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86화
소연이 속으로 울먹이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인지 사정화가 화정이의 팔목을 잡았다. 화정이는 눈꼬리를 꿈틀거린 후 주먹을 내질렀다. 설마 반격까지 할 줄 몰랐던 사정화는 얼떨결에 일장을 맞고야 말았다.
“아윽-!”
“꺄악!”
수련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토해냈고, 소연은 숨쉬기 곤란한 듯 가쁜 숨을 내쉬었다. 화정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재차 움직여 사정화의 얼굴을 가격했다. 허나, 사정화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화정이의 주먹을 스치듯이 피한 뒤 팔꿈치로 내공을 모아 화정이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화정이가 급히 피한다고 몸을 움직였으나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파앙!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사정화는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채 찌르기도 전에 자신의 팔꿈치가 튕겨나간 것이었다. 상대가 어정쩡하게 물러서자 화정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정화에게 달려들었다. 사정화는 이를 악물고 두세 걸음 물러섰다. 전 내공을 끌어올린 그녀는 수라마강수(修羅魔强手)를 펼쳤다. 옅은 색 푸른 물결이 그녀의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위험을 직감했는지 화정이는 뒤로 물러섰다.
“흥!”
사정화는 어림도 없다는 듯 바싹 다가갔다. 그녀는 한 손으로 화정이의 눈을 어지럽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머지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눈을 가늘게 뜬 화정이는 손을 묘하게 움직여 자신의 가슴으로 날아오는 상대방의 손을 거머쥐었다.
‘이, 이럴 수가…’
사정화는 의식 저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었다. 여태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부서지지 않았던 그 무엇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자존심. 그렇다. 바로 그녀의 자존심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초점을 잃은 사정화는 반격해오는 화정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내공을 거둔 상태에서 그대로 맞았다간 생명이 위태로웠지만 지금 사정화에겐 자신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았다. 자존심 자체가 그녀의 생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화정아! 멈춰! 그만 둬!”
화정이는 뚝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의 주먹은 사정화의 얼굴에서 불과 한 치(3cm) 차이로 멈춰있었다. 사정화는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수련은 울먹일 겨를도 없이 사정화를 뒤에서 받쳐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예?”
“…”
사정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충격의 여운이 가시질 않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무공도 아니고 가문의 무공을 시전해서 패했으니 어찌 괜찮겠는가? 소연도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었다. 수련은 사정화를 거세게 흔들었다.
“정신 좀 차려봐요! 아가씨! 정신 차려봐요!”
사정화는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기다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됐어. 그만해.”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사정화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슬렀다.
“그 강시. 화정이라고?”
소연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예, 아가씨. 마, 맞아요.”
사정화는 생글거리는 화정이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던 소연과 수련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숨을 죽였다. 한없이 바라볼 것만 같았던 사정화는 신형을 돌렸다.
“내가 부를 테니, 며칠 후 다시 데려와.”
의외의 명령이었지만 소연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사정화는 무거운 걸음걸이로 석실에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옆쪽에 약간 튀어나온 벽을 누르자 석문이 그르렁 소리와 함께 닫혔다. 사정화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흑흑흑.”
울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오늘 일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도록 사정화에겐 소식이 없었다. 그러니 소연이 성격에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있겠는가. 소연은 자기 혼자 있을 때마다 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점심을 깨작거린 소연은 침대 위에 엎어져서 훌쩍거렸다.
‘아아, 이제 난 죽을 게 뻔해. 그 일이 무사히 넘어갈 리 없어. 흑흑. 주인님도 못 보고 죽게 되는구나… 모두 내 탓이지 뭐. 애초에 화정이를 데리고 나간 내 탓이야. 주인님, 무서워요. 흑흑흑.’
