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76화
“어서 가시죠.”
한심은 재빨리 앞장을 섰다. 동천은 오늘 하루도 놀 수 있다는 생각에 흥얼거리며 한심을 따라갔다. 곧이어 마차에 오른 동천은 마차가 약왕전 외부로 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 따라 동천은 한심의 애비가 더욱더 궁금해졌다.
“이봐, 한 당주. 요즘 아버님이 일하시는데 힘들어하시지?”
한심은 동천의 유도 신문에 가볍게 넘어왔다.
“글쎄요. 내색은 안 하시는데, 아무래도 철을 다루시기 때문에 엄청 피곤하실 겁니다.”
동천은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작은 실마리를 잡았던 것이다.
‘철? 그럼, 무기고 창고지기인가? 그런데 그 창고지기가 뭐하러 나를 부른 거지? 아아, 맞다. 사부님의 명으로 나한테 귀한 보검이나 도를 주려는 거구나. 히히히!’
속으로 득의의 웃음을 지은 동천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근데 말야. 한 당주 아버님이 뭘 주실까?”
한심은 뭔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예? 주다뇨?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요.”
아닌가? 하고, 생각한 동천은 전혀 흔들림 없이 말꼬리를 돌렸다.
“그러니까, 나는 한 당주의 아버님이 점심에 무슨 음식을 대접할까에 대해서 물어본 거야.”
“헤헤. 그런 말씀이셨군요. 죄송스럽게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미식가인 소전주님을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 같네요. 제 아버님께서 워낙 간소하고 평이한 음식들을 즐겨 드시기 때문입니다.”
돌려서 한 말이긴 하지만 기대 이하의 대답이 나오자 동천은 심히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제법 눈치가 있었던 한심은 소전주의 그런 심기를 눈치채고 좋게 말했다.
“하지만, 소전주님이 오시는 자리니 아버님도 식단에 신경을 쓰실 게 분명합니다. 아니, 확실할 겁니다.”
동천은 기분 좋은 소리에 흰 이를 가지런히 드러냈다.
“히히. 그렇겠지?”
소전주가 웃음을 되찾은 것을 보고, 한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확실한 끝마무리를 위해 얼른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구 말고요. 아마도 계란 부침 정도는 추가되지 않을까 싶네요. 헤헤.”
“…….”
상대의 신분을 고려해 대놓고 말하기 뭐했던 동천은 조그맣게 이를 갈며 한 당주를 노려보았다.
‘이 한심한 새끼가 주둥이 놀리는 것을 보게? 뭐? 고작 추가가 부침? 어우, 열 받아. 말 나온 김에 이 자식을 기름통에 부어서 확! 부쳐버릴까 보다.’
동천이 노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심의 얼굴에도 불안감이 고조되어갔다. 한심은 어설프게 웃음을 지었다.
“소전주님.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요? 헤헤. 남들이 보면 절 죽이려는 줄 알고 오해하겠습니다.”
‘으응?’
동천은 한순간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한 당주가 의외로 관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새삼 한심을 다시 보게 된 동천은 앞으로 조심해서 행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 내가 그 계란 부침을 생각하니까 너무나도 먹고 싶어서 잠시 그것을 떠올려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였어? 히히. 한 당주는 너무 앞서간단 말야?”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한심은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헤헤. 제가 좀 나이 값을 못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또 생각 없이 떠들어댄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덜컹-! 덜그덕!
동천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왜 이러는 거지?”
한심은 당황해서 밖을 내다보는 동천에게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동천은 마차가 산길로 접어드는 것에 대해 다그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여지껏 알고 있는 척했던 행동들이 모두 들통나기 때문에 자중해야만 했다. 대신 다시 한심의 아버님을 알아내기 위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런 곳에 계시면 한 당주 아버님이 불편해하실 것 같은데, 실제로 그래?”
한심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웬걸요. 오히려 아버님께서 자청하시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걸요.”
조금만 더 캐내면 뭔가 건질 것 같기에 동천은 박차를 가했다.
“그래? 그런데 그게 철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이런 산 속에 놓아두면 오히려 빨리 녹슬지 않아?”
한심은 소전주가 너무 무리한 대답을 요구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모른다고 버틸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머리를 쥐어짜 설명해주었다.
“글쎄요. 저는 거기까지 모르겠고, 아버님께서는 자고로 검(劍)이나 도(刀) 등 병장기를 만드는 곳은 산 속의 정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만검전을 이렇게 깊숙한 곳에 새로 지으셨죠. 원래는 교내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오로지 산의 정기. 그거 하나 때문에 옮기셨다고 합니다. 헤헤. 철이 녹스는 문제는 가셔서 직접 물어보시지요.”
