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07화
도연의 얘기에 소연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크게 손뼉을 쳤다.
“아? 안 그래도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요. 걔 요즘, 뒷마당에 무릎꿇고 앉아서 하루하루를 지내요.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아무 말이 없고요. 마치 혼이 빠진 애처럼 넋 놓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주인님이 나가셔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살도 많이 빠져서 어떻게 보면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더라고요.”
동천은 눈을 반짝였다.
“호오, 걔가 그렇게 까지 미쳤어?”
소연은 급히 고개를 저어댔다.
“아니요. 미친 게 아니라 그저 멍하니 앉아서 먼 산을 응시하고만 있다고요.”
“이씨! 그게 그거 아냐!”
소연은 주인님이 주먹을 말아 쥐고 위협을 해대는 통에 슬그머니 동조를 표했다.
“예에. 생각해보니 그, 그러네요.”
동천은 소연까지 찬성(?)하자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히히! 그럼, 어떻게 하고있나 이 몸께서 가보기로 할까나?”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목발을 집고 걸어나갔다. 뒷마당 쪽으로 걸어간 동천은 오른쪽 구석에 도연이 소연의 말대로 앉아있는 것을 보게되었다. 도연은 무의미한 시선으로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동천이 목발로 땅을 찍어가며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듣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만의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도연은 수척해진 모습을 하고 오직, 바닥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것을 보고 괜히 배알이 뒤틀린 동천은 도연의 바로 앞에서 톡 쏘아붙였다.
“얌마! 도대체 여기에서 뭐 하는 짓거리야?”
“…….”
대답이 없는 도연의 행동에 아니,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도연의 행동에 동천은 그저 기가 찰 따름이었다.
“어랍쇼? 이놈 보게? 씹어?”
그래도 여전히 묵묵부답인 도연의 반응에 동천은 정말로 맛이 갔나해서 도연의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도연의 눈동자는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었다. 서서있는 게 불편했던 동천은 행여 발가락에 무리가 갈까봐 조심하는 차원에서 천천히 마주앉았다.
“야. 불만이 뭐야. 너 혹시 사춘기냐? 아냐? 그럼 뭐야. 것도 아니면 밤마다 그게 서서 고민하는 거냐? 그거야?”
자신이 이렇게 대화로까지 해결해 주려고 하는데 도연이 입을 열 생각을 안하자 부아가 치밀어 오른 동천은 한 대 쌔려버리고 손을 치켜들었다. 그때, 멍하니 앉아있던 도연은 눈앞에 무언가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고 미약하게 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도연의 입에서 마침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劍). 검이란 무엇인가…….”
도연의 목소리에 손의 움직임을 멈춘 동천은 심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검? 여기에서 검이 왜 나와? 너 지금 장난 하냐?”
도연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장난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사실 도연의 지금 상태는 심각하게 억눌려있는 상태였는데 눈앞의 어른거림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답답했던 문제를 끄집어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던지 도연은 다시금 물었다.
“검이란 무엇인가.”
‘뭐야, 지금 나하고 한번 해보자는 거야? 좋다 이 자식아! 해보자고!’
화가 치솟아 오른 동천은 괜히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소리쳤다.
“검? 검이 무어냐고? 모른다 이 자식아! 됐지? 그럼 이젠 내가 물어봐도 돼? 뭐? 된다고? 좋아, 그럼 도(刀)란 무엇이냐?”
동천이 지랄하며 소리쳤지만 그 말들이 도연의 머릿속에 도착했을 땐 어느새 말끔히 정돈된 상태였다.
‘검이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그럼, 도란 무엇인가?’
해답을 얻기는커녕, 되려 질문까지 받은 도연의 머릿속은 복잡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러한 생각들이 도연의 뇌리에서 떠날 생각을 않했다.
“으으으…….”
무언가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는 게 없어서인지 도연은 고통스러워했다.
“히히! 대가리가 뽀사질 것 같지? 야, 이해가 안되면 그냥 넘겨버려. 뭘 그렇게 신경을 쓰냐? 왜 이런 말도 있잖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뭔 말인지 알겠냐?”
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도연의 고갯짓에 동천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병신아. 왜 사니? 꼭 이 몸께서 해석까지 해주어야겠니? 그러니까 네 수준으로는 이해가 안 갈게 분명하니까 포기할 줄도 알라는 소리야.”
