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153화


도연은 주군인 동천을 위해서 흑곰의 주의를 끈 다음 힘차게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지만 옆구리가 찢어질 듯 아파와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땀에 흠뻑 젖은 그는 거친 호흡을 반복적으로 내쉬었다.

“헉, 헉. 허억. 헉.”

다행히 그 곰은 쫓아오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도연은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검에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핏물이 끈적거림을 자랑하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난 그는 자신이 도망쳐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함을 알았다. 동천 때문에 가봐야 하는 것이다.

“후우. 후우. 이제 가볼까.”

도연은 다시 뜀박질을 시도했다. 얼마 쉬지도 않았는데 다시 뛰어서 그런지 그의 몸에서 거부반응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금세 도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도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의식적으로 다리에 힘을 가했다. 그때 그의 오른쪽이 부스럭대더니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도연은 깜짝 놀라 검을 휘둘렀다. 튀어나온 상대는 급히 도연의 검을 피하며 소리쳤다.

“으아악! 이, 이봐요. 나예요. 나.”

상대를 일별한 도연은 숨을 고르며 냉랭히 중얼거렸다.

“하아. 하아. 당신들…”

당신이 아니라 당신들이라면 상대가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바로 그들은 아까 나 몰라라 도망쳤던 단고대 일행이었다.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던 단고대는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단고대입니다. 근데… 소전주님은 어디에 계시죠?”

단고대 일행을 한참 동안 노려보던 도연은 그들이 멋적어서 그의 눈을 피할 때쯤에야 말을 꺼냈다.

“주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들은 죽었어.”

자기 할 말을 다 마치고 난 도연은 동천과 헤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잠시 어리벙벙해 있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들은 새파래진 얼굴로 도연을 따라갔다. 단고대는 죽을 둥 살 둥 도연을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이, 이보시오! 우리들이 일부러 도망친 게 아니라 소전주님이 무사히 도망치실 수 있게 그 곰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도망쳤던 것이오!”

도연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단고대를 힐끔 쳐다보았을 뿐 아무런 대꾸도 안 했다. 달리기에 지쳐버린 단고대는 서서히 뒤처지며 헐떡였다.

‘제기랄. 애 새끼가 더럽게도 빠르네. 헉헉.’

뒤에서 약초꾼들이 따라오느라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도연은 더욱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때 또다시 풀숲이 일렁이더니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도연의 검이 휘둘러졌다. 높게 잡고 검을 휘둘렀는데 생각 외로 상대가 작았던지 허무하게 상대 위를 스쳐 지나갔다.

“으엑! 이 씨발 놈이 어디다가 검을 놀리고 지랄이야?”

난데없이 칼침을 맞을 뻔했던 동천은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주군의 무사함을 확인한 도연은 굳어있던 얼굴을 풀며 기뻐했다.

“주군. 무사하… 앗? 왜 이러십니까?”

동천은 성한 팔로 도연의 소매를 쥐어 잡고 거칠게 내달렸다.

“잔말 말고 따라와 새꺄!”

자신의 의사를 보여준 동천은 곧 도연의 소매를 놓고 있는 힘껏 달렸다. 경공을 사용하면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겠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경공을 떠올릴 생각조차 못했다. 단고대는 무사히 달려오는 동천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소전주님. 무사하셨군요.”

이에 동천도 환하게 웃으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반갑게 다가오는 단고대의 아구리를 후려쳤다.

“꾸엑!”

동천은 나자빠지는 단고대를 그대로 지나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 넌 살아나도 죽었어!”

얼굴을 부여잡고 자빠진 단고대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는 소전주가 저 멀리 사라지자 마음 놓고 지껄였다.

“제길. 살아났으면 됐지. 때리고 지랄이야.”

오른쪽의 약초꾼이 그를 위로했다.

“이보게. 소전주 횡포가 하루이틀인가? 참게나.”

단고대는 지가 지랄을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쉽게 화를 풀었다. 그는 턱을 돌려대며 어루만졌다.

“알겠네. 근데, 저 꼬마가 왜 저렇게 바쁘게 달려가는 거지?”

이번에는 왼쪽의 약초꾼이 말했다.

“꼭 쫓기는 것 같던데?”

“흐음. 듣고 보니… 뭐? 쫓겨?”

단고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별다른 조짐이 없을 뿐더러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의 귀에는 동료들의 숨소리 외에는 어느 것도 감지되질 않았다. 괜히 진땀을 뺐다고 생각한 단고대는 동천이 도망간 곳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땅꼬마 새끼 때문에 쓸데없이 심력만 낭비했잖아?”

“하하. 그러게 말이네.”

“나 참. 정말로 웃긴 자식이야.”

그들이 도망쳐버린 동천을 험담하고 있을 때 노란색에 검은 줄무늬를 띤 동물이 그들 주위를 소리 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즈음. 한참을 달렸다고 생각한 동천은 달리기를 멈추었다. 이만하면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동천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헥헥. 아이고 힘들어. 나 죽것다.”

동천을 따라 앉은 도연은 그러면서도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연은 부목을 한 동천의 팔을 보았다.

“부러지셨습니까?”

동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연을 노려보았다.

“넌 내 팔이 부러졌으면 좋겠지?”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 니 쌍판에 다 나와있어.”

도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우길 걸 우기라는 소리였다. 재미가 없어진 동천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도연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때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사람 살려!”

“끼에엑~!”

도연은 벌떡 일어났다.

“저쪽에 무슨 일이 있나봅니다!”

동천은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듯 사악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히히히! 잘 됐다. 감히 지들의 소전주인 나를 내비두고 튀어? 죽어도 싸지. 죽어도 싸. 으히히히!”

만약, 동천이 상대가 당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지금 지껄인 말들이 쏘옥 들어갔겠지만 그저 어린애의 상상으로만 국한된 생각을 했기 때문에 가볍게 넘어갔다. 그 간단한 생각이 뭐냐 하면…

-호랑이에게 당한다. -> 뒈진다. -> 하늘로 올라간다. -> 다시는 만날 일 없다.

뭐 이런 생각이었다. 지도 곰에게 죽을 뻔했으면서 그 일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동천이 혼자 히히덕거리며 달려가자 궁금해진 도연은 참다 못해 물어보았다.

“주군.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바로 말해주었다.

“히히! 알고 보면 쟤들도 착한 놈들이야. 아까 그 소리는 우리를 대신해 호랑이가 왔는지 신호를 보내준 거였어. 이걸 시적(詩的)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아. 그들은 나를 위해 위험 신호를 몸으로 때웠다. 히히. 이렇게 되는 거야. 어때? 내 시적 감각이 아주 죽이지? 으히히히!”

도연은 긴장한 얼굴을 하면서도 동천의 물음에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뭐? 몰라? 에그 병신. 좀 낭만적이게 살아봐라. 그러니까 니가 친구가 없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지도 없으면서 큰소리는 잘했다. 동천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따라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동천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후아. 힘들다. 이 정도면 그 노랭이도 안 쫓아오겠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