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02화
자신의 간이 작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기 때문이다. 소연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주인님은 무슨 일인지 아시나봐요.”
연약한 소연이 있어서 비례적으로 강해진 동천은 본래의 자신을 되찾았다.
“쫄지 말어. 비명 소리는 화정이가 지른 거니까.”
소연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의외의 소리였던 것이다.
“예? 화정이가요? 왜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소연의 질문에 동천은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동천은 소연이 꼭 잡고있어서 은근히 아파 오는 팔을 뿌리쳤다.
“아파 이 계집애야! 그리고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아냐? 정 알고 싶으면 니가 가서 상태를 확인해보면 될게 아냐!”
겁에 질린 소연은 동천의 방 쪽을 힐끔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제, 제가요? 그런….”
“뭐야. 너 지금 이 주인님의 명령에 뻐팅기겠다는 거야?”
소연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갈게요. 가요.”
주인님에게 혼나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서 화정이의 상태를 살피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 소연은 쫓기듯이 동천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서 내부가 잘 안보였지만 내공을 끌어올려 눈에 집중시키니 월광과 어우러진 방안 내부가 차츰 밝게 보였다. 동천의 방은 소연에게도 익숙한 곳이었기에 그녀는 화정이가 누워있는 침대를 손쉽게 찾아내었다. 곧이어 죽은 듯이 누워있는 화정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화정아. 뭐하니.”
화정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숨결이 평소보다 거칠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질 뿐이었다. 강시인 화정이가 비명을 질렀다면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연은 용독경 내의 내용을 하나 둘 떠올려가며 화정이에게 접근했다. 마침내 화정이 앞에 다다른 소연은 화정이의 옆구리를 조심스레 찔렀다.
“화정아. 너 괜찮아?”
작은 주인의 손가락이 자신의 옆구리를 찔러오자 화정이는 몸을 움찔거리며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소연을 응시했다. 무슨 말을 꺼내고 싶은지 화정이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거렸다. 순간 소연의 뇌리에서 번쩍이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 그래! 말해봐 화정아! 뭐든지 말해봐! 해보라고!”
재촉하는 소연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화정이는 쥐어짜듯 버벅거리는 음성을 토해냈다.
“소오오오오오.”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화정이가 말문을 튼 것이다. 소연은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을 정신도 없이 계속 화정이의 말을 유도했다.
“그래, 잘했어! 소오오오오라고? 또 해봐. 넌 할 수 있어!”
잠시 숨을 고른 화정이는 작은 주인의 기대에 부흥하고자 다시금 말을 꺼냈다.
“여어어어어어. 헉헉.”
처음에는 흥분한 나머지 화정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지 잘 몰랐다. 하지만 약간만 머리를 굴려보면 화정이가 하고자픈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 소연은 깜짝 놀랐다.
“너, 너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거야? 그런 거야?”
화정이는 소연에게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소오오오여어어어언. 소오오…….”
확연히 깨달은 소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화정이를 껴안았다.
“화정아! 흑흑! 화정아!”
비명 소리가 들리면 냅다 튀려고 멀리서 자세를 가다듬고있었던 동천은 기쁨인지 비통함인지 애매 모호한 곡(?)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도망가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동천은 벽에 바싹 붙어서 옆으로 이동했다. 재빠르게 자신의 방문에 다다른 동천은 열려있는 공간 사이로 내부 전경을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소연이가 화정이를 껴안고 울고 있잖아? 허억? 호, 혹시 화정이가 죽은 건가?’
동천은 화정이가 그새 수명이 다 되어서 죽었다고 오인했다. 너무나도 앞서가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화정아!”
잽싸게 달려들어 소연을 밀치고 화정이를 부둥켜안은 동천은 곧이어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화정이도 자신을 살며시 끌어안았던 것이다.
“……뭐야? 멀쩡하잖아?”
동천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소연에게 눈빛을 보냈다. 넘어져있었던 소연은 재빨리 일어나 흥분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듣고 놀라지 마세요! 화정이가 드디어 말을 했어요! 말을 했다고요!”
“뭐? 그게 진짜야?”
소연은 쉴새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방금 들었어요. 저보고 소오오오여어어어. 그러면서 제 이름을 불렀다니까요?”
소연에게서 고개를 획 돌린 동천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온 화정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있었다.
“오오! 그래 화정아. 네가 말을 했다고? 자자, 아무거나 좋으니까 너의 주인인 나에게도 말을 해봐. 어서.”
주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의식한 화정이는 앵두 같은 입술을 벌리고 오물거렸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입에서는 동천이 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잠시 흐름이 끊겨서 그런지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었다. 동천은 기다리다못해 짜증이 솟구쳤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화정이를 독려했다.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 진정한 후 다시 말해봐. 너는 아무거나 다 잘하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칭찬을 듣고 화사하게 웃은 화정이는 다시금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화정이의 입에서 나오는 건 숨소리밖에 없었다. 마침내 동천의 인내심이 극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이런 씨발! 니가 붕어 새끼야? 뻐끔거리지만 말고 말을 해봐 말을!”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되는 거였기에 소연도 화정이에게 말했다.