동천의 말씀(?)이 끝나는 동시에 도연의 내부에서 거센 반발이 용트림을 시작했다. 도연의 성격에 포기란 죽으란 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도연은 이가 으스러지도록 깨물며 그 동안 앓고 있었던 문제를 꺼내들었다.
“태(太)란 무엇인가?”
아까 와는 달리, 다소 격앙된 목소리였다. 이에 흠칫한 동천의 목소리도 자연 도연을 따라 올라갔다.
“이 자식이 중도 아니면서 자꾸 선문답을 하네? 좋아. 대답은 해주지. 태가 뭐냐고? 넌 한자도 모르냐? 클 태! 바로 크다는 의미잖아!”
“크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치고 들어온 질문에 동천은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다.
“크다는 게 뭐냐고? 그러니까 그게. 음. 그래! 여러 가지가 있지. 어른도 너보다 크고, 꼭 키라고도 할 수 없는 문제니까 신분의 예를 들 수도 있고. 왜 있잖아. 신분의 차이가 너무도 크다고. 아니면 무형의 압력에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이 갑자기 커 보인다거나. 뭐 이런 것들이 있질 않겠어?”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그 자신도 예전에 생각해보았던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도연은 논리 정연한 해답란을 원하듯 갈망하는 눈빛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태! 도대체 태란 무엇이란 말인가! 크다는 것? 단수의 문제란 말인가?”
질문하는 태도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동천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이, 이 자식이 이제는 윗사람도 못 알아보네?”
도연은 자신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해! 말해보란 말야!”
막가는 도연의 행동에 갑자기 무서워진 동천은 재빨리 일어나 도망치듯 물러나며 지고싶지 않은 듯 한소리 해댔다.
“이 씨필 놈아! 크면 큰 거지 더 이상 뭘 바래? 너 이따가 죽을 줄 알아!”
순간, 도연은 뒤통수에 거대한 둔기를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태의 유형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도연은 자신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감을 느꼈다.
‘크, 크면 큰 거지 더 이상 뭘 바라냐고? 크면 큰 거지…….’
대신 비어 가는 머릿속에 동천의 가르침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왔다. 도연은 마음이 편안해 짐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나는 너무도 형식에 얽매여 왔다. 크다. 큰 것. 그렇다. 크면 큰 것이지 왜 나는 거기에다 쓸데없는 부산물들을 붙였던 것인가……. 태의유장(太意流長). 태장오무(太長汚無). 무무태의(無無太意)…….’
그 동안 도연을 괴롭혀왔던 태의 구결들이 시원스레 꺼풀을 벗기 시작했다. 비록, 모든 꺼풀을 벗진 않았지만 그래도 도연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만큼 그 동안 도연의 심적 고통이 심했던 것이다. 한 식경 동안 십이주천을 마친 도연은 이 기분을 깨고싶지 않은 듯 내친 김에 초식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검이 없었던 도연은 마음속으로 검을 그렸다. 무언가를 깨달은 도연의 움직임은 고요하고 둔중했으나 내뻗는 한 수 한 수마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뻗어나갔다. 한편, 도망가는 척 하다 꺾어지는 부분에서 계속 도연을 주시하고있었던 동천은 미친놈처럼 팔을 휘두르는 도연의 행동에 한가지 확신을 가졌다.
“역시, 저 새끼 미쳤어.”
동천은 자신이 도연을 주화입마에서 구해주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혼자 중얼거리며 미친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그리고 그새 모든 초식을 끝낸 도연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웃어 제꼈다.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여태까지의 답답함을 물리칠 정도로 시원한 웃음 소리였다. 허나, 동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울어? 으으, 혹시 정신착란증세까지 있는 거 아냐?”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얼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런 다음 내공을 끌어올려 바깥의 동태를 살펴도 아무런 이상이 없자 동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무슨 일 나는 줄 알았네. 으응? 그런데 내가 왜 쫄아야했던 거지? 크윽! 발가락만 다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으으, 내가 발가락만 낳아봐라. 아주 반 죽여 놀 테니까. 두고봐! 두고 보라고!”
동천은 방안에서 제 세상을 만난 듯 마구 떠들어댔다. 한마디로 동천의 자존심은 방안에서만 가능한 자존심이었다. 그래도 한가지 놀라운 발견은 동천이 아주 쓸모 없는 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우연찮게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