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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181화


‘이곳에 있으면서도 안 가르쳐 줘? 이 사악한 늙은이. 정의의 이름으로 죽여버릴 테다. 악은 지옥으로 갈지어다!’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동천은 폭발하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모퉁이를 돌아 혈귀옹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덜어주려는 듯 혈귀옹은 문 앞 근처에서 동천에게 등을 돌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흐흐흐, 영감이 아주 죽으려고 나와있구만? 좋아! 정의의 이름으로!’

동천은 양쪽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혈귀옹을 불러 제꼈다.

“어르신!!!”

“으음?”

혈귀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마치 ‘너 미쳤니?’ 하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허나, 동천은 미치지 않았다. 동천은 강하게 나갔다.

“할 말이 있습니다!”

혈귀옹은 동천을 잠시 쏘아보다 입을 열었다.

“말해보거라.”

큰 건 하나 터트리려고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려던 동천은 무언가가 자신의 눈을 시리게 하자 눈살을 찌푸린 후 고개를 비틀었다. 고개의 방향을 틀었던 탓인지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자신의 눈을 시리게 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한 동천은 격한 숨을 들이켰다. 혈귀옹은 뭔 짓인가,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말이 없느냐.”

재빨리 진정을 한 동천은 걷어붙였던 소매를 조용히 복구시켰다.

“헤헤, 다름이 아니라 그 흙을 찾아서요.”

“그래?”

혈귀옹은 신형을 돌려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에게 손에 든 것을 건네주었다.

“아직이네. 비록, 아가씨께서 수련용으로 쓰는 거지만 이 정도의 검은 널리고 널린 것일세. 이런 걸 드린다면 굳이 아가씨께서 주문 제작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니 좀 더 신경을 쓰게.”

무지한 동천이 보아도 명검 티가 팍팍! 나는 검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든 사내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사내가 물러가고 나서야 혈귀옹은 동천에게 다가왔다.

“그 흙을 찾았다고?”

이미 쫄아버려서인지 동천은 신중하게 대처했다.

“예, 어르신. 그게 바로 요 근처에 있었지 뭡니까? 헤헤.”

갑자기 혈귀옹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내 아들놈이 가르쳐줬더냐?”

그렇다고 했다가는 왠지 작살날 분위기였다. 뜨끔한 동천이 여기에서 취할 행동은 뻔한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한 당주는 알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황당해하는 동천의 물음에 혈귀옹은 굳어있던 얼굴 근육을 원상복구 시켰다. 그는 대답을 꺼렸다.

“말이 많다. 가보기나 해라.”

동천은 더 따지고 들 수 있었으나 후환을 염두에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혈귀옹을 안내한 동천은 뒷간 근처에 널려있는 흙들을 가리켰다.

“보세요. 이 흙들이 맞죠? 히히. 등잔 밑이 어두웠지 뭐예요. 어르신이 주신 흙을 들고 가다 여기에서 떨어뜨렸는데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니까 아 글쎄! 떨어진 흙과 바닥의 흙이 똑같더라고요. 나 참. 어쨌든 이 흙이 맞죠?”

우연이긴 해도 찾은 건 찾은 거였기에 혈귀옹은 인정하기로 했다.

“수고했다.”

신이 난 동천은 펄쩍 뛰며 좋아했다.

“히히히! 와아! 드디어 찾았다!”

혈귀옹은 즐거워하는 동천에게 시원한 찬물을 뿌려주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이제부터 그릇을 만들려면 고달플 테니까.”

혈귀옹이 찬물을 뿌리든 더운물을 뿌리든 지금의 동천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까짓 그릇이야 가만히 앉아서 만들면 끝나는 거니까 말이다. 더 이상 산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들떠있던 동천은 혈귀옹이 하는 말을 개소리로 치부했다.

“예예.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얼른 만들어서 대령해 드리죠. 히히히!”

