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80화
“으랏찻차! 으음. 잘 잤다.”
동천은 이미 일 년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일어날 수 있었다. 어깨가 좀 뻐근하긴 했지만 어제 자기 전에 운기조식을 하고 자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잠은 따로 잔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만검전 전주의 거처답지 않게 조그마한 집이었다. 방도 손님용을 합쳐서 고작 세 개밖에 안 되는 그런 곳이었다. 만약, 동천이 혈귀옹과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면 아마도 죽음을 불사하고 탈출을 시도했을지도 몰랐다. 초여름이 지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다가오는 시점이었지만 아침 날씨는 선선한 게 딱 알맞았다. 동천은 밖으로 나가서 어제 자신이 청소를 끝마친 창고로 갔다.
“어? 짐들이 다 어디 갔지? 그새 누가 치웠나?”
어제 골아떨어졌을 때 만검전 장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들고 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동천은 그저 놀랍고 신기한 눈으로 없어진 상자들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그게 동천에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동천은 간단히 아침 운기조식을 취한 후 허리띠를 맸다. 요 일 년여 동안 달라진 게 있다면 당연히 경공의 발전이었지만 다른 하나를 굳이 대라면 허리띠의 변화였다. 예전에는 허리띠를 풀렀다 다시 매면 한식경 정도의 쓰러짐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때의 절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동천이 그 사실을 깨달은 건 한 달 정도 됐지만 녀석의 성격이 그러하듯 신기해하기만 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다. 잠시 후, 한심의 부름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동천은 혈귀옹에게 오늘의 과제를 받았다.
“뒷산에 좋은 재질의 흙이 있으니, 우선 그걸 퍼 가지고 만들도록 해라.”
그리하여 찍소리도 못 내고 뒷산에 오른 동천은 올 때 가져온 삽과 수레를 이용해 씨부렁대며 아무 흙이나 퍼댄 다음 가지고 내려왔다.
딱-!
“으엑! 왜, 왜 때려요!”
칭찬은 고사하고 곰방대로 두 대나 맞은 동천은 억울하다는 눈으로 혈귀옹에게 소리쳤다. 혈귀옹은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놈아. 아무거나 퍼온다고, 그 흙들이 다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줄 아느냐? 최상의 재질을 가진 흙을 퍼 와야지. 이런 건 만들자마자 깨져버려.”
동천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씨발, 그런 건 진작에 말해줄 것이지. 이 영감탱이가 두 번 일하게 만들고 어디서 지랄은 지랄이야? 콱! 이빨을 다 뽑아버릴까보다.’
동천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 혈귀옹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봐라. 이렇게 진한 황토색을 띠고 있어야 최상의 재질이다. 간혹 가다 색깔은 같으나 반죽에 적당하지 못한 종류의 흙도 나오니까 이걸 가져가서 비교해보고 퍼오거라.”
동천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흙덩이를 보고, 꼭 자신의 신세를 보는 것 같아서 무한한 비애를 느꼈다.
‘불쌍한 것. 바닥에 뭉개진 너의 그 모습은 어찌하여 지금의 나를 닮았더냐. 한번 밟히면 똥인지 흙인지 분간조차 못 할 너. 아아, 슬프도다. 파리나 꼬이지 않으면 다행인 게지…’
혈귀옹은 애새끼가 얼른 집어가지 않고 멀거니 서 있자 동천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을 거냐.”
“예? 가, 가요.”
퍼득 정신을 차린 동천은 냉큼 흙덩이를 집어서 도망치듯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막상 산으로 올라온 동천은 어디서부터 그 흙을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미친놈의 늙은이. 이건 나를 죽이려는 음모야. 내가 신이야? 그 영감이 준 것과 똑같은 흙을 나보고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더군다나 근처 야산도 아닌 이렇게 넓은 산중에서.”
대충 퍼갔다가는 아까처럼 맞을 수도 있기에 동천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한 곳을 지정해놓고 땅을 팠다가는 도로아미타불 될 것이 뻔했다. 동천으로선 그런 모험을 하기 싫었다. 우선, 산을 돌아다니며 눈대중으로만 찰흙을 찾아 나선 동천은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냥 돌아왔다가는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동천은 비스름한 흙이라도 퍼 가지고 왔다. 눈치를 살피며 창고를 지나치던 동천은 안에서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는 한심을 발견했다.
“어? 한 당주.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벽 끝에서부터 차곡차곡 벽돌을 쌓고 있던 한심은 소전주의 물음에 바로 대답해주었다.
“헤헤. 아버님의 명으로 소전주님께 알맞은 크기의 가마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덜 완성된 기와는 동천이 들어갔다 나올 정도로 자그마한 것이었다. 벽에서부터 작은 동산을 이루며 내려오는 가마는 입구 쪽에 와서는 일정하게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뼈대 정도의 모습이었지만 완성이 된다면 훌륭할 것 같았다.
“우와. 잘 만들었는데?”
동천의 칭찬에 한심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뭘요. 송구스럽습니다.”
