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99화
“으음…!”
혈귀옹은 동천이 가져온 물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헤헤! 잘 만들었죠?”
혈귀옹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봐주려고 해도 어지간히는 만들어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 무슨 평이라도 해줄 텐데, 지금 동천이 가져온 정체불명의 쇳덩이는(지 말로는 도(刀)라고 한다.) 말 그대로 쇳덩이일 뿐이었다. 그는 쇳덩이를 집어 내던지며 말했다.
“네 수준을 알 만하구나.”
동천은 자신의 명도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저 극악무도한 늙은이의 처사에 치를 떨었지만 냉철한 의지력을 바탕으로 솟아오르려는 분노를 애써 잠재웠다.
“마음에 안 드셨나 보네요. 다시 해오죠 뭐.”
괜히 개겼다간 맞을 수도 있었기에 동천은 슬그머니 버려진 쇳덩이를 집어 들고 혈귀옹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재빨리 달려나가 혈귀옹의 사정권에서 물러난 동천은 그 동안 참느라고 힘들었던 주둥이를 놀려댔다.
“내 수준을 알 만하다고? 이 영감탱이야, 네 수준이나 깨달아라! 감히 역사에 길이 남을 내 흑운도(黑雲刀)를 내다 버리다니. 네가 그러고도 천하제일 장인이냐?”
뭔가 예감이 이상했던지 혈귀옹은 문밖으로 나가보았다. 한소리 더하려고 했던 동천은 그가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얼른 도망쳤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동천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헉헉, 설마 저 늙은이가 들려서 나온 건 아니겠지? 그렇겠지?”
불안하긴 했지만 만약 들었다면 혈귀옹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동천은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또 다른 종류의 한숨이 동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휴우. 언제 또 만드냐?”
그래서였다. 주위의 여러 장인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어가며 십여 일 만에 명도를 만들어 자신 있게 선보였건만, 퇴짜를 당했으니 마음이 급한 동천으로서는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길! 그냥 언놈이 만들어 놓은 거 꼬불쳐뒀다가 나중에 내 거라고 보여줄까? 관두자. 저놈의 새끼 때문에 다 틀린 일이니까.’
동천이 째려보는 방향에는 한심이 뜨거운 열기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날 그릇을 만들다 걸렸을 때 옆에서 멍하니 있다가 덤으로 얻어맞았던 한심은 혈귀옹의 명으로 동천의 감시를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깐 놈이 감시를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고 코방귀를 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멍청한 놈이 원래 단순한 일에 강하다고 이는 마치, 한심을 두고 한말인 것 같았다. 다가오는 동천을 발견한 한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말이 맞죠? 헤헤.”
동천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맞더구만.”
동천은 그 뒤로 입을 다물고 달구어진 쇠를 백 근(60Kg)짜리 망치로 거세게 내리쳤다. 백 근이나 되는 망치를 사용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근 5개월간 힘쓰는 일만 해왔으니 근력이 늘어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허리띠를 착용하고도 내공이 조금씩 불어나고 있어서 망치를 내려치는 게 더욱 수월했다.
깡! 까강! 까앙-!
빠알간 불꽃이 묵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동천은 그 불꽃이 뜨거울 뿐이었다. 사실 동천이 검을 놔두고 도를 만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는데 양쪽 날보다 한쪽 날만 만드는 게 더욱 쉽기 때문이었다. 늦가을이라 공기가 차가워졌지만 내부에서 달군 쇠나 때리는 처지의 동천에겐 도움 사항이 없었다. 금세 땀이 흘러내렸다. 그걸 본 한심은 안쓰러워 보였는지 동천에게 말했다.
“더우시죠? 이 부채로 부쳐드릴까요?”
동천은 한심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한 당주. 자네, 부채로 맞아본 적이 있나?”
그런 적이 있었는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한심은 오랜 생각 끝에야 그런 적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동천은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애석하군. 그런 의미에서 이 기회에 한번 맞아볼 생각이 없는가? 내가 쌈박하게 한 대 때려주겠네.”
그제야 뭔가 낌새를 눈치챈 한심은 슬그머니 물러섰다.
“헤헤! 부채는 부치라고 있는 거지, 때리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소전주님.”
진짜로 때리려고 했던 게 아니라 겁만 주려 했던 동천은 확실히 하자는 의미에서 무거운 망치를 붕 휘둘렀다. 동천은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는 한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정 뭣하면 말만하게! 내 망치로도 때려줄 용의가 있으니까! 히히!”
동천이 신나게 웃은 것은 잠깐이었다. 여러 장인들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딴 짓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개놈의 자식들! 내가 약왕전에 가는 날이 네놈들 제삿날인 줄 알아라. 향? 안 피워준다 이 새끼들아.’
