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78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동천은 재빨리 일어섰다. 혈귀옹은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앞장섰다. 문지방을 건너 신을 신은 혈귀옹은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서 창고 비스름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니 창고가 분명했다. 관리가 소홀했던지 걸어갈 때마다 미세한 먼지들이 날리며 동천의 뒤를 따라왔다. 동천은 불가항력으로 그 먼지들을 들이마셨다.
“콜록콜록! 어르신. 여긴 뭐 하던 뎁니까?”
신기하게 혈귀옹은 먼지를 마시지 않았던 듯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했다.
“앞으로 네가 그릇들을 만들 곳이다.”
“예-에?”
동천이 이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는 바로는 도저히 작업할 곳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해서 바닥에 한번 뒹굴었다가는 먼지 무더기에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이곳에서 그릇을 만들라니. 동천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르신!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먼지의 산에서 작업을 하라는 거죠? 설마, 저를 죽이시려는 건 아니세요?”
듣고 보니 동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혈귀옹은 수긍의 뜻을 비쳤다.
“한 5년을 묵혔더니 먼지가 많이 쌓이긴 쌓였군. 음. 이런 환경에서는 정말로 사람을 잡겠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싹싹하게 말했다.
“헤헤. 그럼, 그릇은 다른 곳에서 만드는 거죠?”
대답 없이 밖으로 나온 혈귀옹은 한동안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곳저곳 둘러보던 혈귀옹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푸르딩딩아. 아무래도 이곳은 네가 치워야겠다. 저것들을 다 들어낼 수 있겠지?”
어디로 가서 대충 그릇을 만들고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던 동천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혈귀옹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치워요? 저길요? 제가요?”
“그렇다. 여기에 너 말고 또 있더냐?”
물론, 자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소도 청소 나름이었다. 먼지만 닦는 거라면 어떻게든 참고 해보겠지만 문제는 그 안에 잔뜩 쌓여있는 물건들이었다. 이건 도저히 어린 동천이 감당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레 겁먹은 동천은 간절한 눈으로 혈귀옹을 응시했다.
“어르신. 그냥, 먼지만 쓸어내면 안 될까요?”
그러나 혈귀옹은 그런 동천의 간절한 부탁을 매정하게 저버렸다.
“오늘 내로 치워놓아라.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있으마.”
“어르신!”
“시끄럽다. 조용히 치워라.”
혼자 남겨진 동천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럴 수가. 저 혈지랄이 지금 제정신인가? 나처럼 여리고, 나약한 아이에게 한가득 쌓여있는 물건들을 들어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오오!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시나이까. 저는 이런 상황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이럴 바에는 차라리 도망치고 싶습니다. 하늘이시… 응? 도망쳐?’
하늘의 계시를 받은 동천은 왜 자신이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한탄을 금치 못했다. 동천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얼른 도망치기로 작정했다.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기척을 죽이고 대문을 나선 동천은 안전함을 확인하고 냅다 뛰어 도망갔다. 살고자 하는 동천의 의지는 강했다. 동천은 허리띠를 풀지도 않고 엄청난 속력으로 만검전 내부를 가로질렀다.
“나는 역시 천재야! 으히히!”
마침내 만검전 입구까지 도달한 동천은 자유의 기쁨을 만끽하며 도약을 했다가 누군가에게 부딪혀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으윽! 뭐, 뭐야?”
동천은 구겨진 체면을 생각하고 화를 내며 재빨리 일어났다. 그러나 동천은 곧 헤픈 웃음을 지으며 굽실거렸다.
“헤헤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곰방대를 물고 있던 혈귀옹은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뒤, 긴 연기를 내뿜었다.
“흐음. 푸르딩딩아. 그러는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저요? 그러니까 그게… 아? 청소 전에 준비운동 차 뜀박질을 좀 했습니다! 예, 그거예요.”
혈귀옹은 씨익 웃더니, 곰방대로 가차 없이 내리쳤다.
딱-!