동천은 새삼 한심이란 인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병장기 가문의 핏줄을 잇고도 할 일 없이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마지못해 약왕전에 들어간 한심. 그러나 한심한 놈이 다른 곳에 들어갔다고 해서 놀라운 놈으로 바뀔 리 만무했다. 은근히 하인들 사이에서도 한심한 놈으로 통했던 한 당주가 이런 숨은 재주가 있었을 줄 그 누가 알랴?
“아냐 아냐. 대단해! 한 당주에게 여러 가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니까? 한 당주. 이 김에 그 능력을 살려서 막노동판에 뛰어드는 건 어때?”
아무리 한심한 한심이라도 지금 생활과 막노동 생활의 차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행여 그런 곳으로 옮겨질까 봐 겁에 질려 했다.
“괜찮습니다. 소전주님. 저, 저는 이 생활이 편합니다.”
진짜로 알아듣는 한 당주의 모습을 보고 동천은 속으로 혀를 찼다.
“히히, 그냥 해본 소리인데 놀라하기는, 근데 밥은 안 줘?”
“줍니다요. 줍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한심은 손을 탁탁 털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점심을 먹을 때 제대로 된 흙도 못 퍼온 놈이 처먹기는 잘도 처먹는다고 혈귀옹에게 구박을 받은 동천은 오기로 한 공기 더 퍼먹었다가 결국에는 너무 무리를 해서 먹었던 걸 다 토하고야 말았다. 동천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랠 새도 없이 산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흑흑. 불쌍한 내 인생. 고작 흙이나 퍼 나르라고 태어난 것도 아닐진대, 재수 옴 붙어서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다니. 하늘님도 무심하시지. 흑흑흑.”
동천은 혈귀옹이 준 찰흙을 조물락거리며 아직 가지 못했던 곳을 찾아다녔다. 돌아다니는 동안 우울함을 달래던 동천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 해를 보았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서글픈 구절이 있었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요?
“그래. 흑흑. 불쌍한 것. 더 오래 남아있고 싶은데 달 새끼한테 밀려서 저무는 너의 그 아픔을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알랴. 아아, 슬프도다. 너의 그 슬픔이 나에게 전해져 오누나. 크흐흑! 어머니-!”
시 구절과 전혀 상관도 없는 어머니를 구슬프게 불러본 동천은 더 이상 흙을 찾을 기분이 아니라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왔다. 빈손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굶어야 했던 동천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창가의 달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그냥 달이 아니라 만월이었다. 그러자 동천의 뇌리에서 또 떠오르는 구절이 있었다.
-처마 끝의 보름달은 지고 싶어 지겠는가.
“흑흑, 그래. 내가 네 맘 다 안다니까? 해 새끼한테 밀릴까 봐 무서워서 파랗게 질려있는 거지? 걱정 마. 너에게는 내가 있잖아. 자식아! 힘내! 너까지 그러면 나는 어떡하라고… 아아, 처마 끝의 보름달은 지고 싶어 지겠는가. 저기 나는 철새들은 가고 싶어 가겠는가. 흐릿한 먹구름이 천천히 달빛을 가리우듯, 그녀 향한 내 마음도 가려질까 두렵노라. 흑!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는 애달픈 동천의 흐느낌에 옆방 저편에서 그 대답이 들려왔다.
“시끄러!”
어쩔 수 없이 동천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흑흑. 운치도 모르는 영감탱이. 코골며 자다가 숨 막혀 뒈져버렸음 좋겠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샌 동천은 다음 날 하루 종일 발이 부르트라 돌아다녔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지 혈귀옹이 원하는 흙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근 일주일이 지났을까? 오래전에 가마를 다 만들어 놓고, 놀고 있던 한심은 힘들어하는 동천이 안돼 보였는지 변소에 갔다온 김에 진한 황토색 흙을 작은 통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것을 본 동천은 깜짝 놀랐다.
“어-엇? 한 당주. 자네 이 흙 어디서 났지?”
한심은 씨익 웃은 후 몸을 돌렸다.
“따라오십시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흙을 찾아낸 동천은 샘솟는 눈물을 억누르며 한심을 따라갔다. 한심이 멈춘 곳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동천은 한심이 왜 멈추었는지 궁금했다.
“한 당주. 뒷간에서 왜 멈추는 거야? 혹시, 볼일 보고 가려는 거야?”
“헤헤. 아닙니다. 소전주님, 한번 이 주위를 자세히 들여다보시지요.”
“여기?”
한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특히! 이 부근의 흙을 잘 보시지요. 헤헤헤.”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동천은 무릎을 굽히고, 바닥의 흙을 한 움큼 쥐었다.
“이럴 수가?”
한심은 동천이 놀라하는 것을 보고 좋아했다.
“어떻습니까. 이 흙이 소전주님께서 찾던 거였죠? 그렇죠?”
동천은 이를 악물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찰흙이 손가락 사이로 볼품없이 비어져 나왔다. 한심은 뭐라고 말을 걸어보려다 소전주의 엄청난 기세 때문에 쫄아서 입을 다물었다. 동천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난 동천은 한심을 뒤로하고 묵묵히 걸어갔다. 방향은 혈귀옹의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