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73화
그리고 누구는 기다리고 누구는 두려워하는 내일이 마침내 찾아오고야 말았다. 화정이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아침 일찍 일어난 동천은 운기조식을 마치고 신이 나 싸돌아다녔다.
“랄라라~! 사부님께서 언제 기별을 해주시려나. 얼른얼른 이 제자를 불러줘야 할 텐데~.”
즐겁게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던 동천은 마당을 쓸고 있는 장 노인을 보게 되었다.
“어이! 할아범. 잘 지냈어?”
장 노인은 소전주가 안 하던 짓을 하자 두려워하면서도 굽실거렸다.
“예. 소전주님의 관심 덕택에 아직 정정합니다.”
동천은 진심으로 장 노인을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엔 좀 피곤해 보여. 봐! 땀까지 흘리잖아.”
지 때문에 긴장해서 땀을 흘린다고 했다가 느닷없이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장 노인은 성급히 심중을 내비치지 않았다.
“허허. 그렇군요. 역시, 안목이 예리하십니다. 실은 어제 무리해서 물건을 날랐더니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말이 맞아떨어지자 동천은 의기양양해졌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푹~ 쉬어.”
‘으으으, 도대체 이 소악마가 왜 이러는 거지? 젊은 것들하고 노는 게 싫증나서 이젠 나처럼 힘없는 늙은이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려는 겐가?’
만일 지금 자신이 소전주의 말을 들었다간 내일도 쉬어. 모레도 쉬어. 그리고 나중엔 평생 쉬어. 이런 신세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장 노인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정중히 거절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당을 쓰는 게 제 소임이기 때문에 이것만 마저 끝내고 쉬겠습니다.”
장 노인이 동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잘 마무리를 지었으나, 기분이 들떠있던 동천은 힘없는 늙은이에게 이것저것 다 해주고 싶었다. 동천은 장 노인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그가 들고 있던 대빗자루를 빼앗아냈다.
“그래? 그럼, 내가 특별히 대신 쓸어줄 테니까 가서 쉬어.”
깜짝 놀란 장 노인은 덜덜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어이쿠!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어찌 귀하신 소전주님께서 마당을 쓰신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쓸 터이니 빗자루 이리 주시지요.”
동천은 손을 들어 다가오려는 장 노인을 제지시켰다.
“걱정 말라니까? 히히. 오늘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래. 가서 쉬어.”
장 노인도 눈치는 있었기에 더 이상 매달리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제발 이번 일로 나중에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속으로 빌며 물러섰다.
“그, 그럼. 조금만 쓰시다가 피곤하시면 놓고 가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오후에 들러서 마저 쓸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가봐.”
동천은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저으며 장 노인을 보냈다. 대빗자루를 잡고 마당을 쓸던 동천은 예전의 자신을 회상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마당을 쓰니, 예전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그때는 참으로 고난과 역경의 나날들이었지. 아마도 그때의 값진 체험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 준 걸 거야. 대가리가 안 돌아가던 하천이. 우유부단의 대명사 춘천이. 그리고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나만을 우러러보던 추연이. 아아, 모두가 그립구나. 그래. 때가 되어 밖으로 나가면 시간을 쪼개서 걔들을 좀 만나 봐야겠다. 아차? 그러고 보니, 강진구 아저씨도 잘 지내는지 궁금하네? 아직도 표사로 지내고 계실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동천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마당을 다 쓸고 난 뒤였다. 빗자루를 내려놓은 동천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꿈결에서 헤어나지 못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쪽문 구석에서 소전주의 행동을 계속 염탐하고 있던 장 노인은 소전주가 마당을 다 쓸고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내려 땅을 쳐다보고, 또 똑같은 짓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침을 튀겨가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오오! 드디어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는가? 말세로다! 말세야!”
시녀 보영이는 전주님의 명으로 소전주님을 뵈러 왔다가 실성한 듯 떠들어대는 장 노인을 보고 속으로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역시, 이곳은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암한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의 물음에 보영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전주님의 명으로 찾아왔습니다. 소전주님은 안에 계신지요.”
“들어가거라.”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간 보영은 빙긋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소전주를 금세 볼 수 있었다.
“히히. 왔어? 무슨 일이야?”
보영이는 소전주가 기분이 좋을 때 찾아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전주님께서 소전주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동천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내심 좋아했지만 겉으로는 놀란 척을 했다.
“사부님께서? 왜?”
“다른 말씀은 없으셔서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때 날벼락이 떨어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막을 다 알고 있던 동천은 알겠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곧 갈 테니까, 사부님께 그렇게 전해.”
보영은 의외의 상황에 놀라했지만 지체 없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래그래. 히히. 갈 때 조심해서 가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예, 감사합니다.”
보영이 나가고 동천은 소연이를 불러 옷을 챙겨 입었다. 동천은 깔끔한 청색 비단옷을 입고 소연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됐지? 어때. 괜찮아?”
소연은 자신이 골라준 옷이 마음에 든 듯 활기차게 말했다.
“네. 아주 멋있으세요.”
“으히히. 네가 뭘 아는구나? 그럼, 갔다 올 테니까 민 할멈에게 무공이나 잘 배워. 아참? 그러고 보니 진전은 잘 되냐?”
주인님의 물음에 소연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주 재미있게 가르쳐 주세요. 뭐, 가끔 동물 피를 드실 때는 무서워 보이기도 하지만요.”
동천은 동물 피를 먹는다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할멈. 아직도 피 먹어?”
사부께서 주인님께는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무심결에 그 비밀을 털어놓은 소연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을 했다.
“아니에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드세요.”
쉽사리 인상을 펴지 못한 동천은 주위를 두리번 살피는 척하더니, 분위기를 잡고 조용히 말했다.
“너, 조심해. 그 할멈 언제 돌변해서 달려들지 모르니까.”
그러자 겁에 질린 소연은 울 듯한 얼굴을 했다.
“주인님. 무, 무서워요. 그런 말은 마세요.”
“히히! 그렇다는 얘기야. 새겨듣지 마.”
새겨듣지 말라고 해서 소연이 곧이곧대로 들을 리 없었다. 그녀는 이따가 사부에게 갈 때 꼭 화정이를 데려가리라 마음먹었다. 한편, 그런 소연을 뒤로하고 마차에 오른 동천은 기분이 좋아서 느긋하게 몸을 뒤로 눕혔다.
“아아, 무슨 선물을 받을까? 거참 기대되네? 야! 빨리 안 가?”
그 와중에도 마부를 다그쳐 단시간에 도착한 동천은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좌우를 돌아보았다.
“어? 어째서 이곳이 한가한 거지?”
그렇다. 응당 잔치가 열리면 이곳 앞마당이 북적거려야 하건만 북적은커녕 썰렁하기까지 한 앞마당이었다. 불안해진 동천은 주위에서 하인들이 인사를 하건 말건 제쳐두고 역천이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내달렸다. 그런데 동천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쯤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동천은 초향이를 비롯한 모든 시녀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건만 재빨리 몸을 날려 구석탱이에 숨었다. 그리고 고개만을 빼꼼히 내민 동천은 사부의 방 안에서 들려오는 격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진정하게.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아이네. 아마 자네가 계속 끼고 돈다면 더 이상의 성장은 무리일세.”
지금 목소리는 사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는데, 동천은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고민에 빠졌다.
‘가만?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으음. 왠지 재수 옴 붙은 듯한 저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서였지? 어디서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