께 그 산삼을 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상대가 교주님의 단 하나뿐인 자제(子弟)이신 소교주님이라…. 이해해 주십시오.”
동천이 고개를 끄덕여주었으나 주둥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똑같이 ‘소’자로 시작하고 ‘주’자로 끝나는데, 단지 가운데의 ‘교’자와 ‘전’자의 차이 때문에 나는 안된다… 이거지?”
옆에서 이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소연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재빠르게 나서서 제주에게 물어보았다.
“약재창고요? 그런데도 있어요?”
안 그래도 소전주가 불안하게 행동을 해서 속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었던 제주는 하나의 돌파구가 마련되자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주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소연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단다. 여기는 한약과 단약을 제조하는 곳이고, 약재창고는 말 그대로 약재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란다. 여기에서 멀지도 않지. 이곳 약제실을 돌아서 나가면 금방 보일게다.”
제주의 설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소연이 동천의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주인님. 얼른 가봐요. 거기에는 분명히 산삼이 있을 거예요.”
“…….”
동천은 아무 말 없이 소연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그러나 동천의 살기 어린 눈빛은 제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 산삼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진 모양이었다. 그 눈빛은 동천이 사라지는 내내 제주의 망막을 시리게 했다. 마침내 소전주가 문밖으로 나가자 제주는 흘러내리는 진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휴우.. 꼬마 새끼 비위 맞추기도 되게 힘드네…”
약제실을 나와 제주의 설명대로 빙 돌아서 약재창고에 찾아간 동천은 역시 굽실거리는 창고지기에게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아까 전의 일로 성질이 더러워졌는지 창고지기를 째려보며 은근슬쩍 주먹을 쓰다듬었다.
“있어?”
창고지기는 굽실거리며 말했다.
“그러면요. 여기가 대 암흑마교를 대표하는 약재창고인데 고작 백년근 산삼 한 뿌리가 없겠습니까요? 헤헤. 바로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동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었다.
“히히! 그래? 그러면 어서 가져와 봐.”
“예. 예.”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사라진 창고지기는 얼마 안 돼서 작은 상자에 산삼 한 뿌리를 담아 가져왔다. 산삼을 받아든 동천은 끝 뿌리를 잘라서 잘근! 씹어보았다. 예전에 맛보았던 산삼과 맛이 일치했다. 동천은 그 산삼을 품에 넣고 난 후 말했다.
“두 개 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