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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55화


소연은 동천이 나가고 없는 사이에 화정이와 심오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영향으로 둘의 주위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연의 주위에 널려 있는 것이었다.

“아이, 가만히 있어봐.”

그녀는 작은 세붓으로 화정이의 얼굴을 치장하고 있었다. 세심함을 요하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소연은 긴장한 얼굴로 조금씩 붓을 옆으로 그어갔다. 그에 따라 화정이의 한쪽 눈썹이 진한 먹 빛으로 변해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정이의 눈썹을 그려 가는 소연의 얼굴에는 장인정신(?)마저 서려 있을 정도였다.

“와아! 됐다! 후후,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잘 그렸단 말야? 자, 화정아. 이제 다른 쪽 눈썹도 그려보자. 알았지? 이번에도 가만히 있어야 해.”

화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소연은 가까이 다가가 균형을 잡기 위해 화정이의 한쪽 머리를 붙잡고 다른 쪽 눈썹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잘 하고 있어. 가만히. 가만히…”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소연과 화정이는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밖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연아. 소전주님을 찾으시는 분이 계셔.”

소연은 한참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그 분위기가 깨져 좀 그랬지만 동천처럼 티를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얼른 방문을 열었다.

“아? 언니, 죄송한데요. 소전주님은 지금 안 계세요. 그런데 어느 분이 주인님을 찾아요?”

진지한 얼굴로 소연을 바라보던 시녀는 화정이 쪽을 힐끔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푸웃! 그, 그게. 약왕전 이공자인 고, 공영수(共永素)님이 찾으… 호호호!”

소연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하는 시녀 언니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일자 눈썹의 화정이가 웃고 있었다. 붓은 가만히 있었는데 화정이가 고개를 돌려서 그대로 그어진 것 같았다. 갑자기 그어진 만큼 미간 사이에는 희미한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쪽팔림을 금치 못한 소연은 얼른 달려가서 지워주었다.

“휴우. 아차? 언니, 뭐라고 했죠?”

“호호. 그러니까, 소전주님의 사형이신 공영수님이 소전주님을 찾으신다고.”

“네?”

소연은 황당한 소리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약왕전 내에 주인님의 사형이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소연은 얼떨결에 다시 물었다.

“주인님의 사형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자 이번에는 시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을 했다.

“너, 모르는 구나? 하긴.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를 만도 하지. 우리 전주님은 지금의 소전주님을 합쳐서 여지껏 총 네 명의 제자를 들이셨어. 그런데 첫째와 셋째 분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둘째 제자인 공영수님은 하반신을 못 쓰는 불구가 되셨지. 당연히 그분께서는 실의의 나날을 보냈을 테고. 어느 날 편지 한 장 달랑 남기시고는 사라지셨어. 그런데 그분께서 며칠 전에 은밀히 돌아오셔서 전주님을 찾아뵈었다가 안 계시니까 이번에는 새로 맞아들인 소전주님을 보시러 온 거야. 나도 들은 얘기인데 근 15년 만에 돌아오셨다나 봐.”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근데, 지금 어디에 계세요?”

소연의 물음에 시녀는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소전주님의 방에…”

“예? 주인님 방에요?”

소연은 깜짝 놀라서 동천의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 별로 없듯 동천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동천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역천과 소연, 그리고 화정이뿐이었다. 만약, 지랄 같은 성격의 주인님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엄청 혼날 것이 자명한 일.

“아이고 큰일 났다.”

시녀는 급히 뛰어가는 소연에게 한 소리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연아! 내 잘못이 아냐. 그러니까 소전주님께 내 얘기는 꺼내면 안 돼! 알았지?”

착한 소연은 이 일로 가슴을 졸일 시녀 언니를 생각해서 활기차게 대답해 주었다.

“알았어요. 수고했어요. 언니.”

소연이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동천의 방에 당도했을 때, 이공자인 공영수의 손은 용독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용독경은 동천의 키에 알맞게 만들어진 책꼿이에 꽂혀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공영수에게도 알맞은 높이여서 손만 뻗으면 곧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서책 몇 개를 집어서 읽어보다가 그것들 중 제일 두꺼운 용독경에 호기심을 느껴 꺼내 보려던 참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용독경이 발견되면 큰 파문이 일었겠지만 동천이 늘 찾아대는 하늘님의 도우심인지 소연의 등장으로 인해 용독경으로 향하던 공영수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소연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있는 공영수에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소전주님의 시녀인 소연이라 합니다.”

끼리리릭!

의자가 반 바퀴 회전을 하면서 어긋나는 소리였다. 공영수는 쩔쩔매는 듯한 여아의 행동을 보고는 살짝 웃어주었다.