“그래 화정아. 주인님 말대로 말해봐. 아까 말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거야.”
혼란스러웠던지 화정이는 머리를 감싸안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깜짝 놀란 동천은 괜히 목소리 한번 들어보려다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자자, 화정아. 나중에 말해도 되니까 그냥 자. 알았지? 자장자장.”
동천의 명령에 화정이는 언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뭔지 모르지만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 동천은 차가운 얼굴로 소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전음으로 이야기했다.
『감히 개뻥을 쳐?』
아직 전음으로 주고받을 정도로 내공이 높질 않았던 소연의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에요. 정말로 화정이가 말을 했어요. 주인님. 믿어주세요.”
그런다고 동천이 쉬이 믿을 리 없었다. 동천은 혹여 자는 화정이에게 방해가 될까봐 소연의 볼따구를 잡고 나왔다. 덕분에 소연이 큰 소리로 아픔을 호소하는 바람에 조용히 하려는 동천의 노력이 무산되었지만 다행히도 화정이는 최면술에 걸린 듯 깨어날 줄을 몰랐다.
“흑흑, 아파요 주인님. 놓아주세요.”
밖으로 끌고 나와 한쪽 볼이 한자나 늘어질 정도로 소연의 볼을 잡아당기고 있었던 동천은 어렵사리 분을 삭힌 후 손을 놓아주었다. 소연은 고개를 숙이고 벌겋게 부어오른 볼때기를 비비댔다. 동천은 잠시의 여유를 끝으로 입에 침을 튀겨가며 화를 냈다.
“꼴에 아픈 건 알어? 어디서 뻥을 치고 지랄이야?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어? 말해봐!”
“전 억울해요. 정말로 말을 했다고요. 흑흑흑!”
“억울하다고? 쳇! 그따위 소리는 나도 할 수 있어. 나중에 죽어서 염라대왕(閻羅大王)에게 갔는데 그 새끼가 하는 말이 ‘생각 없이 똥간에서 쭈그리고 앉다가 갓 태어난 구더기 새끼를 밟아 죽였으니 네 죄가 너무도 크다. 짤 없이 지옥!’ 이라고 말하면 나도 너처럼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이 몸의 말씀은 그게 아니잖아? 어째서 거짓말을 했냐 이거야!”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비유에 할말을 잃어버린 소연은 우는 것도 그친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 그때 보다 못한 감송 부부가 이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허허, 소전주님 무슨 일입니까?”
동천이 그들의 기척을 못 느낀걸 보니 아마도 감지력의 사정권에 벗어나 있다가 신법을 발휘해 다가온 듯 했다. 동천은 역시 놀라운 늙은이들이라 생각하며 짐짓 생각해주는 척 했다.
“저런? 내가 깨웠나보지?”
민소희는 동천과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전에 깨어 있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서 나왔다가 소전주님과 제 제자를 보고 온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화정이가 비명을 지를 때부터 동천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멀리서 동천의 상태를 살피던 그들은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잠시 후 소연이 크게 혼나는 장면을 목격한 민소희는 사부 된 도리로서 도와주려는 마음에 남편과 같이 다가온 것이었다. 각설하고 결과적으로 민소희의 행동은 헛되지 않았다.
“아니? 소연아. 왜 울고있어. 피곤해서 그래? 그렇구나. 그럼 들어가서 자라. 알았지? 난 이만 갈게. 아차? 송 영감 부부도 잘 자고.”
감송 부부는 급히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가는 동천에게 살며시 고개를 수그려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소전주님 편히 주무십시오.”
“히히! 알았어.”
동천이 그렇게 사라진 후 소연은 제때에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사부님과 남편인 감송에게 깊숙이 예를 올렸다.
“사부님과 사공님이 아니셨으면 주인님께 크게 혼났을 텐데 감사드립니다.”
민소희는 자신과 키가 비슷하지만 어리기만 한 제자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네 신분으로는 이런 일쯤이야 가볍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마도에 소속된 하녀치고는 너무도 가벼운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말거라. 그리고 마음의 화는 주화입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소연은 눈물이 샘솟으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서러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명심해서 잘 처신하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자거라.”
“네. 사부님.”
소연은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이쯤에서 마치려고 했지만 역천 휘하의 시녀들의 노고와 피눈물의 결정체인 생사비록(生死秘錄)에 놀랍게도 이 일화가 적혀 있는 관계로 잠깐 들여다보기로 하자.
-중략(中略)-
그 일이 있은 지 2달 후 마침내 화정이는 말을 트이게 되었다. 비록 듣기에 껄끄러운 목소리였지만 당연히 소전주는 기뻐했다. 이때 소연이 2달 전의 일을 끄집어 내 억울한 누명을 벗어보려 했으나 동천은 코 방귀도 안 뀌었고 되려 그녀가 울 때까지 죽어라 따라다니며 꿀밤을 때렸다.
결론: 소전주에게 지난날의 일을 들먹이는 건 자살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