동천은 투덜대며 망치를 두들겼다. 그따위 마음가짐으로 만든 도가 제대로 완성될 리 있겠는가? 그 후로 두 번이나 더 퇴짜를 받은 동천은 혈귀옹이 건네준 걸레를 들고 방 청소를 해야만 했다. 동천은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있는 혈귀옹의 눈치를 보면서 쓱쓱 문질렀다.
“푸르딩딩아. 더 빡빡 좀 닦아라. 내가 하리?”
혈귀옹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동천은 걸레가 찢어질 정도로 비틀었다.
‘해! 네가 해 이 잡놈아!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그렇지. 고작 한다는 짓이 아동학대냐?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지랄이야!’
손아귀에 너무 힘을 주어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세게 짜지 마라. 찢어지면 네 옷으로라도 걸레를 충당할 거니까.”
순간적이지만 상대를 죽이고픈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걸레로 목 졸라 죽이면 순순히 죽어줄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동천의 그런 살의는 혈귀옹의 곰방대 한 대로 사그라져 버렸다.
“윽! 자, 잘 알아들었습니다! 살짝 짜서 걸레질을 하라는 말씀이시지요? 헤헤! 역시, 어르신은 생활의 지혜가 넘쳐나십니다. 아아, 걸레질은 언제나 즐거워.”
동천은 혈귀옹이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비참해졌다. 혈귀옹의 방 청소를 끝마친 동천은 마루에 나와 앉아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늙은이가 비웃었다. 아마도 내가 만만하게 보여서가 아닐까 싶다. 내 인생은 여기에서 끝인가? 그런 것인가? 하늘이시여!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오리까! 만약, 제 인생이 여기에서 이렇게 끝난다면 우박을 내려주시고, 아니라면 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날 밤, 하늘에서 때아닌 우박이 떨어져 내렸다.
“으악! 이럴 순 없어! 그, 그래! 이렇게 된 바에야 최후의 수단을 쓰는 거야.”
확률이 지극히 희박한 우박을 골랐다가 된통 얻어맞은 동천은 이런 곳에서 썩을 수 없었기에 예전에 시도했다가 실패한 그 수법을 써먹기로 했다.
“크크크! 도망을 가는 거야.”
“예? 도망을 치시겠다고요?”
동천은 호흡곤란 증세를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삿대질을 했다.
“흐헉? 하, 한 당주! 자네가 어떻게 내 방에 들어왔지?”
한심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과일이나 드시라고 들어왔는데 창밖을 보시던 소전주님은 전혀 모르시더라고요. 헤헤. 그래서 나가려고 하는데 도망을 치시겠다고 하셔서… 맞다! 도망을 치시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천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시치미를 뗐다.
“아무것도 아냐. 밤이 깊었으니 자네는 잠이나 자.”
궁금했던 한심은 괜스레 친한 척을 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엄청 가벼운 입의 소유자에게 이런 중대사를 말했다간 바로 자신의 제삿날이었으므로 동천은 화를 내며 한심을 꾸짖었다.
“어허?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가서 자게!”
쫄아버린 한심은 찍 소리도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 군말 없이 착실하게 도를 만들던 동천은 늦가을에 때아닌 비가 내리던 날 마음속에 품어왔던 그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동천은 야심한 밤에 온 세상을 두들기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마루로 나와 혈귀옹의 방 쪽을 살폈다. 불은 꺼져있었다. 정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한 동천은 신을 신고 냅다 뛰쳐나갔다.
‘히히! 자유다! 비가 나를 도와준다!’
동천은 바삐 도망치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확인한 동천은 대소를 터트리며 몸을 돌렸다.
“푸하하! 역시, 체력단련은 빗속에서 하는 게 제일이라니까?”
그러나 동천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크흑! 귀신 같은 늙은이!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냐구!!!’
어느새 따라붙은 혈귀옹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이놈아. 체력단련을 한다더니 어째서 나오자마자 들어가느냐. 흐흐, 설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냐?”
동천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돌아가나니요. 왕복운동을 하는 건데 한 백, 백 번은 할 겁니다.”
혈귀옹은 돌연 안색을 굳히고 자리에서 멈추었다.
“내 지켜보지.”
그날 밤 동천은 죽어라 뛰어다녔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를 했던 터라 옆구리가 끊어져라 아파 왔지만 그것보다 동천이 확실하게 깨달은 게 있었다.
‘도망은 포기하자. 아무래도 글른 것 같아. 아아, 저 늙은이는 눈깔이 세 개 달린 괴물이라도 되는 걸까? 어떻게 나의 탈출을 이렇게 잘 아는 거지? 휴우. 그래, 도망칠 수 없다면 당당히 실력으로 나가겠어. 나 동천! 한다면 하는 사나이!’
혈귀옹은 다소 느려지는 동천을 재촉했다.
“몸놀림이 느려진다. 잡생각은 버려라.”
동천은 재수 없는 늙은이의 재촉에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아무래도 도망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