동천은 모처럼 편하게 잠을 잤다. 다음날 동천은 뒷산 대신 도기실(陶器室)로 변한 창고로 출두했다. 놀랍게도 안에는 그릇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이 몸이 그릇을 만드는데 이 정도면 문제는 없겠군. 어제만 해도 없었는데 한 당주가 마련해 놓았나? 자식이 이런 건 잘 한단 말야?”

일을 하기에 앞서 흙을 안 가져왔다고 생각한 동천은 여유롭게 걸어가서 한 통 담아왔다.

“히히. 이제 반죽을 해야겠지?”

동천은 흙을 꺼내서 나무판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열심히 주물렀다. 그러나 한 것만큼 성과가 나오질 않았다. 반죽은커녕, 잘게 부서지기만 했다.

“뭐야 이거. 왜 반죽이 안 되는 거지? 혹시, 이게 반항하는 건가?”

흙은 공평했다. 문제는 만드는 인간이었다. 반죽이 안 돼서 괜히 흙을 탓하던 동천은 다른 흙으로 반죽을 시도했다. 허나, 방금 말했듯이 흙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흙을 다 써버린 동천은 새로 퍼 와서 차분히 반죽을 시도했다. 뭐,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뜻대로 되질 않아 화가 난 동천은 흙 통을 뒤엎어버렸다.

“이 개놈의 흙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똥간 근처에서 논다고 고귀한 내 손길을 거부하는 거냐? 아유! 열 받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빈둥거리던 한심은 소전주가 잘 하나 지켜보려고 왔다가 난장판인 내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소전주님! 무슨 일입니까? 혹시, 아버님이 엎으셨나요?”

동천은 마침 잘 됐다 싶어 한 당주에게 반죽이 안 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렇게 된 거야. 도대체 왜 반죽이 안 되는 거지?”

한심은 자신이 아는 문제였기 때문에 시원스레 답해주었다.

“헤헤. 그거요? 그건 소전주님께서 반죽에 필요한 하나를 빠뜨리셔서 그렇습니다.”

“그래? 그게 뭔데?”

“바로 물입니다.”

“물?”

한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든 반죽이 그러하듯 반죽에 꼭 필요한 요소가 바로 물이거든요. 한번, 물을 조금씩 섞어가며 반죽을 해보시죠.”

한심이 한심하게 보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동천은 한심의 말대로 얼른 실행에 옮겼다.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반죽을 하자 처음에는 변화를 못 느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찰떡처럼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동천은 그런 변화를 신기해했다.

“오오, 한 당주. 자네의 조언 덕에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구먼. 하하하.”

한심은 갑자기 변한 소전주의 어감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칭찬인지라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이, 뭘요. 헤헤헤. 이 정도야 쉽죠.”

동천이 방금 전의 모습에서 수련을 본 것은 착각일까? 칭찬을 받았을 때 하는 짓이 워낙 똑같았기에 순간이나마 두 사람을 동일시할 정도였다. 동천은 그 덕에 한심을 수련이라고 부를 뻔했다. 여하튼 일이 술술 풀려 나간다고 생각한 동천은 그릇 만들기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좋았어! 이제 본격적으로 그릇 만들기에 돌입해 볼까나?”

동천은 이미 반죽이 된 흙덩어리를 몇 번 주무른 다음 얇게 펴서 넓적 둥그렇게 말았다. 작품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거친 손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는 그릇은 누가 보더라도 폐기 처분 감이었다. 그러나 만든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훌륭해! 아아, 이것이 정녕 나의 작품이란 말인가? 어때, 한 당주.”

쉽사리 표정을 감추지 못한 한심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칭찬을 했다.

“아주 좋네요. 끝내줍니다.”

동천은 한심의 칭찬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지? 히히! 한 당주도 볼 줄 아는구나? 그럼, 수고스럽더라도 어르신을 불러오지 않겠어?”

“예? 아버님을 요?”

한심은 기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같잖은 작품을 보여줬다가는 애꿎은 자신까지 덤터기로 혼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천은 한 당주가 너무 놀라자 그를 수상하게 보았다.

“왜? 안돼?”

한심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갔다 오겠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후다닥 일어난 한심은 눈부신 속도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혈귀옹이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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