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195화


피를 토해냈다는 것을 상기시킨 동천은 팔목으로 진기를 흘려보냈다. 순조롭게 유영해 들어가던 동천의 진기는 어느 순간 흩어지거나 되돌아왔다. 동천은 진맥을 그치고 짜증을 냈다.

“아이, 씨발! 가슴 부분에서 혈맥이 엉켰잖아?”

동천이 이렇게 짜증을 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 사정화를 치료하려면 침술과 기공술. 이렇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동천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기공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둘 중 아는 거라도 있으면 다행으로 알아야 하건만 동천은 내공 소모가 심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냈다. 그때 사정화가 미약한 신음을 퍼트렸다.

“으음…”

“아이고, 아가씨! 깨어나셨어요? 헤헤. 제가… 뭐야? 아니잖아?”

사정화가 깨어난 줄 알고 기겁을 했던 동천은 곧이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깜짝 놀랐네. 으이그! 한번만 더 그래봐라. 치료고 뭐고 없을 테니까.”

동천은 기세 좋게 말하고 사정화의 옷고름을 풀어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동천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년아 움직이마. 너, 너 때문에 벗기기 힘들잖아.”

지 손 떨림을 사정화에게 떠넘긴 동천은 겉옷을 벗기고 침대 아래로 떨어트렸다. 사정화의 명문혈에 내공을 불어 넣어주는 일에는 장애물이 없어야 했다. 장애물이라 함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말하는 것인데 엄청난 고수가 아니고서는 옷을 통해서 내상(內傷)을 치료할 엄두도 못 냈다. 내공 측면으로 따지자면 동천도 고수였으나 애석하게도 ‘엄청난’이란 수식어가 빠져있었다. 결론이 무어냐. 동천이 사정화의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체의 속옷까지도 모두 벗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꿀꺽!”

본능적으로 침을 삼킨 동천은 사정화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뒤에 앉아서 그녀의 하얀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 더 이상은 벗길게 없었다. 아직 어려서인지 젖 가리개는 착용 안 한 것이다. 동천은 사정화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쪽 허리의 근육 부분을 봉쇄했다. 덕택에 빳앗이 앉게 된 사정화는 고개만 수그리게 되었다. 동천은 허리띠를 풀고 사정화의 명문혈에 두 손을 밀착시켰다.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은 동천은 내공을 끌어올려 막대한 진기를 유입시켰다. 무방비 상태에서 내공이 휘몰아치자 사정화의 상체가 간혹 가다 꿈틀거렸다. 그에 따라 엉켜있던 혈맥이 조금씩 풀려나갔지만 더디게 진행되는 만큼 끊임없이 내공을 보내야만 하는 동천의 입장에서는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헉헉! 엉켜도 진짜 더럽게 엉켰네. 내상도 정화년을 닮다니, 이게 말이 돼?’

일각 동안의 고된 치료는 결국 한계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동천은 고지를 눈앞에 두고도 인내심의 부족으로 손을 떼었다.

“몰라몰라! 죽지 않을 만큼 고쳤으니까 나머지는 지가 알아서 하겠지. 헉헉.”

힘이 쪽 빠진 동천은 그대로 쓰러져 쉬고 싶었으나 그전에 할 일이 있어서 쉬는 건 잠시 미루어야 했다. 옷을 다시 입혀야 했던 것이다. 달랑 두 개만 입히면 되었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허리의 근육을 풀어서 자리에 눕힌 동천은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아이고, 팔 다리야. 노곤한 게 힘이 하나도 없네.”

천장이 노랗게 보였다. 알고 보니 원래 누런 색깔이었다. 일어나기 귀찮았던 동천은 누워서 하단전을 운용했다. 의식하고 내공을 조절해서 그런지 독무가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대충 기력을 회복한 동천은 일어나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동천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듯 사정화의 안색은 거진 살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쩝. 싸가지는 없어도 이쁜 건 변함이 없구만?”

동천은 사정화의 뺨을 살짝 쳤다. 한데 재미있었다. 맛을 들인 동천은 이 기회가 아니면 평생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사정화의 뺨을 좌우로 번갈아 가며 때렸다. 물론, 손속에 사정을 두고 말이다.

“히히! 이년아! 이년아! 맛이 어떠냐?”

찰싹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정화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조금 후 때리는 것도 지겨워진 동천은 뭔가 쌈박하게 터트릴게 없나 고민에 들어갔다.

“으음. 내상을 다시 악화시켜 놓을까? 아냐. 너무 단순해. 그러면 진짜로 뺨따구를 한 대 갈겨 버릴까? 그것도 아니야. 만약에 그러다가 벌건 자국을 보고 의심을 받으면 큰일 날게 뻔하잖아? 으으으! 이 기회를 이대로 놓쳐야 하는가? 하늘님, 제게 힘을 주소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 상황에서 티 안 나게 사정화를 괴롭힐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동천은 머리를 쥐어짜며 사정화를 노려보았다. 볼을 잡고 흔들어보았다.

“이것도 아냐!”

왜 이런 절호의 기회에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걸까? 동천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자 결국에는 약왕전에서 의원이 오기 전까지 따귀나 때리기로 결심을 굳혔다. 사정화는 약간 괴로운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칫! 꿈속에서 놀고 있나 보구만? 태평하기도 하다. 응? 가, 가만?”

