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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50화


동천과 한 걸음 정도 뒤처져 따라오던 도연이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동천은 몰라도 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냥 해본 소리야. 신경 끄고 이따가 산에 올라갈 때 잘 따라오기나 해. 그때 빌빌거리지나 말고.”

“알겠습니다.”

그 뒤로 도연이 입을 다물자 심심해진 동천은 도연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너 삐졌냐?”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동천은 제법 살갑게 다가와서는 도연의 어깨를 툭툭 쳐대며 친한 척을 했다.

“있을 수도 있지. 왜 없어 임마. 야,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삐졌지?”

도연은 눈에 힘을 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안 삐졌습니다.”

동천은 화를 냈다.

“이 새끼야! 아니면 아니지 왜 그따위 눈으로 쏘아봐! 내가 전에도 그렇게 눈알 치켜뜨지 말라고 그랬지.”

“죄송합니다.”

도연이 의외로 눈에 힘을 풀자 동천은 더 따지기가 뭐해서 그만두었다.

“흠. 이 정도에서 내가 봐줬다. 야. 얼마나 더 가야 돼?”

그들을 안내하던 단고대는 소전주의 물음에 죄송스럽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적어도 세 시진 이상은 걸어야 하는 뎁쇼…”

“으응. 세 시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동천은 정신이 드는지 눈을 크게 떴다.

“뭐? 일다경도 아니고 세 시진? 이 자식 좀 보게? 넌 나처럼 허약한(?)분을 세 시진 이상 걸어가게 하려 했단 말야?”

단고대는 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시면 마방(馬房)이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소전주님을 모시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여움을 푸시지요.”

동천은 금세 안면을 바꾸었다.

“그으래? 히히. 누가 뭐라고 했냐? 난 그저 걸어가야 하냐고 물었을 뿐이야. 여기서 가깝다고? 그럼 어서 가야지.”

한차례 위기를 모면한 단고대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마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단고대의 말대로 얼마 안 가서 마방이 나왔다. 거기에서 마차 한 대를 구한 동천 일행은 속도를 내서 점심 전까지 영수산에 도착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동천의 일방적인 합의였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편안하게 마차를 타고 가게 된 동천은 자신의 앞에서 차분히 앉아있는 도연에게 말을 걸었다.

“야. 나 심심한데 뭐 재미있는 이야기 없냐?”

평소에 묵뚝뚝한 도연이 그런 이야기를 알 리가 없었다.

“없습니다.”

끈질긴 동천은 여기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니가 제일 웃겼던 이야기가 있었을 거 아냐. 안 웃겨도 되니까 그거라도 말해봐.”

주군이 자꾸 채근하자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도연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론을 이끌어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 아주 착한 나무꾼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죠.”

동천은 무언가 아귀가 안 맞는 도연의 말을 막았다.

“야. 길을 잃고 헤매는 나무꾼도 있냐?”

“…….”

도연이 대답을 못하자 동천은 제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다시 도연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왜 그러고 있나요?

-예.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저쪽으로 가보세요. 그럼 길이 나타날 거예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길로 걸어가던 나무꾼은 호랑이와 만나게 되죠.”

-어흥! 내 영토에서 나무를 벨 수는 없다.

-그, 그럼요. 나무를 벨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길을 잃어버려서 길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이쪽으로 가봐라. 그럼 길이 나타날 것이다.

-예. 예.

“호랑이의 말대로 길을 걸어가던 나무꾼은 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동천은 자못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왜? 또 뭐가 나타났어?”

“그게 아니라 호랑이가 가르쳐 준 길로 가니 아까 자신이 선녀를 만났던 그곳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길을 찾으려 돌아다녔으나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온 나무꾼…. 동천은 남의 일 같지 않은 나무꾼의 이야기에 도연을 얼른 다그쳤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응?”

“나무꾼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에는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

한동안 도연을 째려보던 동천은 이걸 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를 했다.

“… 그게 끝이지?”

“예.”

“에라, 이 자식아!”

딱!

도연에게 꿀밤을 먹인 동천은 기분이 잡쳤는지 획 돌아누웠다. 지 혼자 씩씩거리며 분을 못 풀던 동천은 벌떡 일어나 마부석을 향해 소릴 질렀다.

“아직 멀었어?”

“아닙니다요. 곧 도착하니 그 새에 눈을 좀 붙이시지요.”

“오오. 그래. 그런 수가 있었지?”

좋은 의견이라 생각한 동천은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싱글거리던 동천은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잠이 안 오는 것이었다. 잠이 안 오면 당연히 별의별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누워서 다리를 꼬고 건들거리던 동천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내가 말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소교주는 변태인 것 같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창밖을 바라보던 도연이 동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동천은 눈을 감고 있어서 도연이 자신을 바라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도연은 다시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동천은 화를 안 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니깐게 알 리가 없지. 에휴. 난 수하 복이 지지리도 없어.”

