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87화
두어 달 전.
동천은 그릇을 만든 첫날, 그렇게 퇴짜를 맞은 후 각고의 노력으로 제대로 된 그릇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소요된 시간은 정확히 이 주일이었다. 동천의 원래 성격대로라면 단 하루도 못 견디고 혈귀옹에게 새로 만든 그릇을 보여줬겠지만 그릇을 만드는 게 의외로 재미있었고, 결정적으로 한심이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그 내용을 간추리면 ‘소전주님은 더욱 위대한 그릇을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였는데 단순한 동천은 의지의 화신이 되어 그릇 만들기에 정성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러니 완성도 높은 그릇이 안 만들어질래야, 안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마침, 한심이 옆에 있을 때 그릇을 만들어낸 동천은 솟아오르려는 감동의 눈물을 꾹 참고 떨리는 손으로 초벌구이를 마친 그릇을 집어 올렸다.
“오오! 장하다, 동천! 위대하다, 동천! 으하하하! 네가 드디어 해냈구나!”
짝짝짝짝-!
한심은 옆에서 박수를 쳐댔다.
“소전주님. 정말로 훌륭한 작품입니다. 이 정도면 아버님께서도 만족해하실 게 분명합니다.”
동천은 마침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릇을 소중히 내려놓았다.
“한 당주. 자네도 수고했네. 자네의 공이 크네.”
소전주의 칭찬에 한심은 고개를 약간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그도 동천 못지않게 감격했던 것이다.
“뭐, 뭘요. 훌쩍. 제가 한 게 있나요.”
동천은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
‘그건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저 녀석이 한 게 없잖아? 그나마 해준 거라곤 밥하고, 주둥이 놀리는 것. 또 뭐가 있었나?’
없었다. 그러나 동천은 차마 한심에게 모진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래. 이 넓고도 넓은 마음으로 한심을 포용해주자. 히히히!’
한심은 수상한 웃음을 짓는 소전주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응? 뭘?”
“그러니까, 왜 혼자 킥킥거리시냐는 거죠.”
동천은 뜨끔했으나 짐짓 딴청을 피웠다.
“내가? 에이, 자네가 잘못 본 거겠지. 아? 그릇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어르신께 검증을 받는 일만 남았네? 한 당주. 어르신 좀 불러주시겠어?”
한심은 중요한 일도 아니니 넘겨버리고 동천의 말을 따랐다.
“헤헤. 알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처럼 신나 하며, 아버님을 부르러 뛰어갔다. 만일에 대비해 곰방대를 물고 온 혈귀옹은 동천이 내민 그릇을 보고, 희미한 탄성을 질렀다.
“흐음. 괜찮군.”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소리인가? 동천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렇죠? 그렇죠? 헤헤.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이름하야 고뇌하는 달무리! 캬~! 이름 한번 죽이죠?”
혈귀옹은 때릴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다 봐주기로 했다. 기대도 안 했는데 그나마 이 정도가 어딘가. 적어도 삼 개월은 족히 걸릴 줄 알았던 그의 입장에서는 동천이 대견할 따름이었다.
“좋다. 네가 깬 그릇이 정확히 아홉 개니, 부엌의 그릇들을 참고삼아 크기별로 만들도록 해라.”
‘아, 아홉 개? 그럼, 앞으로 여덟 개라는 소리?’
동천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비록, 고뇌하는 달무리를 이 주 만에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동천이 만든 게 아니라 한심이 심심해서 만들었던 것을 동천이 가로챈 거였다. 물론, 한심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혈귀옹은 동천의 모습에서 무언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푸르딩딩아, 안색이 안 좋구나.”
급히 정신을 차린 동천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정색을 했다.
“아닙니다. 헤헤. 그럴 리가요. 이제 여덟 개면 땡이죠? 쉽네요. 암. 그렇고말고요. 맡겨만 주십시오.”
혈귀옹은 씨익 웃었다.
“내 지켜보지.”