소연의 베개는 금세 눈물바다가 되었다. 눈치 없는 화정이는 옆에서 작은 주인이 먹다 남은 음식들을 집어먹고 있었다. 소연은 화정이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굳이 말릴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오늘내일 하는데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오랜 시간의 슬픔으로 눈물샘이 말랐는지 더 이상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소연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서의 일 년은 참 행복한 나날이었어. 고아인 내게 귀엽고 깜찍한 수련이란 동생이 생겼고, 묵묵하지만 그래도 착한 도연이. 나를 성심성의껏 돌봐주고 가르쳐주신 사부님. 비록,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화정이. 그리고, 그리고 매일 구박하는 것 같아도 챙겨주실 건 다 챙겨주시고 항상 웃음 짓게 해주셨던 주인님…’
소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 날씨가 참 맑구나. 주인님께선 이런 날씨를 참 좋아하셨는데. 잘 계실까?’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다시 눈물이 샘솟는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주인님이 보고 싶었다. 아마 주인님을 못 보고 죽는다면 평생에 한이 맺힐 것 같았다. 소연은 조그마한 입술을 악물었다.
“그래. 가보는 거야.”
죽음을 앞둔 이 마당에 그 무엇이 두려우랴. 소연은 의지에 불타는 눈으로 동천의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몇 벌의 옷가지들을 빼낸 소연은 보자기에 둘둘 말아서 곧장 요리실로 달려갔다.
“아저씨. 주인님께서 드실 거니까 맛있는 요리로 푸짐하게 부탁해요.”
만칠이하고 히히덕거리며 놀고 있었던 주방장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라고? 그럼, 소전주님께서 오셨다는 말이냐?”
소연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안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뵈러 가려고요.”
다행이라고 생각한 주방장은 한숨을 돌린 뒤 두 팔을 걷어붙였다.
“알겠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소연은 반 시진 정도 쭈그리고 기다린 후에야 주방장이 싸준 음식들을 받아낼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그녀는 마부에게 부탁해 만검전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간 소연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침착하자. 침착한 모습으로 주인님을 뵈야 해.’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싶었던 소연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흐읍. 후-! 흐읍. 후우-!”
진정이 되었다. 두리번거리며 주인님을 찾던 소연은 얼마 안 있어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소연은 급히 그 사람에게 달려갔다.
“저기, 한 당주님 맞죠?”
할 일이 없어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한심은 자신을 알아보는 예쁘장한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런데 넌 뭐 하는 아이냐?”
소연은 기뻐하면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약왕전 소전주님의 하녀인 소연이라 합니다.”
한심이 소연을 알 리 없었다. 허나, 약왕전의 소전주는 누구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는 반갑게 소연을 맞이했다.
“오오! 네가 소전주님의 하녀라고? 잘 왔다. 그런데 뭐 하러 왔냐?”
“주인님 좀 만나 뵈려고요.”
소연의 말에 한심은 곤란한 모습을 보였다.
“얘야. 소전주님은 만나실 수 없단다.”
풀썩!
소연이 가져온 보따리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못 만난다니. 여기까지 와서 만날 수가 없다니…’
소연은 절망 어린 눈으로 한심에게 매달렸다.
“한 당주님. 제가 급해서 그래요. 잠깐만 뵙고 갈게요. 예? 잠깐만요.”
한심은 여러 장인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당황해했다. 왜냐하면 “저 애 누구야?”로 시작된 장인들의 이야기가 마무리쯤에서는 “혹시, 공자님의 숨겨 놓은 자식이 아닐까?”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한심은 앞길이 창창한(?) 이때에 혼사 길이 막히고 싶지 않았다.
“아, 알았으니까 빨리 따라와.”
“감사합니다. 당주님.”
소연은 기회를 놓칠세라 떨어트린 물건들을 집어 들고 한심을 따라갔다. 사실, 혈귀옹이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때마침 그가 잠깐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소연은 운도 좋은 셈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혈귀옹의 거처로 안내되었다.
“잠시, 기다려라. 내가 소전주님을 모셔올 터이니.”
소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예에…”
한심은 소연을 마당에 남겨두고 도기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주인님을 기다렸다.
‘아아,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그새 많이 변하셨을까? 아냐, 주인님은 그대로 이실 거야. 겨우 두 달인데 뭐.’
점점 가슴이 뛰었다. 소연이 약간 붉어진 얼굴로 달라진 동천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때 도기실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는 소연을 보고,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 진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