말을 마친 후 실눈을 뜨고 살며시 도연을 훔쳐본 동천은 도연이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자 얼굴을 구기며 진짜로 눈을 감아 버렸다. 여전히 잠은 안 왔다. 영수산에 도착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던 동천은 공연히 약초꾼들에게 시비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삼을 캐려면 그들이 꼭 있어야 하므로 꾹 참았다. 얼마 안 가 동천은 잠이 들었다.


엽소는 요 근래에 많이 수척해 있었다. 이쯤 되면 소식이 있어야 할 부성광 분타주가 감감 무소식인 것이었다. 잠을 못 자서 다소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 앉아 한참을 고뇌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나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을 리 없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아니야. 그런 재수 없는 생각은 접어두자. 그래. 아마도 조용히 갔다 와 나를 놀라게 하려는 게 틀림없어.’

애써 밝게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엽소는 한 손으로 애꿎은 머리카락을 학대했다.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엽소의 손을 따라나왔다. 엽소는 무심한 눈길로 하늘거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던져버렸다.

“어찌하여 안 오시는 것인가.”

그때 한 시녀가 자뭇 흥분된 신색으로 들어왔다.

“부 분타주님! 오셨습니다!”

“뭐가 말이냐.”

시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기다리시던 분타주님이 오셨습니다!”

엽소의 얼굴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는 시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어디에 계시느냐?”

시녀는 어깨가 아파왔지만 애써 참으며 말했다.

“이리로 곧장 오시는 중입니다.”

엽소는 시녀의 대답을 끝으로 얼른 달려나갔다. 맨발로 한참을 뛰어나가자 몇몇 수하들을 이끌고 자신 쪽으로 오고 있는 부성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큰 소리를 지르며 그의 앞에 부복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어찌된 영문인지요!”

부성광은 만면에 웃음을 흘려대며 부복한 엽소를 친히 일으켜주었다.

“하하하! 잘되었네. 내 이번에 다시 교내로 진출하게 되었네. 하하하하!”

“오오! 드디어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모두 자네의 덕이지.”

엽소는 마치 자신이 부성광이 된 듯 좋아서 몸 둘 바를 몰라했다. 부성광이 친히 일으켜주어 감동에 물들어있던 엽소는 한순간 몸을 움찔했다. 그의 시선은 부성광의 오른쪽 손에 끼어있는 강철 반지에 머물러 있었다. 엽소의 시선을 느꼈는지 부성광이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하하. 이건 자네가 준 것인데 새삼스레 왜 보는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반지에 작은 흠이 가서 저도 모르게 보았던 겁니다.”

부성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반지를 보았다. 확실히 반지의 옆면이 작은 길이로 긁혀 있었다.

“이런? 이런 귀한 것에 상처를 입히다니. 엽소 정말 미안하네. 내가 부주의로 그만 상처를 낸 모양이네.”

부성광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엽소는 괜찮다는 듯 그를 이끌었다.

“하하!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러도록 하지.”

엽소는 그동안 부성광이 암흑마교 내에서 푸짐한 대접을 받느라 자리를 빠져나오기 어려웠다는 사정을 들었다.

“저런, 욕 좀 보셨겠군요.”

부성광은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키곤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의 욕이면 얼마든지 욕을 볼 수 있다네.”

엽소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크하하하! 그렇기도 하군요. 하하하!”

“으하하하!”

서로들 그동안의 못 보았던 회포를 풀며 밤새는 줄 모르고 여흥을 즐겼다. 마침내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엽소가 몸을 제대로 못 가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꺽? 어, 취한다. 분타주님. 아니지? 이제 만추 대신 동남당(東南堂)을 맡게 된 동남 당주님.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붙잡아 둔 것 같습니다. 하하! 저는 이제 그만 물러나겠으니, 푹~! 쉬시지요.”

부성광은 붉어진 얼굴로 엽소를 잡았다.

“아아. 그러지 말고 우리 한 잔만 더하세나.”

엽소는 빙그레 웃은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러다가 제가 쓰러지면 내일 곤란하니 자제를 하겠습니다.”

“자네가 정 그렇다면 야… 하하! 그럼, 내일 보세나.”

“옛!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한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간 엽소는 부축하는 시녀를 마다하고 자기 혼자 가겠다며 기분 좋게 걸어갔다.

“으하하!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구! 흐흐. 이제 팔자 폈구나!”

한껏 떠들어대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엽소는 물을 한잔 마셨다. 그의 손이 컵을 내려놓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엽소의 취기는 사라져 있었다. 살기 어린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부성광의 처소를 돌아본 엽소는 차가운 음성을 흘렸다.

“저놈은 분타주가 아니다.”

엽소의 눈이 점차 그 살기를 더해갔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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