“어째서 사제가 안 오고, 네가 왔느냐.”

소연은 고개를 한껏 숙이고 공영수의 물음에 답했다.

“주인님께서는 지금 잠시 출타 중입니다.”

공영수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흐음. 사제도 없다는 말인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공영수는 아까 호기심이 일었던 두꺼운 책에 생각이 미쳤다. 의자를 돌린 공영수는 용독경에 눈을 돌렸다. 그의 손이 다시 한번 용독경을 빼들려고 할 때. 누군가가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흠칫한 공영수는 소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창백하다 못해 분가루를 칠해 놓은 듯한 아름다운 소녀가 초점이 흐린 눈으로 공영수를 보고 있었다.

“누구인가?”

“예?”

소연은 뭔 소리인지 몰라 하다가 얼마 안 있어 화정이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었다. 소연은 자신의 지시가 없음에도 따라온 화정이를 자못 신기하게 바라보다 이공자님의 물음이 생각나 다급히 말했다.

“얘는 화정이라고, 주인님께서 거느리고 있는 초혼강시입니다.”

순간 공영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라고? 초혼강시?”

소연은 이공자를 약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잘못된 점이라도 있나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공영수는 안색을 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보다 초혼강시라니 놀랍구나.”

공영수는 한 손으로 의자 바퀴를 밀며 화정이에게 다가갔다. 말로만 들어보았던 초혼강시를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 공영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화정이를 바라보다 체온이 있는지 궁금해 화정이의 손을 쥐어 보았다.

그러자 화정이의 눈이 꿈틀하더니 공영수의 손을 뿌리쳤다.

“으응?”

공영수는 생각 외의 반응에 놀라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평생을 갈 것 같던 화정이의 입가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소연은 당황해서 화정이를 흔들었다.

“화, 화정아. 왜 그래.”

화정이는 소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동천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화정아. 이 주인님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에게 닥칠 위험에 대비해 미리 말해두는 건데, 어떤 놈이고 년이고 널 건드리면 우선 거부반응을 보여. 알았지? 만약에 그래도 찝쩍이는 것들이 있으면 그다음에는 봐주지 말고 한 방 먹여! 사정 봐줄 거 없어! 아주 죽이는 거야! 아차? 근데 사부님은 예외니까 괜히 그러지 마. 알겠지? 아이고 착해라. 우리 화정이…

화정이는 주인님의 사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움직여 소연의 뒤로 물러났다. 소연이는 화정이의 손을 꼬옥 쥐더니 걱정스런 눈으로 올려보았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화정이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 화정이의 행동을 알고 있던 소연은 믿음이 가지 않았는지 재차 물었다.

“정말이야?”

공영수는 소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화정이란 강시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가만히 보니, 화정이란 강시는 묵묵히 고개짓으로만 의사표현을 했다.

‘아직은 말이 안 트였는가?’

공영수는 궁금함에 물어보았다.

“얘야. 그 강시가 깨어난 지 얼마나 됐느냐.”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가는구나… 했던 소연은 공영수의 물음에 바삐 머리를 굴려 보았다. 다행히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으음. 두 달에서 거진 세 달? 아마, 그쯤이 됐을 거예요. 왜요?”

공영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시녀 따위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한 것이었다. 호된 질책을 늘어놓으려던 그는 다시 한번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 주의를 주기로 하고, 기분을 풀었다.

“그 강시가 말이 없어서 물어본 것뿐이다.”

“네에…”

공영수는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화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나중에 다시 들르도록 하마. 사제가 오거든 그렇게 일러두거라.”

“알겠습니다. 이공자님.”

소연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가던 공영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는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런데, 그 강시가 네 말을 듣는 것 같더구나.”

자신이 아는 문제라 소연은 시원하게 답해주었다.

“아? 그거요? 화정이 깨어날 때 제가 주인님과 같이 있었는데 화정이가 저까지 보게 되어 주인님도 따르고 저도 따르게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주인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해서 결정적으로 따르는 것은 주인님뿐이에요.”

“알겠다.”

공영수는 만족의 대답을 들은 듯 미련 없이 가버렸다. 소연은 암한문의 정문까지 공영수를 바래다 준 후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돌아가는 길에 같이 따라온 화정의 손을 잡았다.

“화정아. 방금 저분이 네 손을 만져서 기분이 나빴어?”

소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화정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지금도 기분이 나빠?”

화정이는 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연은 가자미눈을 뜨고 화정을 올려보았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알 정도로 소연의 눈썰미는 날카롭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포기하기로 했다.

“에휴, 관두자.”

“……?”

화정이는 소연이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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