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69화
그때 동천은 사형이라는 인간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저 따분한 곳을 빠져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저 설명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동천은 그런 아쉬움을 달래며 묵묵히 자신을 안내하는 소연을 불렀다.
“소연아. 감 노인이 왜 나를 불렀어?”
처음에는 주인님이 감 노인이라 해서 의아해했으나 원체 주인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소연은 그냥 넘어갔다.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주인님을 부른 것뿐이에요.”
동천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부른 소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으이그.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소연은 도망치듯 동천을 안내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감송 부부의 거처로 당도한 동천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당연한 거겠지만 두 부부가 나란히 있었다. 그들은 동천이 들어오자 서둘러 일어나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소문주님. 원래는 제가 찾아갔어야 했는데 남들의 이목이 있는지라 부득이하게 조용히 모셔오라 일렀습니다.”
동천은 상관하지 않았다.
“됐어. 그건 그렇고 왜 불렀어?”
감송은 동천에게 자리를 권한 후 밖으로 나가는 소연을 향해 말했다.
“아이야. 너도 들어오너라.”
소리를 죽여가며 문을 닫으려던 소연은 갑자기 할아버지가 자신을 불러 놀랐다.
“예? 저요?”
감송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소연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다. 이리 오너라. 이번에 소문주님을 부른 건 너 때문이니까.”
소연은 영문도 모른 채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동천은 자신의 뒤에 선 소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감송에게 물었다.
“할아범. 어째서 얘를 부른 거지?”
감송은 그저 웃음을 지어 보인 후 자신의 부인인 민소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감 부인이 말문을 열었다.
“실은 제가 그동안 내공을 되살려 보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었었고 또한 무리해서 내공을 격발시킨 까닭에 이제 와서 제 내공을 회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랍니다.”
동천은 별 감흥이 안 왔지만 짐짓 안타까운 척을 했다.
“저런. 거참 안됐네. 그래서?”
감 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무공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이고, 또 사부가 직접 기초를 가다듬어주지 않는다면 익히기가 매우 어려운 무공이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제가 살아있을 때 저 아이에게 무공을 가르쳐 가문의 무공이 끊기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뜻밖의 소리에 동천은 감 부인과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소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히죽 웃었다.
“에이, 농담이지?”
감송은 아니라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어찌 소문주님 앞에서 농담을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제 아내의 무공을 존속시키기 위한 자리에서.”
그렇기는 했지만 왠지 껄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동천은 미심쩍은 눈으로 감 부인을 살폈다.
“혹시, 얘를 데려다가 피 빨아먹으려는 거 아냐?”
감 부인은 소연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얼른 해명에 나섰다.
“소문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도 동천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내가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리인데 어째서 그렇게 피를 즐기는 거지? 타당한 사유가 없으면 소연이를 할멈의 제자로 줄 수 없어.”
때마침 그녀 자신도 그것에 관해 설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감 부인은 흔쾌히 말했다.
“방금 말씀을 드렸다시피 제 내공은 이미 거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상실한 것은 아니고 순간이나마 내공을 절반 정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도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피를 흡수하는 방법이랍니다. 더군다나 백록활근액을 머금은 동물의 피를 흡수하면 그 효과는 극대화가 되어 한번의 흡수로 반년은 너끈히 버틸 수 있죠. 그래서 피를 섭취했던 것이지 특히 피를 즐기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때를 경험했던 동천이 보기에는 뻥인 것 같았지만 용독경에서 피를 섭취해서 상실한 내공을 순간이나마 끌어올리는 방법을 보았기에 특별히 반박은 안 했다. 동천은 결정을 내린 듯 소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뒤돌아보는 게 귀찮았던지 소연을 옆으로 끌어당긴 후 마주보며 말했다.
“소연아. 들었지? 네 생각은 어떠냐?”
