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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77화


그릇 만들기.

동천은 그날, 혈귀옹의 거처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왜냐하면 혈귀옹이 자고 가라고 권유(?)를 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혈귀옹을 무서워했던 동천은 그 말에 쪽도 못 쓰고 헤헤거리며 하룻밤을 지새웠다. 자리가 불편하다 보니 아무래도 잠이 안 왔다. 그 덕에 밤을 꼴딱 새게 된 동천은 벌게진 눈으로 의미 없이 시간만 때우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밖의 동태를 살피며 조심스레 기어 나왔다.

‘아무도 없군. 기회다!’

개새끼가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듯 네발로 기척을 죽이며 쪼르르 기어 나온 동천은 거침없이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헌데, 동천이 문을 나서는 순간 웬 시커먼 그림자가 자신의 행로를 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천은 진땀을 흘리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의 소유자가 길다란 곰방대를 입에 물고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 참, 희한한 놈이군.”

혈귀옹의 목소리가 동천의 귀를 파고드는 순간 동천은 벌떡 일어나 재수 없는 늙다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혈귀옹은 담뱃재를 톡톡 털어 낸 후 동천의 인사를 받았다.

“잘 잤다.”

아주 짧게 대답을 한 혈귀옹은 불안한 모습으로 서 있는 동천을 말없이 주시했다. 동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르신. 이만 가보겠습니다.”

간다는 소리에 동천을 바라보는 혈귀옹의 눈빛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혈귀옹은 윤기가 흐르는 갈색 곰방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눈빛의 변화 없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갈려고?”

얼굴의 모든 부분이 굳어 있는데 유독 입술만 웃고 있다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과히 편할 리 없었다. 동천은 소름이 쭈뼛 솟아오름을 느끼며 재빨리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니까 조금 있다가 간다는 소리입니다. 헤헤.”

그제야 굳어있던 혈귀옹의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지었다.

“우선 아침이나 먹자.”

동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 어르신.”

아침의 식단은 어제 점심과 저녁 때의 식단과 일치했다. 반찬은 시금치, 이름 모를 나물, 버섯무침, 감자. 이렇게 네 가지뿐이었다. 그나마 맛이 담백하고 감칠맛이 있어 먹을 수 있었으나 위에서 거부 반응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필이면 거기에서 걸릴 게 뭐람? 칫! 얼른 먹고 가야겠다.’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동천은 후딱 한 그릇을 해치웠다. 그것을 본 혈귀옹은 동천에게 새로운 밥그릇을 내밀었다.

“더 먹어라.”

말이 권유지 이건 완전히 명령조였다. 동천은 어쩔 수없이 공손히 두 손을 내밀고 혈귀옹이 건네주는 밥그릇을 받았다. 더 이상 맛없는 걸 계속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맛있게 먹는 척하면서 혈귀옹과 같은 시간대에 식사를 끝마쳤다.

“어르신, 잘 먹었습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혈귀옹은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동천에게 말했다.

“안 치워?”

“예?”

동천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혈귀옹은 손으로 밥상을 가리켰다.

“먹었으면 치워야 할 것 아니냐.”

밥상을 왜 자신이 치워야 한단 말인가? 동천은 기가 막혀서 멀뚱히 밥상을 바라보다 기어코 혈귀옹의 곰방대에 머리를 얻어맞고야 말았다.

딱!

“아이고! 예예. 알겠습니다. 제가 먹었으니 당연히 치우겠습니다.”

동천은 재빨리 움직여 상을 내갔다. 그 사이 곰방대에 불을 붙인 혈귀옹은 벽에 몸을 기댄 후 여유롭게 말했다.

“설거지도 해라.”

상을 내 가던 동천은 혈귀옹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안면을 구겼다.

‘윽! 저, 저 늙은이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감히 대 약왕전의 소전주인 나에게 설거지를 시켜? 으으!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성질이 난 동천은 나가다가 발을 헛디디는 척하면서 상을 엎어버렸다.

우당탕탕! 쨍그랑!

마음먹고 집어던졌기 때문에 요란뻑적지근한 소리가 귀 따갑게 들려왔다. 동천은 겉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이고, 이를 어쩌지? 어르신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발이 꼬여서 뒤엎었습니다.”

화를 낼 줄 알았던 혈귀옹은 의외로 침착한 모습이었다.

“괜찮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가만 있자…”

그는 이리저리 둘러보다 구석탱이에 놓여진 걸레를 발견하곤 그것을 동천에게 던져주었다.

“닦어.”

걸레를 집어든 동천은 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에, 그러죠.”

쓸데없는 짓을 벌여놨다가 되려 더욱 일이 늘어난 동천은 주둥이로만 씨부렁거리며 소리 없이 혈귀옹을 욕했다. 대충 닦았다가 봉변을 당할까 싶어 동천은 깨끗이 걸레질을 한 후 혈귀옹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려고?”

“헤헤, 가 봐야죠(너 보기 싫어서라도).”

혈귀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건 좋은데 네가 부숴놓은 밥그릇과 반찬 그릇들은 어쩔 거냐?”

늙은이가 다분히 걸고넘어지는 경향이 있었기에 동천은 신중히 대처했다.

“그건 제 책임이 확실하니 약왕전에 돌아가서 최고급 식기들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혈귀옹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구나. 네 놈은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알았더냐?”

상대가 조금 강하게 나오자 동천은 찔끔했다.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저기에 깨진 그릇들은 모두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다.”

그런 걸 당연히 알 리 없었던 동천은 일이 좀 꼬인다고 생각했다.

‘에이 씨, 늙은이가 그릇 좀 깨트린 것 가지고 되게 지랄이네.’

울화가 치밀었지만 동천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길을 모색했다.

“아? 제가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데 이를 어쩌죠?”

일이 생각대로 잘 풀려갔기에 혈귀옹은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나타난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내가 만든 식기가 아니면 집에서 밥을 안 먹는다. 다행히 똑같은 식기가 한 종류 더 있으니, 그 사이 네가 여기에 머무르며 그릇들을 만들어라. 알겠냐?”

늙은이의 헛소리에 기가 막혔는지 동천은 큰 소리로 되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혈귀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귀가 먹었느냐?”

동천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이해가 잘 안 가서요.”

혈귀옹은 동천을 빤히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다가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해서. 네가 깬 건 네가 만들라는 소리다.”

당황한 동천은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제, 제가요? 하지만 그런 건 아랫것들에게 시켜도 되잖아요. 꼭, 제가 할 필요가 있나요? 헤헤. 정 그러시면 제가 하인을 불러다 만들게 해서 대령하겠습니다.”

혈귀옹은 동천의 말을 듣고 호통을 쳤다.

“네놈이 지금 네 죄를 남에게 회피하겠다는 소리냐?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사부인 역천이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사부 얘기가 나오자 동천은 넙죽 엎드려 혈귀옹에게 빌었다.

“아이고, 어르신!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거룩하신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크나큰 잘못을 했습니다. 제가 그 식기들을 만들 테니 딱! 한 번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용서해 주시겠다고요? 감사합니다!”

상대가 용서를 해주기도 전에 지 혼자 용서를 받아낸 동천은 여린(?) 눈망울로 혈귀옹을 응시했다. 혈귀옹은 기도 안 찼지만 어찌되었든 결과가 중요했으므로 군말 없이 넘어갔다.

“네가 네 잘못을 깨달았으니, 넘어가기로 하겠다. 따라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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