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90화
동천은 흐느끼는 듯하지만 은근히 완고한 소연 때문에 결국 제대로 된 목욕을 하게 되었다. 혈귀옹은 소연이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눈감아주었다. 아마 하루 정도는 봐주려는 것 같았다. 다행히 소연이 가져온 보따리 안에는 향료가 들어있었다. 시원하게 목욕을 한 동천은 소연이 마련해놓은 새로운 옷을 입었다.
“자! 됐지?”
소연은 주인님과 새 옷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네, 다른 사람 같아요.”
“그래? 히히. 그런데 웬일이냐?”
소연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요. 이유는 없고요. 문득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왔어요.”
동천은 소연이 무슨 표정을 짓던 자신이 궁금한 것만 물어보았다.
“사부님은 잘 계시고?”
“전주님은 주인님이 이리로 오시고 바로 다음 날 외부로 출타하셨어요. 아마 한동안 보시기 힘들 거예요.”
사부님이 외부로 나가셨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동천은 그동안 의문시했던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건 음모야!’
동천은 사부가 나가는 틈을 타 혈귀옹이 자신을 감금(?)해놓고 근 두 달 동안 부려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
‘천재인 내가 이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를 이제서야 풀었다니. 아아, 수치로다!’
소연은 갑자기 먼 산을 응시하는 동천을 흔들었다.
“주인님.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동천은 그제야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알았어. 그만 흔들어.”
소연은 동천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짧은 침묵 끝에 코를 훌쩍거렸다.
“흑흑…”
“또 왜 울어.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냐?”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주인님이 잘못하기는요. 잘못이라면 저한테 있죠.”
동천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소연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망울로 동천을 응시했다.
“아세요…?”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이마에 핏대를 올리며 소연을 다그쳤다.
“너, 내 방 청소하다가 물건 하나 깨뜨렸지? 그렇지? 아휴! 열 받아!”
“흑흑흑흑!”
위로는커녕, 자신의 맘도 몰라주는 주인이 야속했는지 소연은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동천은 심상치 않은 소연의 울음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울고 있는 소연에게 바싹 다가간 동천은 그녀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야. 그럼 뭐야. 이 주인님에게 다 털어놔봐.”
소연은 눈물을 꾹 참으며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동천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흑흑! 제가 나흘 전에 화정이를 데리고 수련이를 보러 갔는데요…”
죽음을 앞둔 소연의 서글픈 이야기였지만 동천은 듣는 내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이히히! 그년 쌤통이다! 아이구, 착한 우리 화정이! 내가 얼른 가서 이뻐해줘야 할 텐데. 푸히히히!’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한참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던 소연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동천을 보게 되었다. 그걸 본 소연의 마음에는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주인님은 제가 죽는 게 즐거우신 거죠? 그렇죠? 흑! 야속하세요! 아무리 제가 주인님의 맘에 안 들었어도 그렇지. 어떻게… 어떻게! 으앙!”
동천은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시끄러워 얼른 소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이 계집애야! 누가 너 죽는 것 때문에 웃은 줄 알아?”
소연은 믿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면요?”
“자식이. 죽긴 왜 죽냐? 아가씨가 그렇게 쪼잔한 여자인 줄 알아? 아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방금 내가 웃은 것은 네가 너무 앞서가서 웃은 것뿐이야.”
소연은 하얀 콧물을 들이켠 후 말했다.
“훌쩍!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더러워 보였는지 동천은 약간 물러섰다.
“너도 참 불쌍하다. 어쨌든 이 주인님이 해줄 말씀은 안! 죽! 어! 이니까, 그만 울어.”
소연은 동천의 말을 듣고도 불안했던지 애꿎은 옷깃만 구겨댔다. 슬슬 짜증 나기 시작한 동천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평소 같으면 도망을 갔겠지만 오늘의 소연은 확실히 달랐다. 그녀는 마치 마지막 인사를 올리듯 신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을 뵈어서 기뻤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제가 가져온 보따리들에는 오늘 만들어온 음식들과 옷가지가 들어있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죽는다면 화정이는, 화정이는… 흑!”
소연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달려나갔다. 동천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소연을 따라가고 싶었다. 허나, 그의 발은 소연을 따라가지 않았다. 동천은 소연이 가던 말든 보따리의 행방을 찾으러 온 사방을 이 잡듯 돌아다녔다.
“꿀꺽, 이게 어디로 간 거지?”
괜히 침만 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천이 당도한 곳은 혈귀옹의 방이었다. 살금살금 걸어가 귀를 기울이자 쩝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수가? 저 늙은이의 진정한 신분은 도둑놈이었던 말인가? 정녕, 그러했단 말인가?’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빨리 몸을 돌린 동천은 딱딱하고 탄력 있는 곰방대의 기습을 받았다.
“으-윽! 어르신?”
혈귀옹은 곰방대로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쥐새끼처럼 무엇을 엿보았던 게냐.”
동천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헤헤, 아닙니다. 지나가다 들린 것뿐입니다.”
혈귀옹은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동천에게 턱짓을 했다.
“들리려 했으면 들어가자.”
동천은 바싹 긴장했다.
“예, 어르신.”
동천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한심은 무려 육인분이나 되는 음식들을 싹 쓸어버린 후 이를 쑤시고 있었다.
“어라? 웬일로 두 분이 같이 오셨어요? 꺼억! 아, 맛있었다.”
‘개, 개새끼!’
동천은 혈귀옹 앞이라 차마 욕을 못했다. 그러나 의외로 혈귀옹은 동천의 편을 들어주었다.
휙, 퍽! 휙, 퍼억!
“컥-? 아, 아버지. 으악!”
곰방대로 복부와 대갈통을 맞아버린 한심은 대자로 뻗어버렸다.
“못난 놈!”
혈귀옹은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동천은 뭐가 뭔지 잘 몰랐으나 어쨌든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동천은 이미 기절해 있는 한심의 배때기를 살며시(?) 지려 밟았다.
“꾸르르르… 쿨럭! 크-웩!”
푸아아아-!
한심의 입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 음식물 찌꺼기가 허공 위로 치솟아 올랐다. 동천은 전혀 예상 못한 전개에 찌꺼기의 일부를 몸으로 받아버렸다.
“으악! 묻었다!”
잽싸게 튀어나온 동천은 앞가슴 가득 묻어난 오물을 보고 코를 틀어막았다.
‘더, 더러운 새끼! 내가 처음 볼 때부터 알았다. 웁! 냄새 한번 고약하네!’
냇가로 달려간 동천은 아래위 모두를 벗어서 물속에 처박아 놓았다. 그리고 동천은 발가벗은 몸으로 물속에 들어가 소리쳤다.
“으아아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마음에 안 들어! 씩씩. 다 죽여버릴 테다!”
동천은 위험 수위까지 도달해 있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화풀이 상대를 찾던 동천은 물속에서 유유히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었다.
“오냐. 너 잘 만났다. 죽어라! 죽어, 이 새끼야!”
동천은 허리띠를 풀고 있는 상태여서 내공의 사용이 가능했다. 처음엔 무식하게 물고기를 쫓아다녔던 동천은 시간이 흐르며 적응이 되어가자 신법을 응용해 물속에서 움직였다. 한결 나아진 몸놀림으로 물고기에 근접한 동천은 발을 휘둘러 물고기를 쳐냈다.
츄아악-!
거친 물살이 퍼져나가며 세네 마리의 물고기들이 밖으로 튕겨나갔다. 물고기들은 기절했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까불고 있어. 캬하하! 천하무적 동천님이시다! 다 덤벼!”
역시, 혼자 발악하는데 강한 동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