소연은 선뜻 대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연을 맺기 싫었을 뿐더러 그 상대가 피를 즐겨 먹었다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소연으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그러나 기다리는 걸 극히 싫어하는 동천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승낙하겠다고? 그래? 그럼, 만사 땡이네? 자, 소연아. 어서 구배를 올려.”
잠시 방심한 사이에 당하게 된 소연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예? 저, 저는.”
동천은 소연이 거부할 틈을 안 주려는 듯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어서 구배를 올리지 않고 뭐 해. 너 그러다가 나중에 저 할멈에게 구박받고 살지도 모르니까 할멈이 기분 좋을 때 어서 절을 올려.”
소연은 구박받는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절을 올렸다. 한 번 절을 하고 감 부인을 살며시 바라본 소연은 이미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구배를 다 올렸다. 구배를 올리고 소연이 서성이자 감 부인은 흡족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호호.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단다 아가야. 아니, 제자야. 네가 성심껏 배운다면 이 사부 또한 귀여워해줄 터이니 긴장을 풀거라.”
귀여워해준다는 대목에서 오해를 한 소연은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생각이 없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동천은 손을 소연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싱글거렸다.
“축하한다 소연아. 할멈이 피 빨아먹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하니까 잘 배워. 히히!”
하는 짓을 보아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았다. 동천은 굳어있는 소연을 뒤로하고 감 부부와 쓸데없는 잡담을 즐겼다. 그들은 의외로 인내심이 강했던지 영양가라고는 전혀 없는 동천의 주절거림을 잘도 웃으며 들어주었다. 자신의 입이 아플 때까지 혼자 떠들어대던 동천은 며칠 내로 소연을 보내기로 합의하고 밖으로 나왔다. 동천은 시무룩한 얼굴로 자신을 따라오는 소연에게 말했다.
“야. 인상 좀 펴. 넌 횡재한 거라구. 저 할멈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네가 몰라서 그러나 본데 비밀이지만 너한테 살짝 가르쳐줄게. 저들 부부는 바로… 에이, 그만두자. 사실은 별것도 아닌 꼬부랑 늙은이들인데 추켜세울 필요를 못 느낀다.”
그래도 좋은 소리를 기대했던 소연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억울한 듯 울먹였다.
“흑흑, 그런데 어째서 저를… 흑흑흑.”
소연이 우는 것을 보고 얼른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동천이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뒷골이 땅겼던 것이다.
‘제길, 대충 어디쯤에서 감이 오는지는 알겠는데 그곳을 돌아보면 나를 의심할 수 있어서 볼 수도 없잖아? 이거 되게 궁금하네?’
동천은 궁여지책으로 뻣뻣한 목을 돌리는 척하면서 자신이 느꼈던 방향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말끔하게 생긴 청년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동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자신의 앞마당을 쓰는 것은 장 노인의 소관이었기 때문이다. 동천은 얼른 그 청년에게 달려갔다.
“야. 너 나 좀 보자.”
청년은 굽실거렸다.
“예, 예. 말씀하시지요.”
청년의 굽실거림에 기분은 좋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어서 동천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내가 말이야. 널 처음 보거든? 그래서 말인데 넌 언제 이곳으로 배속됐냐?”
시비조의 동천을 대하고도 청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히 설명했다.
“원래는 밖에서 일을 했었는데 제가 한 달 전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것을 계기로 이곳에 자원을 했는데 며칠 전에야 이곳으로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확인해보면 들통날 일이라 거짓말을 했을 리 없었지만 자신의 감각을 믿었던 동천은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뭘 했는데?”
“이곳저곳을 떠돌며 잡일을 좀 했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숙이며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동천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럼, 무공은 전혀 모르고?”
청년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정색을 했다.
“저같이 미천한 것이 어찌 무공을 배웠겠습니까. 그저 귀동냥을 벗삼으며 돌아다니고 글이나 조금 읽을 줄 아는 정도입니다.”
보기에는 깔끔한 대답이었지만 동천은 무공이란 대목에 그가 미세한 반응을 보인 것을 놓치지 않았다. 동천은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