먹이감을 발견한 들개처럼 동천의 눈이 예리하게 변해갔다. 동천은 손가락으로 사정화의 입술을 매만졌다.

“히히히!”

좋아라 웃고 난 동천은 고개를 숙이며 사정화의 얼굴로 다가갔다. 목표는 바로 사정화의 입술. 사정화가 깨어날 염려는 없지만 동천은 만일을 대비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숙여갔다.

“으음.”

사정화의 미약한 신음에 동천은 창문가로 재빨리 도망쳤다.

“아아, 날씨 참 좋다.”

살짝 뒤돌아보니 사정화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괜히 쫄았다고 생각한 동천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한번 시도를 시작했다.

‘눈 뜨지 마라. 눈 뜨지 마. 신음 소리도 내지 말고, 가만히만 있어라.’

동천은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중얼중얼 주절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실패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이번에는 주저 없이 행동을 하기로 했다. 살금살금 사정화의 침대까지 다다른 동천은 심호흡을 한번하고 그대로 사정화의 입술을 덮쳤다. 순간 동천의 입술에 촉촉하고 뭉클한 느낌이 감미롭게 전해졌다. 뭔지 모르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동천은 입술을 살짝 떼었다.

“…”

고개를 갸웃거린 동천은 다시 한번 입맞춤을 시도했다. 아무리 영악한 동천이라도 이런 일은 처음이기 때문에 기교는 없었다. 다만 입술을 대고 있는 게 다였다. 사정화의 숨결이 동천의 콧잔등을 간지럽게 했다.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숨결을 느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 가는 느낌이 동천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땀이었다. 너무도 긴장을 해서 땀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동천은 그만하기로 했다. 한데, 다소 아쉬움을 느끼며 입술을 떼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사정화의 두 팔이 동천을 꽉 끌어안는 게 아닌가?

‘허-억?’

동천은 오랜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덕분에 동천은 사정화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어째서…”

사정화는 다소 원망스런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지보고 그러는 줄 알았던 동천은 무조건 빌고 보았다.

“아이고, 아가씨!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요. 어쩌다 보니까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그만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책임지라고 하신다면 책임을 지겠구요. 한 대 맞으라고 하신다면 달갑게 맞겠습니다! 설, 설마 죽이지는 않겠죠? 예?”

그 말을 들었던 듯 사정화의 두 팔에 스르르 풀렸다. 급히 빠져나간 동천은 바닥에 엎드려서 빌고 또 빌었다.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또 불쌍한 놈이거든요. 이제야 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이 인생이 불쌍하다고 여기시면 제가 각골난망(刻骨難忘) 각주구검(刻舟求劍)… 이건 아니구나. 어쨌든 바르게 살겠사오니 부디 봐주십시오! 몇 대 때리셔도 되지만 죽이지는 마세요.”

동천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여러 사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들어온 이는 소연과 수련, 그리고 부전주였다. 부전주인 소진은 빌고 있는 동천에게 다급히 물어보았다.

“소전주님! 아가씨의 상태는 어떠십니까!”

잠시 어리둥절해있던 동천은 사정화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렸다. 동천은 슬그머니 일어서며 말했다.

“아? 부전주님이 오셨군요. 아가씨는 가슴 부근에 기혈이 엉켜있었는데 제가 다행히 거진 치료를 끝마쳤습니다.”

소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사정화를 진맥했다. 올라올 때 소연에게 같은 말을 들었으므로 다른 곳은 제쳐두고 가슴의 상태를 살폈다. 잠시 후 손을 뗀 소진은 흥분된 목소리를 동천에게 들려주었다.

“대단하십니다! 제가 보기엔 꽤 위중한 상태이셨는데 팔 할 이상은 고치셨군요. 침술로 고치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침술로 고쳤습니다. 하하!”

동천은 기공술이라고 하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사부 외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진정한 내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갑자가 조금 넘는 동천도 다 못 고칠 정도로 위중한 내상을 기공술로 치유했다고 하면 자신의 내공정도가 밝혀지건 시간문제였다. 동천은 그런 이유 때문에 침술로 고쳤다고 말한 것이었다.

“역시, 소전주님이십니다. 벌써 그 경지에 도달하셨다니. 약왕전의 경사입니다. 하하하!”

의기양양해진 동천은 소진과 마주 웃은 후, 자리를 피하기 위해 양해를 구했다.

“제가 좀 피곤해서 그러니 내려가서 쉬겠습니다.”

“이런? 제 생각이 좀 짧았군요. 그럼 그러도록 하시지요.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소연은 긴장이 풀리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수련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동천을 뒤따라갔다.

“이야, 너 정말 동천 맞아?”

동천은 소진이 없기에 눈알을 부라렸다.

“뭔 소리냐?”

“신기해서 그래. 네가 정말 아가씨를 치료했어?”

코방귀를 뀌고 난 동천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아, 너 같은 미천한 것이 어찌 이 고귀한 동천님을 이해하리오. 이 몸은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겠다. 비켜라.”

수련은 자신을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천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야? 고귀? 야! 네가 고귀한 인간이면 이 세상의 고귀한 인간들 다 죽었겠다! 어디 가! 거기 못 서?”

서라고 해서 동천이 서겠는가? 동천은 메롱메롱 거리며 수련을 무시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수련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한 동천의 승리였다.

“나쁜 자식! 으앙!”

수련은 아가씨 때문에 쫓아가지도 못하고 방방 뜨다가 억울한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