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74화
동천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에 역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아무리 그래도 안 돼!”
딱 잘라 말하는 역천의 말이 끝나고, 잠시 여운을 가진 상대편은 스쳐지나가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나에게 청로향화주(晴露香火酒)가 조금 남아있는데 말야…”
그러자 돌연 태도를 바꾼 역천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혈귀옹에게 다가갔다.
“응? 뭐, 뭐라고? 청로향화주우?”
“어허. 왜 갑자기 흥분을 하는가?”
역천은 점잖게 뒤로 빠지는 혈귀옹에게 바싹 다가가 친근한 미소를 띄워주었다.
“헤헤헤. 자네, 갑자기 몇십 년은 젊어 보이는구먼. 그런 의미에서 축하주 겸 우리 그 술이나 한잔 듭세.”
아직 확답을 못 들었던 혈귀옹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내 오늘 가서 마저 먹어야겠군.”
“그래? 헤헤. 그렇다면 같이 가세나.”
흘러내리는 침을 쓱 닦아낸 역천은 얼른 혈귀옹을 이끌었다. 그러나 혈귀옹은 매정하게 역천의 팔을 뿌리쳤다.
“일 없네. 나는 이만 갈 터이니, 자네는 그 잘난 제자와 잘 놀아보게나.”
혈귀옹이 일 없다면 정말로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언사 한마디 한마디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급해진 역천은 우선 혈귀옹을 붙들어보자는 심산으로 말했다.
“알겠네, 알겠어. 우선 가서 얘기를 해 보세나. 자자.”
역천은 문을 열고 순순히 따라오는 혈귀옹을 이끌었다.
‘이크! 나온다!’
기겁을 한 동천은 문이 열리는 순간에 그동안 배워서 달리 써먹을 데가 없었던 신법을 발휘해 얼른 튀었다. 이젠 제법 능숙해졌는지 흥분해있는 역천의 눈을 속이고 쉽사리 도망칠 수 있었다. 자신이 타고 온 마차까지 달려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던 동천은 솟구쳐 오르는 의문에 애꿎은 눈알을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럴 수가. 어째서. 어째서…’
동천의 바로 옆에서 약전의 안전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행여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역천과 혈귀옹이 다가왔다. 역천은 술을 먹으러 간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불렀던 제자를 까먹고 있었다가 눈앞의 제자를 발견하곤 그제야 동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오오, 제자야. 왔느냐? 그런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느냐?”
동천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사부의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냥요. 헤헤.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혈귀옹은 씨익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푸르딩딩아.”
동천은 자신을 놀리는 듯한 혈귀옹의 발언에 화가 치솟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굽실거렸다.
“예에. 정말 오랜만이네요.”
역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혈귀옹과 동천을 살펴본 후 물어보았다.
“푸르딩딩? 그게 무슨 소리냐?”
혈귀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안 가는가?”
“아차? 그렇지? 제자야. 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 터이니, 며칠 후에 다시 오거라. 알겠느냐?”
이때 동천의 입에서 나올 말은 단 한마디였다.
“예.”
신이 나서 자신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혈귀옹을 이끌고 가는 사부의 뒷모습을 보고 동천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동천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분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뭐야? 그럼, 잔치는 물 건너간 거야?”
자신의 미래에 먹구름이 꼬이는지도 모르고 오직, 무산된 잔치에 화가 나 있었다. 동천은 괜히 지나가다 걸리는 인간들이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자들을 패고 다녔다. 동천이 화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방에 들어왔을 때 소연은 민소희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갔었기 때문에 다행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상을 들일 무렵, 술에 만취가 된 역천이 동천을 찾아왔다.
“아휴. 사부님, 웬 술을 이리도 많이 마셨어요?”
동천이 술 냄새에 코를 틀어막자 역천은 더욱 입을 벌렸다.
“으헤헤. 사랑스러운 나의 제자야. 그새 많이 큰 것 같구나?”
조금 맛이 간 행동을 보이는 역천이었지만 동천은 제자 된 도리로서 사부를 무시할 수 없었다. 동천은 재빨리 의자를 빼와서 역천을 이끌었다.
