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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49화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서 한껏 폼을 잡고있던 동천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돌연 웃어대기 시작했다.

“후후후. 푸히히히! 좋아. 좋아. 야. 다 챙겼냐?”

동천의 물음에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근데, 여지껏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야 가셔도 돼요? 보름의 기한을 잡아 놓으신 날로부터 구일이 지났는데…”

동천은 소연을 쏘아보았다.

“불만 있냐?”

그 무슨 소리냐는 듯 소연은 정색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는 아무런 불만도 없어요.”

“없으면 됐고. 자. 봐봐. 확실하게 챙겼나 좀 봐야겠다.”

주인님의 명령에 소연은 챙겨 둔 봇짐을 풀었다.

“보세요. 빠진 것은 없을 거예요.”

동천은 안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서 확인해보았다.

“군만두 삼인분. 닭 무침 삼인분. 사슴 뒷다리 고기 삼인분. 자라 보양탕 삼인분. 박쥐 날개 튀김 삼인분.. 삼인분….”

순 먹는 것뿐이었다. 이 어른만 한 보따리의 용도는 동천의 점심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세어대던 동천은 순간 눈을 번뜩였다.

“응? 어째서 새우 볶음밥이 없지?”

소연은 너무 놀라서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수십 가지나 되는 그 많은 요리 중에서 그것을 생각해 내다니….

“아, 그것은 화정이가…”

막상 말을 꺼냈는데 뒤에 할 말이 없었다. 소연이 대답을 못하고 미적거릴 때 답답해진 동천이 소리쳤다.

“화정이가 뭐! 걔가 그것을 처먹기라도 했다는 소리야?”

“예? 예. 그래요. 걔가 처먹었… 먹었어요.”

아무래도 소연의 행동이 수상쩍었다. 동천은 가자미눈을 뜨고 어쩔 줄을 모르는 소연을 한동안 주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화정이를 불렀다.

“야. 화정아. 이리 와봐.”

화정이가 동천의 부름에 다가오자 소연이는 두 손을 꼭, 쥐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둘을 지켜보았다.

‘화정아. 잘해줘. 알았지? 제발….’

사실 새우 볶음밥이 없는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볶음밥에서 퍼지는 향기가 하도 기가 막혀 몰래 한술 떠먹었던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일인분을 후딱 해치웠던 것이다. 다 먹고 난 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소연은 급히 주방장 아저씨께 달려가 새우 볶음밥 일인분을 추가시켰다. 그러나 그 분량이 다였던 주방장은 울상을 지으며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사실을 알지 못하는 주방장은 그저 소전주님께 잘 좀 말씀을 드려달라고 소연에게 되려 빌었다. 미안해진 소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돌아왔다. 고민에 빠졌던 소연은 머리를 싸맨 끝에 아예 나머지 이인분을 버리기로 마음먹고 처분해버렸다. 그런데 지금 주인님이 그 많은 음식들 중에서 단 하나만 없어진 새우 볶음밥을 찾아 그 진상을 캐 물으려 하니 가슴이 떨리는 소연이었다.

소연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동천은 화정이에게 뚱한 얼굴로 물었다.

“새우 볶음밥 니가 먹었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지 화정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동천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정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동천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다시 물었다.

“니가 새우 볶음밥 먹었어?”

화정이는 한쪽 눈썹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듯 자신의 주인님을 내려다보았다. 동천은 흥분해하며 소연에게 말했다.

“소연아. 얘가 지금 하는 짓거리 봤어?”

“예에…”

보긴 봤는데 동천의 의중을 알 수 없었던 소연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소연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어낸 동천은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재빨리 말했다.

“봐봐. 얘가 지금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구.”

소연은 슬슬 자리를 피하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는 잘…”

“에이, 병신 같은 계집애. 야. 생각해봐. 언제 화정이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있었어?”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드디어 알겠다고 수긍을 한 소연은 깜짝 놀랐다.

“어머? 그럼, 드디어 화정이가 생각을 한다는 소리예요? 그거예요?”

동천이 그것을 확실히 알 리가 있겠냐마는 모른다고 말하기가 싫었던 동천은 히죽 웃어대며 아는 척을 했다.

“바로 그거야. 이제야 알겠어? 휴우. 길고도 긴 나날이었어. 안 그래? 내가 그동안 화정이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혔는지… 넌 알지? 나의 그 고통의 나날들을.”

자기가 고통의 나날을 지낸 적은 있었어도 주인님이 지샜던 고통의 나날들은 금시초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게 뭔 소리냐고 물었겠지만 요 근래에 와서 제법 동천의 눈치를 보아왔던 소연은 얼른 긍정을 표했다.

“알고 있죠. 그럼요.”

소연의 맞장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동천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화정이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나 동천이 작아서 그런지 기껏해야 화정이의 허벅지 부근을 감싸 안는 게 다였다.

“화정아. 잘해봐. 알았지? 매일 머리를 굴리는 것도 잊지 말고.”

그 소리는 알아들었는지 화정이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화정이의 일로 새우 볶음밥에는 관심이 없어진 동천은 풀어놓은 음식들을 다시 싸매고는 화정이에게 들게 했다.

“가자. 히히.”

문 밖으로 나오니 약초꾼 세 명과 도연이 시립해 있었다. 한차례 그들을 둘러보던 동천은 약초꾼들 중 왼쪽에 서있는 건장한 사내를 지목했다.

“너.”

확실히 자신을 지목한 건지 알 수 없었던 사내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말씀입니까요?”

“그래 너. 내가 생각 같아서는 화정이를 데려가고 싶은데 얘는 공부를 해야 하니까 니가 화정이 대신 이 짐을 들어라.”

“알겠습니다.”

