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82화
“초기 단계지만 그릇을 만들었다고?”
혈귀옹의 물음에 동천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어르신. 보시죠!”
혈귀옹은 동천의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
그는 말없이 동천의 작품을 감상했다. 침묵. 잔잔한 침묵의 파장이 동천을 옥죄어 왔다. 이 침묵이 싫었던 동천은 자진해서 목소리를 드높였다.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지요?”
혈귀옹은 힐끗 동천을 째려본 후 개 밥그릇이라 여겨지는 작품으로 다가가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버티지 못한 그릇이 보기 좋게 찌그러져 버렸다.
“아앗? 내, 밤하늘의 별무리가? 어째 이런 일이!”
그새 작품 명까지 붙인 동천은 찌그러진 자신의 작품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혈귀옹은 별 거지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자신을 불러낸 동천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주물럭거렸다. 아마도 그는 곰방대를 놓고 온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곧이어 그의 손가락이 안정을 되찾았다.
“푸르딩딩아, 이따위 것으로 다시 이 몸을 불렀다간 각오해라.”
동천은 자신의 작품 1호를 망가트려 놓고 가증스럽게 협박까지 하는 혈귀옹을 원수 대하듯 노려보았지만 잠시 후 영감탱이의 눈알이 커지는 것을 보고 얼른 굽실거렸다.
“예, 어르신.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혈귀옹은 대답도 않고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동천은 혈귀옹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쳐들었다.
‘감히 내 작품을 망가뜨려? 천벌 받을 늙은이! 흑흑, 어젯밤에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만든 나의 별무리가…’
동천은 서글픈 눈을 하고 자신의 작품을 어루만졌다.
“밤하늘의 별무리야. 미안하다.”
말이 끝난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미련 없이 밖에다 내던진 동천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일각, 이각, 반 시진, 두 시진.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만들고 또 만들었지만 탄생된 작품은 처음에 만든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빨리 만들고 돌아가려 했던 동천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아, 예술의 길이 이리도 어려웠단 말인가?”
동천이 한탄에 한탄을 거듭하고 있을 그때, 아버님의 호통이 두려워서 도망쳤던 한심은 할 일이 없어서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소전주님. 힘드시죠? 이것 좀 드시면서 잠시 쉬시지요.”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입에서 살살 녹는 마파두부를 준비해왔다. 마침, 힘이 들고 배가 고팠던 동천은 누가 빼앗아 먹을세라 입안에다가 꾸역꾸역 쳐 넣었다.
“맛있으세요?”
한심의 물음에 동천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우앙, 끄네 줘. 끄네 줘. (우와, 끝내 줘. 끝내 줘).”
“헤헤헤. 맛있으시다니 다행이네요.”
한심이 준비해 온 음식을 게눈 감추듯 해치워버린 동천은 포만감을 느끼며 바닥에 길게 누웠다.
“끄윽! 아 잘 먹었다.”
“피곤하셨나 봅니다.”
동천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말도 마. 아 글쎄, 어르신께서 나도 인정하고 한 당주도 인정한 작품을 뭉개 버리셨지 뭐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또 만드는데 진전이 없어.”
한심은 마치 자기 일처럼 염려했다.
“저런?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인데 큰일 났네요. 그런데 물레는 전혀 사용을 안 하셨나 봐요?”
동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레라니? 방앗간 옆에서 뱅글거리며 돌아가는 거?”
어떻게 그걸로 그릇을 만든단 말인가. 한심은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거요.”
한심이 가리킨 곳은 동천이 여태껏 앉아서 작업한 둥그런 원탁이었다. 그러나 물레를 찾을 수 없었던 동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한 당주. 저게 어떻게 물레야?”
한심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손가락으로 한참 밑을 가리켰다. 동천의 눈은 재빨리 한심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아, 있다! 히히. 그거 희한하게 숨어있었네?”