“다리가 풀리신 것 같으니까 여기에 앉으세요.”
역천은 동천이 권하는 의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흥에 겨워 주체를 못 했다.
“역시! 나의 제자로다! 크하하하!”
사부의 대소에 하마터면 침 세례까지 맞을 뻔했던 동천은 멀찌감치 물러서서 자리를 잡았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목이 말라 물을 따라 마신 역천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음. 그게 말이다. 이 사부가 또 술 하면, 사족을 못 쓰지 않냐? 그런데 오늘 귀옹이가 아주아주 맛이 있고, 감칠맛이 나며 청아함이 감돌고 영양가도 풍부한… 음. 영양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속세의 무지한 인간들은 평생을 가도 그 향기조차 맡을 수 없는 술을 마시자고 하기에 거절할 수 없어서 마시고 오는 길이란다. 그 술의 이름이 말이지. 청로향화주라는 건데 그 청아한 향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그 느낌이란 캬! 정말로 신선이 마셨다는 유래에 걸맞게 끝내 주더구나.”
“그러니까, 결론은 대단한 술이라는 말이네요?”
역천은 이야기의 핵심을 정확히 끄집어낸 제자의 총명함이 놀랍기 그지없어 벌떡 일어나 감탄을 마지못했다.
“오오, 똑똑하도다! 네 눈에서 형형한 오색 무지개 빛 서기가 흐르는 것을 보니, 내가 가르치긴 제대로 가르쳤나 보구나!”
방금 동천의 대답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역천은 술에 취해있어서 제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빛나게 보였다. 또한 찔리는 게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한편, 동천은 과분한 칭찬을 들은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사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사부님. 무지개색이 어떻게 오색이에요?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 아니었던가요?”
술에 취하면 무슨 헛소리를 못 하겠는가? 같은 맥락으로 마구 주절거렸던 역천은 제자의 물음에 당황했지만 얼른 그럴듯한 말을 지어냈다.
“그거? 험험.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이 세상 끝 어디엔가 전설의 오색 무지개가 있단다. 음. 말 나온 김에 언제 시간이 나면 그거나 보러 갈까나?”
거짓말을 하는 폼이 약간 어색했지만 그것은 만취라는 방패가 역천을 든든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동천은 그 방패 덕분에 의심하지 않고 손쉽게 넘어갔다.
“예? 정말이에요? 히야, 거기가 어디에 있는데요?”
거짓말을 했을 때부터 그것도 미리 생각해뒀던 역천은 신나게 떠벌려 댔다.
“거긴 말이지. 음. 남해의 끝. 신비의 섬. 이제껏 단 두 번밖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전설의 섬! 미지의 섬! 보랏빛 꿈을 펼치고 그곳을 찾으려다가 어느새 꼬부랑깽깽 할아범이 되어버린다는 섬! 세월을 무시하고 언제나 평화롭게 자리하지만 화를 내면 악귀조차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공포의 섬! 신선이 살고 있다고들 하지만 이 사부의 생각엔 개소리라고 생각되는 신선들의 섬! 또한…”
“예예. 아주 잘 들었어요. 결론은 뭐예요?”
아직 해줄 말이 더 남아있었던 역천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없이 제자의 물음에 입맛을 다시며 말해주었다.
“쩝. 그러니께 결론은 자부도(紫不島)란다.”
좋은 것 알아냈다고 생각한 동천은 섬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씹었다.
“자부도라. 자부도. 자부도. 히히. 저도 꼭 한번 가봐야겠네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제자를 보며, 같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역천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침울한 얼굴을 했다.
“불쌍한 것…”
동천은 사부의 뜬금없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뭐가 불쌍해요?”
정신을 차린 역천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다. 내가 뭐라고 했냐? 허허!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꾸나. 아참? 밥 안 먹냐?”
동천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부를 바라보았지만 “밥”이라는 소리에 그 의심을 저만치 제껴놓았다.
“그러네요? 히히. 내 정신 좀 봐. 야! 소연아! 밥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