사내는 군말 없이 대답한 후 화정이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봇짐을 받아들었다. 무게가 만만치 않았던지 사내의 몸이 한쪽으로 급격히 쏠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어정쩡한 자세로 뭉기적거리는 사내가 안 돼 보였는지 소연이가 동천에게 말했다.

“저 아저씨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은데, 좀 나누어서 들게 하는 건 어때요?”

확실히 자신이 보아도 그렇기에 동천은 별 말없이 알았다고 말했다. 소연 덕택에 정확히 삼등분으로 나누어진 짐들은 약초꾼들이 알아서 하나씩 들었다. 동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캬~! 날씨 한 번 좋고!”

대청 마루에서 내려온 동천은 신을 신은 다음. 처음에 봇짐을 들었던 사내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예. 단고대(短孤擡)입니다.”

“단고대?”

“그렇습니다.”

“좋아. 단고대. 이 근방에서 산삼이 나올만한 곳이 있을까?”

없다고 하면 해코지를 당할 것 같고, 또 있다고 데려갔다가 산삼이 안 나와도 피해를 입을 것 같고… 단고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씨. 몰라?”

소전주가 화를 내자 단고대는 운에 맡기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알고는 있지만…”

“있지만? 있지만 뭐.”

“예. 그곳은 소교주님께서 직접 관할하시는 산이기에….”

동천의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또 소교주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산삼을 구하려고 하면 꼭, 소교주가 튀어나와 방해를 했다. 비록 이번이 두 번째 이기는 하지만 동천에게는 한 번의 방해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 눈 찢어진 재수 없는 잡놈이 사사건건 나를 방해하려 드네? 어디서 그런 싸가지 없는 종자가 태어나 가지고. 으으. 참자. 그래 착한 내가 참는다.’

지가 아무래도 꿀리니까 포기하는 것도 빨랐다. 화를 억누른 동천은 불안에 떨고 있는 단고대에게 물었다.

“소교주님이 거기는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셨어? 거기에 가면 안 된다고 그래?”

단고대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저희 같은 잡것들이야 접근이 불허하지만 소전주님 정도의 분들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제가 염려하는 부분은 소교주님께서 그 영수산(嶺獸山)에 엄청난 양의 맹수(猛獸)들을 풀어놓으셔서 서로들 싸우는 것을 즐기시기 때문에 그 산은 극히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그 새끼. 변태 새끼인가?’

동천이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지금 겨우 10살인 냉현이 맹수들의 싸움을 즐긴다니, 누가 생각해도 좀 비정상적인 문제였다. 사실 동천은 모르고 있었지만 밑바닥 무사들에게 암흑마교 내에서 제일 만나길 꺼리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첫째로 꼽히는 인간들이 동천과 냉현이었다. 이 둘의 싸가지는 암흑마교 내에서도 쟁쟁했기 때문에 누가 우위인지 점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냉현도 한 싸가지 한다는 소리였다. 그 누가 변태를 만나고 싶겠는가. 동천은 약간 솟아오른 닭살을 비벼댔다.

“소교주님은 그 산에 매일 오시냐?”

단고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오실까 말까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한 번 들리셨다고 들었으니 적어도 보름 이후에나 들리시리라 봅니다.”

거기에서 변태를 만날 일이 없다는 소리에 안도한 동천은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가도 된다 이거지?”

“위험을 감수한다면 야….”

단고대는 아무래도 가길 꺼려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고대는 단고대고 동천은 동천이었다.

“히히. 그럼, 결정했다. 도연아.”

“예. 주군.”

여지껏 조용히 서있던 도연은 한 걸음 다가왔다. 품속에서 과자를 꺼내든 동천은 맛있게 씹어대면서 말했다.

“그 산에 맹수가 있다는데 어떻게 하지?”

도연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목검을 들어 보였다. 손잡이 부분을 양손으로 잡아당기자 목검 속에서 하얀 광채가 드러났다. 목검과 검을 겸용으로 쓰게 제작된 것 같았다. 도연은 잠시 내려다보다가 짐짓 싸늘히 대답했다.

“주군의 앞길을 막아서면 제가 가죽을 벗기겠습니다.”

목검이 갑자기 검으로 변해서 내심 놀랐지만 동천은 폼을 잡고 만족의 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만 마음에 드는 도연이었다. 약초꾼들은 도연의 기세에 움찔하는 듯했다.

“좋아. 그 영수산으로 간다. 야. 당고개 앞장서.”

“저, 당고개가 아니라 단고대인데요.”

동천은 단고대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어이쿠!”

쓰러진 단고대를 한 번 더 걷어찬 동천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봤다.

“이 새끼야. 니 이름이 뭐든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일어나서 앞장서 새끼야.”

단고대는 죽기 싫었던지 재빠르게 일어나 동천을 안내했다. 대문을 지나서던 동천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동천은 뒤따라온 소연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 손을 빼려던 소연은 손안에 무엇이 잡히자 의아해하며 펴 보았다.

“이게 뭐예요?”

동천은 딴소리를 했다.

“나 갔다 올 테니까. 그거 먹고, 화정이나 잘 가르쳐.”

소연은 습관적으로 인사를 했다.

“예. 다녀오세요.”

동천이 나가고 소연은 손에 쥐고 있던 과자를 한동안 응시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소연은 화정이에게 달려갔다.

“호호. 화정아. 이거 주인님이 주셨어. 우리 같이 나누어 먹자. 너도 좋지?”

화정이는 예의 그 웃음을 소연에게 비추어 주었다. 밖으로 나간 동천은 어느 정도 걸어가다가 혀를 사용해 입안을 쓸어냈다. 그리고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에이, 씨발. 거 더럽게도 맛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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