동천은 드디어 한 당주의 아버지가 만검전 내부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오한이 서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동천이 그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그들 일행은 마침내 만검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 왔습니다. 소전주님. 어서 내리시지요.”
“알겠네.”
간만에 무게를 잡고 마차에서 내린 동천은 만검전이라 쓰여있는 묵빛 현판을 올려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한 당주. 여기가 진짜로 만검전 맞아?”
동천이 이렇게 물어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명색이 사전(四專) 중 한 곳인 만검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못 미치다 못해 아주아주 초라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동천이 보기에 아무리 잘 봐줘도 인근 고을의 촌민 부락 같이 보였다. 그래도 꼴에 만검전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내부에서는 쇠 두들기는 소리들이 힘차게 들려왔다.
“맞는 뎁쇼. 뭐가 이상한가요?”
아마 이곳이 익숙했던 한심은 동천이 확인차 물어보는 줄 알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동천은 한 대 쥐어박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억눌렀다.
“아냐. 들어가자.”
한심은 멋도 모르고 실실거리며 동천을 안내했다.
“헤헤, 그러시죠. 자 이곳으로…”
여러 장인들은 건장한 육체미를 자랑하듯 윗통을 벗고, 구릿빛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쇠를 단련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들은 한 당주와 동천이 스치고 지나가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망치가 달궈진 쇳덩어리를 내려칠 때마다 불똥이 튀느라 정신이 없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동천은 뜨거운 열기에 벌써부터 땀을 흘려댔다.
“후아! 한 당주. 나 덥거든? 그러니까 빨리 한 당주의 아버님을 뵙고 싶은데 어디에 계시지?”
한마디로 이곳을 벗어나자는 말이었다. 그 뜻을 용케도 알아차린 한심은 재빨리 용광로 같은 자리를 벗어났다.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동천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마냥 붉어져있었다. 만검전의 내부는 작은 것 같았다. 그러나 동천은 놀라거나 의아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처음 봤을 때의 인상에 비하면 이 정도도 넓은 거라고 생각했다. 만검전이라는 곳도 별것 아니네? 하는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심을 따라가던 동천은 그가 그나마 제법 잘 지어진 집 앞에서 멈추는 것을 보고 대뜸 물었다.
“다 왔어?”
한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이제 들어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만족의 웃음을 지은 동천은 턱짓으로 어서 네 애비를 불러보라는 시늉을 했다. 처음엔 소전주가 뭐 하는 짓인가… 했던 한심은 한참 후에야 그 뜻을 알아채곤 황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약왕전의 소전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한심이 큰 소리로 말했으나 내부는 잠잠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한심은 동천에게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한 뒤,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 계셨네요? 근데 왜 계시면서… 주무시네?”
그 후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방문을 살며시 연 다음 소전주의 동태를 살핀 한심은 소전주가 화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아버님. 일어나 보십시오. 소전주님이 오셨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일어나 보세요! 아? 일어나셨어요? 헤헤. 밖에 소전주님이…”
퍽!
“꽥-!”
동천의 눈치를 보느라 용감하게 아버지를 깨웠던 한심은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한심의 아버지는 이미 기절해있는 아들놈의 대갈통을 후려갈긴 후 짜증을 냈다.
“감히, 자는데 깨워? 고얀 놈!”
동천은 애비라는 작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격한 숨을 들이켰다.
‘헉? 설마. 저, 저 목소리는?’
동천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도 사지를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상대는 인상을 쓰며 나왔다가 동천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흐흐, 푸르딩딩아. 왔느냐?”
털썩!
동천은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그리고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어댔다.
‘이건 꿈일 거야. 그래, 꿈이야. 우선, 눈을 감고 차분히 심호흡을 해보자. 후우, 후. 후우, 후. 이젠 됐겠지? 아마도 눈을 뜨면 재수 없는 할아범은 꿈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없어져 있을 거야. 자, 눈을 뜨면…’
“뭐 하냐?”
‘흐억? 하늘이시여!’
엄청난 충격에 못 이겨 풀린 눈으로 혈귀옹을 바라보던 동천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예? 하, 하하. 그러니까. 헤헤헤. 너무 반가운 분을 만난지라 다리가 풀려서 잠시 정신통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혈귀옹은 뻔한 거짓말인 줄 알고 있었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속아 넘어가 주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반가워하니, 나 또한 반갑기 그지없구나. 잘 왔다. 이 만검전의 전주로서 약왕전의 소전주인 네가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하마. 흐흐흐.”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동천은 경련을 일으키는 얼굴 가죽을 힘들게 관리하며 혈귀옹에게 인사를 올렸다. 동천은 재수 없는 늙은이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흑흑, 난 이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