“헤헤, 어르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다음 날부터 혈귀옹은 빈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다. 그는 동천 옆에 앉아서 푸르딩딩이 하는 짓을 빤히 주시했다.
“어째 솜씨가 퇴보하는 것 같구나?”
한순간 동천의 몸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으나 실타래 풀리듯 풀리는 것 또한 한순간이었다.
“그래요? 에이, 잘못 보셨겠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전보다 더 나은 것 같은데요?”
혈귀옹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속 하려무나.”
굽실거린 동천은 혈귀옹의 시선을 피하며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신 같은 늙은이.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으음. 아무래도 저 늙은이가 눈치를 채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동천은 혈귀옹이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끈질긴 혈귀옹은 동천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두 인간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동천이 혈귀옹의 눈치를 보는 것도 지쳐갈 무렵, 마침내 동천에게 기회란 놈이 찾아왔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 터이니, 그릇 만들기를 계속하거라. 그동안 보아온 게 있으니 대충 만들 생각은 말고.”
한 달. 근 한 달 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이런 기회를 동천이 놓칠 리 있겠는가?
“다녀오십시오. 어르신!”
혈귀옹은 동천이 너무 좋아해서 안 갈까 하다가 그것 때문에 남는다는 게 유치해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만검전 밖에까지 배웅을 나간 동천은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늙은이 때문에 재빠른 행동을 개시했다.
“어이! 한 당주!”
방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도둑잠을 자고 있었던 한심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저, 안 잤어요! 정말이에요! 정… 어? 소전주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웬일은. 자네 혹시, 시간 있나?”
한심에겐 널리고 널린 게 시간이었다. 그는 동천의 기분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있기는 한데, 무슨 일이신지.”
동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히히. 별거 아냐. 지금 어르신이 잠깐 나가셔서 같이 좀 있자고.”
“왜요?”
“왜 긴 왜야. 혼자 하려니까 심심해서 그렇지. 거기다가 예술 하면 한 당주 아냐. 그래서 같이 있자는 거야.”
한심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동천을 우러러보았다.
“오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셨다니, 영광입니다!”
동천은 성공한 자의 웃음으로 보이며 한심을 도기실로 이끌었다. 동천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드디어 작전에 돌입했다.
“한 당주. 그냥, 앉아있으려니까 심심하지 않아?”
전혀 안 심심했다.
“헤헤. 괜찮습니다. 저야 일만 안 하면 그게 사는 보람인 걸요.”
‘자랑이다. 멍청아…’
속으로 중얼거린 동천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야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나태해지면 뚱뚱해지기 마련이야. 자네 혹시, 요 근래에 들어 살찐 걸 못 느꼈어?”
얼른 장가를 가서 어여쁜 마누라와 오순도순 살고 싶은 게 꿈인 한심에게 살이란 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처음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앗? 지금 보시기에 살이 찐 것 같습니까?”
동천은 의외의 반응에 놀라했으나 오히려 잘 됐다 싶어 고개를 돌려 한심을 외면했다.
“으음. 그러니까. 그게, 내 입으로는 차마…”
하얗게 질려버린 한심은 어린 동천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눈물 어린 호소를 했다.
“어이구, 소전주님! 제가 살이 찐 거죠? 그렇죠? 크윽! 이제 장가 가긴 다 글렀구나. 그 누가 뚱땡이를 좋아하겠는가? 아아, 나의 꿈이 사라져간다.”
한탄을 금치 못하는 한심의 어깨에 작은 손이 올려졌다. 당연히 동천이었다.
“아직 절망은 이르네.”
순간 한심의 눈이 반짝였다.
“그, 그럼?”
동천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법은 있어. 바로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릇을 만드는 것이네.”
한심의 동공이 약간 흔들렸다.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저기요. 제가 살 빼는 것과 그릇을 만드는 것에 무슨 공통점이 있나요?”
동천은 아직도 그런 것을 모르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아! 한 당주. 자네는 인생을 헛살았구만. 잘 듣게. ‘당신도 일주일이면 반안과 송옥.’이라는 책자를 들춰보면 정신 편에서 이런 말이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