“윽! 아이고, 대가리야! 씁!”
혈귀옹은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천에게 냉정히 말했다.
“엄살 그만 피우고, 어서 움직여라.”
또 맞을까 두려웠던 동천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가, 갑니다! 가요.”
도망칠 때보다 더욱 빠르게 돌아온 동천은 우선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뿌연 먼지들이 동천에게 달려들었다.
“웁! 쿨럭! 켁켁.”
동천은 더 이상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얼른 빠져나왔다.
“후우. 후우. 죽을 뻔했네.”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던 동천은 들어가서 한번 휘저어 놓고, 먼지가 일어나면 도망쳐 나오는 수법을 반복해 오후가 다 되어서야 겨우 먼지 청소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 사이 동천이 입고 있던 푸르디푸른 청색 옷은 누렇게 변해버렸다.
“흑흑, 내가 애지중지하던 옷이 순식간에 변색되다니…”
한없이 슬퍼하던 동천은 때가 되자 울음을 그치고, 혈귀옹의 방으로 걸어갔다. 동천은 방문까지 조심히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긴장을 했는지 동천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저기, 어르신. 점심은 안 먹나요?”
안에서 기가 막힌 듯 실소가 들려왔다. 그러나 혈귀옹은 나쁜 뜻으로 실소를 한 게 아니라 동천이 너무나도 정확한 시간에 밥을 달라고 온 것 때문에 놀라워서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한 것이었다. 혈귀옹은 문을 열고 허락을 내렸다.
“그러자꾸나.”
신이 난 동천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헤헤. 일을 좀 하고 났더니 배가 많이 고프네요. 그런데 밥을 차리던 하녀는 어디에 갔나요?”
“내가 다른 곳으로 보냈다.”
동천은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그렇다면 다른 하녀는 언제 오죠?”
혈귀옹은 바로 대답했다.
“안 와.”
“왜요?”
아무것도 모르는 동천의 물음에 혈귀옹은 의미 있는 미소를 뿌렸다.
“흐흐, 왜냐하면 그 하녀를 대신해서 잡일을 해줄 사람이 어제 들어왔기 때문이지.”
“서, 설마?”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동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버렸다. 동천은 물어보는 것조차 겁이 나 손가락으로 자신이냐고 가리켰다. 혈귀옹은 그런 동천의 물음에 가차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다. 바로 너다.”
동천은 혈귀옹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열변을 토해냈다.
“어르신. 제 체면도 있지, 어떻게 약왕전의 소전주가 잡일을 한단 말입니까. 만일 제가 잡일을 한다고 밖으로 소문이 나 보십시오. 나중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니 생각을 바꾸셔서 다른 곳으로 보냈던 그 하녀를 데려오세요. 정 뭣하시면 제가 당장 가서 데려올까요? 그럴까요? 예?”
동천이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했지만 혈귀옹은 무서운 눈으로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서 밥이나 차려오너라.”
동천은 속으로 혈귀옹의 아구창을 후려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 들어간 동천은 여기저기 아무거나 들춰보며 먹을 것 같다 싶으면 다 꺼내서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밥솥을 들춰낸 동천은 밥을 푸려다 돌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정확히 2인분이라니… 나보고 굶어 죽으라는 소리인가?”
그렇다. 한 끼에 적어도 두 끼를 먹었던 동천으로서는 대단히 난감한 일이었다. 동천은 눈알을 디룩디룩 굴려가며 살아야 할 방도를 모색했다.
“으으, 어떻하지? 아마도 한 끼만 먹었다가는 이따가 쓰러질 텐데 뭐 좋은 생각이 없을까? 뭔가 분명히 있을 거야. 동천아! 너의 그 천재적인 머리를 사용해서 이 난관을 헤쳐나가 보렴! 동천! 너라면 할 수 있어!”
어떻게 하면 눈앞의 밥을 자신이 모두 먹을까,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동천은 어느 순간 번쩍이는 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 히히.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