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67화
그르르릉-!
금속제로 만든 육중한 문이 열리면서 힘겨운 음성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열려진 문 안으로 한 사내가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지극히 차가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는 앞으로 몇 발자국을 채 걸어가기도 전에 엄청난 열기에 주춤해야만 했다. 사내는 신형을 멈추고 부복을 했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교주라. 그렇다면 이곳은 냉소천의 연공실임에 틀림없었다. 전신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뿜어내던 냉소천은 얼마 안 있어 내공을 거두었다. 그는 사내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뜻밖이로군. 신휘(呻徽) 자네가 나를 찾다니. 설마 본좌가 연공 중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신휘라 불리운 사내는 대답 대신 한 줄기 미소를 그렸다. 자신이 웃은 이유를 알아보라는 듯한 그런 미소였다. 냉소천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일파종사의 위엄이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닌 듯 쉽사리 자신의 심중을 내비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더 이상의 침묵은 교주를 기만하는 죄이기에 신휘는 냉소천의 물음에 차가운 음성을 보내주었다.
“찾았습니다.”
또다시 냉소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자세히 말해보라.”
신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살단묘(毒殺短猫) 부부를 찾았습니다.”
순간 냉소천의 눈에 불똥이 튀겼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신휘를 바라보던 그는 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디서 찾았느냐. 아니, 지금 어느 곳에 숨어있더냐.”
“약왕전입니다.”
뜻밖이었는지 냉소천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약왕전?”
신휘 그 자신도 수하인 악붕에게 그 보고를 들었을 때 지금 냉소천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들 부부가 그곳에 숨어들었을 줄을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신휘는 다시 한번 그렇다고 대답한 뒤 그간의 상황을 보고했다.
“사실 약왕전에 숨어든 건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수산(嶺獸山)에 올라갔다가 길을 잃은 약소전주 일행을 도와준 뒤 어린 소전주의 환심을 사서 같이 따라온 것으로 간주됩니다.”
영수산이라면 냉소천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들이 취미(?)로 맹수들을 잡아다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위험한 곳에 약소전주가 왜 올라갔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뭐 하러 그곳에 올라갔던 건가? 설마, 그 아이도 현아와 같은 취향인가?”
신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소전주는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영수산에 산삼을 캐러 올라갔다가 맹수들에게 약초꾼들을 다 잃어버리고 기적적으로 도망을 쳤던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었던지 무사들은 동행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으응? 하하하! 과연 약왕전주의 제자답군. 고작 약초꾼들만 데리고 그곳에 올라갔다니. 그래. 그래서 그 부부를 만나 친해진 후 데리고 내려왔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동천의 어리석은 행동에 고개를 저어대던 냉소천은 조금 후 신휘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들이 확실한가?”
신휘는 확신에 찬 눈으로 냉소천을 직시했다.
“착오는 없을 겁니다. 제 수하인 악붕이 운 좋게도 그들을 알아보았고, 또한 제가 일주일간 그들의 주위를 맴돌며 직접 확인을 한 것인 만큼 믿으셔도 좋으실 겁니다.”
대 살각의 각주인 그가 직접 눈으로 확인을 했다는 소리에 냉소천은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만큼 값어치를 했기 때문에 나직이 수긍을 했다.
“그들이 이곳에 아직 남아있는 것을 보니 만독노조와는 조우를 못했나? 흐흐. 좋은 일이야. 나는 그가 그들을 만나 진실을 알아서 사라졌나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다시 한번 기회가 더 있는 셈이란 말이군. 약조를 어기고 내공의 손실이 무서워 도망을 친 그를 어떻게 요리하는 게 가장 좋을까?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신휘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 일을 눈감아 주는 대신 다른 요구를 한다면 그로서는 꼼짝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냉소천은 기분 좋게 웃고 난 후 말했다.
“본좌의 생각과 일치하는군 그래. 그 건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들 부부는 이제 어찌할 셈인가? 약소전주가 데리고 왔다면 그들을 명분 없이 해치울 수 없을 터인데.”
신휘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것을 대비해 우선 약소전주를 포섭해 볼 작정입니다.”
어린애를 포섭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어린애이기 때문에 의외로 애를 먹을 수 있었다. 냉소천은 상체를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적당한 자가 있는가?”
신휘는 냉소천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예. 한 이주일 전에 약왕전 둘째 공자가 돌아왔다 합니다.”
공영수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냉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때를 맞춘 듯하군. 좋아. 그 일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맡기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냉소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신중한 얼굴로 당부했다.
“그러나 명심할 사실은 너무 조급하게 일을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네. 어차피 그들은 독 안에 든 쥐야.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상관은 안 할 터이니 확실한 때를 노려서 조용히 처리해 버리게.”
신휘는 고개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냉소천은 이만 그를 물리치기로 했다.
“이제 나가보게.”
“존명.”
신휘가 재빠르게 연공실을 나간 후 냉소천은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클클클. 만독. 네놈이 도망친 대가를 두 배로 갚아주마. 물론, 이자까지 합쳐서 말이다.”
간만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동천은 자신의 사형이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안면을 구겼다.
“뭐? 또 왔어?”
소연은 동천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조심해서 말했다.
“예, 주인님.”
동천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에이 귀찮아. 며칠 전에 이 몸이 친히 찾아갔으면 땡이지 왜 또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거지?”
“제가 아나요.”
동천은 애꿎은 소연에게 소리쳤다.
“너한테 안 물었어!”
찔끔한 소연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 그럼요. 호호. 이 공자님이 기다리실 테니 접견실로 어서 가보세요.”
맞는 말이었기에 동천은 공영수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향했다. 천천히 거드름을 피우며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만나는 거 일찍 만나서 이야기를 끝내고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접견실에 당도한 동천은 시녀가 문을 열어주자 안으로 들어가 공영수에게 인사를 했다.
“헤헤. 사형. 또 오셨네요?”
따로 마련할 필요 없이 자신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공영수는 사제의 인사에 차를 내려놓았다.
“이 사형이 심심해서 또 찾아왔는데 사제의 표정을 보니, 내가 잘못 찾아왔나 싶군.”
공영수는 그냥 해본 말이었지만 동천은 진심으로 알아듣고 과장스레 손을 저어댔다.
“그럴리가요! 아주 잘 오셨어요! 헤헤, 저도 때마침 심심했거든요.”
“그런가? 하하. 그렇다니 안심이 되네.”
사형이 웃어서 마음을 놓은 동천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며 자리에 마주앉았다. 잠시 후 시녀가 가지고 온 차를 마신 동천은 평소 습관처럼 차를 한 번에 들이키려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조금만 마셨다. 할 말이 별로 없었던 동천은 좋아하지도 않은 차를 음미했다.
“역시 오후에 마시는 차는 일품이네요.”
“이 사형도 동감이네.”
공영수의 맞장구에 지랄한다고 생각했지만 동천은 사형이 자신과 취향이 같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쳤다.
“헤헤. 사형도 뭘 좀 아시네요. 머리를 맑게 해주는데 차같이 훌륭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동천이 의도하는 바대로 기분이 좋아진 공영수는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은근히 그 흐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사제. 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