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92화
소연은 어디에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목표를 세우시는데 화정이가 필요한 건가요?”
사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그러기 위해서는 네 강시가 필요해. 연습상대로 말이야.”
소연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가 살며시 옆으로 돌렸다.
“그, 그치만 화정이는 제 강시가 아니라 주인님의 강시입니다. 그래서 제 입장이 좀…”
“동천은 내 하인이야.”
그렇게 말하면 소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가씨의 뜻에 따라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사정화의 안색이 미약하나마 풀어졌다.
“너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을 거야. 무조건 여기에 머물라고 하지는 않겠어. 그 대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만 찾아와.”
소연은 더 자세한 사항을 듣고 싶었다.
“시간대는 어떻게 되나요?”
“아침, 점심, 저녁 중 네 마음대로 해.”
고개를 끄덕인 소연은 사정화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화정이를 연습상대로 쓰시겠다는 것은 저번처럼 서로 손속을 주고받겠다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해.”
소연의 눈이 약간 커졌다.
“예? 제 역할이라뇨?”
사정화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만약 그 당시, 네가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주 큰 상처를 입었을 거야. 그래서 내가 위급한 상황에 몰렸을 땐 저 강시의 공격을 멈추게 할 네가 필요하다는 얘기야.”
듣고 보니 그랬다. 하지만 소연은 사정화의 이야기에서 조금 미진한 부분을 발견했다.
“저기, 제가 주제넘게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요. 화정이의 동작을 멈추는 시기는 어떻게 하죠?”
사정화는 좀 더 설명해 보라는 시선을 보내주었다. 그래서 소연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화정이와 대련을 하실 때 고의적으로 물러나시거나 그와 비슷한 때가 있을 텐데,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화정이에게 멈추라고 한다면 대련을 하시는데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뜻밖이었던 듯 사정화는 소연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녀는 소연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대답해주었다.
“꽤나 세심하구나. 그건 걱정하지 마. 그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멈추라고 말할 테니까.”
“예, 아가씨.”
사정화는 팔짱을 풀고,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소연은 깜짝 놀랐다.
“지금이요?”
“간단하게 조금만 할 거야. 대충 이렇게 연습을 한다는 걸 잘 보라고 말이야. 소연아. 강시에게서 떨어져.”
명령대로 멀찌감치 물러난 소연은 머뭇거리다가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강시가 아니라 화정이에요…”
사정화의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말아 올려졌다.
“알았어. 이제부터는 화정이라 부를게.”
“감사합니다, 아가씨.”
“시작한다.”
사정화는 차분히 숨을 고른 후 전 내공을 끌어올려 화정이에게 다가갔다. 화정이는 생긋 웃으며 사정화를 반겼다. 그러나 사정화는 예고도 없이 화정이의 복부를 강타했다. 전혀 무방비의 상태였는데도 오히려 때린 이가 물러섰다. 그런데도 사정화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초혼강시야.”
저번 때와는 달리,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화정이의 안색은 미묘하게 변했다. 반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그 사이 사정화에게 얻어맞은 화정이는 고개를 돌려 소연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사정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왜 덤비지 않는 거지?”
그 이유는 소연도 몰랐다.
“그,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화정이가 덤비지 않았던 것은 때리는 것과 건드리는 것의 차이를 몰라서였다. 간단한 차이였지만 화정이에게는 다소 벅찬 차이였던 것이다.
“나에게 덤비라고 명령을 내려.”
소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화정아. 네 앞에 아가씨 있지? 으음. 그 아가씨가 너를 때리셨거든? 그럼, 너도 반격해야 하는 거야. 알았지?”
대충 감을 잡은 화정이는 사정화에게 덤볐다. 사정화는 화정이의 어설픈 주먹을 피하며 곧바로 반격을 취했다. 상대의 발에 걸려 넘어진 화정이는 부스스 일어나더니, 무공을 사용했다.
“어림없어.”
비록, 타격은 못 줘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때는 너무도 놀라서 어이없이 당했던 거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사정화는 가볍게 피한 다음 화정이의 등 뒤로 돌아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렇지만 사정화의 손목에 통증이 밀려왔다.
“윽!”
사정화는 손목을 부여잡고 물러났다. 화정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돌리며 팔을 휘둘렀다. 사정화는 고개를 숙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비전 신법인 수라잠연공(修羅潛然攻)을 사용해 옆구리로 파고들어 허벅지를 가격한 후 화정이가 자신을 내칠 때 다른 곳으로 돌아가 때리기를 반복했다.
‘쉽사리 당하지는 않아. 그때 당했던 것은 경공을 사용 안 했기 때문이야. 경공을 사용하면 저 강시는 나를 건드릴 수조차…’
“아니?”
사정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 헛손질만 하던 화정이가 갑자기 경공을 사용해 그녀를 따라붙었던 것이다. 화정이는 요염한 미소를 뿌리며 거센 권풍을 일으켰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거리였다. 결국, 사정화는 손해 보는 셈치고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화정이의 야무진 주먹은 기다렸다는 듯 사정화의 가슴에 짓쳐들었다.
“아악-!”
고통의 비명을 내지른 사정화는 조그마한 입에서 선홍색 핏줄기를 흘리며 쓰러졌다. 파랗게 질린 소연은 급히 화정이를 제지시켰다.
“그! 그만해! 화정아! 그만해!”
화정이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소연은 다리가 풀리는지 흐느적거리며 사정화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흑흑. 아가씨…”
사정화는 기절해 있었다. 겁이 난 소연은 재빨리 사정화를 들쳐업고 석실을 나갔다. 수련은 돌아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소연은 눈물 찍 콧물 찍. 쉴 새 없이 흐느끼면서 동굴을 벗어났다. 수련에게로 가려는 것이다.
“꺄악! 아가씨! 꺄악! 꺄악-!”
수련은 소연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했다. 그녀는 꺅꺅거리는 수련에게 급히 말했다.
“수련아! 빨리 약왕전에 가서 부전주님을 불러와! 어서!”
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흑! 알았어요.”
소연은 동생이 나가고 나서야 풀썩 주저앉았다.
‘아아, 난 정말로 죽을 거야. 아가씨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소연은 절망 어린 눈으로 기절해 있는 사정화를 보았다. 숨결은 안정되어 있었지만 왠지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정화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제발, 깨어나세요. 조금 있으면 부전주님이 오실 거예요. 그때까지만 참아주세요. 아아, 수련이는 왜 이리 늦는담.”
순간순간이 왜 이리도 긴지. 지금 생각해보면 아가씨를 직접 데리고 갔어야 하는 거였지만 때늦은 일이었다. 소연은 그저 화정이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