원탁 밑둥에는 어설프지만 이가 빠진 듯한 물레방아가 가로로 뉘어 놓은 형상으로 붙어있었다. 한심이 이가 빠진 부분에 손을 넣고 힘차게 돌리자 원탁은 빙글빙글 잘도 돌아갔다.
“여기 아래에 있는 물레를 발로 돌리시면 아주 편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릇 모형이 돌아갈 때 손으로 교정만 해주시면 되는 거죠. 헤헤. 끝내주죠?”
끝내주기는 했다. 그러나 동천은 그전에 한심한 자식을 먼저 끝내주고 싶었다.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가르쳐주었어야 할 게 아닌가? 새삼스럽게 그동안의 노고가 억울해지는 동천이었다.
“이봐, 한 당주. 내가 오늘은 좋은 거 많이 가르쳐줘서 그냥 넘어가겠는데 앞으로는 미리미리 가르쳐줘. 알겠어?”
동천의 목소리에서 진한 분노가 배어 나왔다. 겁을 먹은 한심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서 혈귀옹의 아들내미를 때릴 수 없었던 동천은 주먹이 우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끄응. 좋아. 마음이 넓은 이 몸이 참기로 하지. 퉤퉤! 그럼, 시작해 볼까?”
동천이 자리에 앉아서 반죽을 올려놓자 어느새 준비했는지 한심이 동천 옆에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다 놓았다.
“이 물을 사용하시면 모양을 만드실 때 무리가 없으실 겁니다.”
동천은 그릇 하나 만드는 것 가지고 제가 뭐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웠다.
“고맙네. 한 당주.”
이 원탁은 애초에 동천의 키를 감안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물레는 동천의 발에 맞춘 듯 착 달라붙었다. 처음에 물레를 돌릴 때는 힘이 좀 들었으나 회전력이 살아남에 따라 무리 없이 잘도 돌아갔다. 물에 흠씬 적신 반죽은 동천의 힘 조절에 따라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히히히! 이거 되게 재미있네?”
역시, 어린애인지라 동천은 자신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는 흙덩어리를 보며 즐거워했다. 옆에 붙어 있다가 소전주의 즐거움에 감염된 한심은 흥얼거리면서 소전주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와! 소전주님. 이젠 제법 그릇 같아집니다.”
“그렇지? 그렇지? 히히! 내가 이래뵈… 뭐? 그럼 이전의 내 작품들은 같잖은 것들이었단 말야?”
너무 들떠있어서 실언을 한 한심은 급히 변명을 해댔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소전주님의 실력은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서 아까 전의 그릇들과 지금의 그릇들을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굳어있던 동천의 입가에서 환한 꽃이 피었다.
“하하하! 한 당주! 그새 안목이 늘었구만! 그래, 내 옆에 있으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암! 그렇고말고!”
한심은 풀리는 긴장을 부여잡으며 구십도로 인사를 올렸다.
“황송합니다, 소전주님! 영광입니다, 소전주님!”
동천은 팔짱을 끼고, 근엄함을 풀지 않았다.
“거 참, 믿을만한 친구로군. 하하하!”
동천에겐 아부만 잘하면 모두 믿을만한 인간이었다. 혈귀옹은 바람 좀 쐴 겸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안에서 하는 짓을 보고 나지막이 혀를 찼다.
‘역천이는 그렇다 치고, 저런 한심한 아들놈을 둔 나도 불쌍하구나. 에잉! 차가운 마음을 지니라고 한심(寒心)이라 지었거늘 어찌 저렇게 자랐을고…’
혈귀옹은 기분이 상해서 바람이고 뭐고 안으로 들어갔다. 살기가 아니라서 혈귀옹의 기척을 못 느꼈던 동천은 그새 또 떠들고 있었다.
“한 당주! 다음 작품의 평도 부탁하네!”
한심은 결의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정확히 평가해 드리겠습니다!”
“으응? 자네의 눈에서 정기(精氣)가 흐르는 걸?”
“정말입니까? 아아, 드디어 제가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입니다.”
“축하하네. 하하하!”
의외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