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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19화


입으로 들어가는 건 많았으나 맛은 느낄 수 없었다. 식탐하는 동천으로서는 있어서는, 있어서도 안 되는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평소대로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난 동천은 물을 들이키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왜 소연에게 위축감이 들어야 하는 거지? 하늘이시여! 제게 계시를 내려주소서!”

두 팔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지만 들려오는 건 풀벌레 울음소리뿐이었다. 동천은 왠지 그 풀벌레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풀벌레들조차 이 몸을 비웃는다. 그렇다면 나는 풀벌레보다 못한 인간이란 말인가? 정녕, 그런 것인가?”

동천은 담벼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오래 서 있기 불편해서인지 쭈그리고 앉았다.

“으음, 우선 내 방에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동천은 금방 일어날 것을 괜히 앉았다고 생각했다. 하여간 동천은 이런 상황에서도 엉뚱한 생각을 하는 아이였다. 그 시각, 동천이 말없이 뛰쳐나가서 급히 뒤쫓아 나왔던 소연은 워낙 재빠른 동천의 신법에 그 행적을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신 거지?”

고개를 갸웃거린 소연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화정이에게 말을 걸었다.

“다 먹었어?”

입가에 약간의 음식 찌꺼기를 묻히면서 먹고 있던 화정이는 헤에 웃었다.

“마싯다. 소오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자 소연은 대충 때려 맞추었다.

“아아, 잘 먹었다고? 호호! 그럼, 나랑 내 방에 같이 가자.”

소연은 흥에 겨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화정이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밖에서 소연이 나오길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동천은 다른 시녀들이 상을 내갈 때까지 숨어 있다가 재빨리 들어갔다.

“크윽, 내 방에 들어오는 건데도 소연이 년의 눈치를 보고 들어와야 하다니! 동천아. 한심하다. 한심해. 소연이가 그렇게 무섭더냐?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건 아냐.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내가 꼼짝도 못하는 거지? 으으으!”

자기학대까지 해가며 침대 위를 뒹굴거리던 동천은 한식경째 해결안다운 해결안도 내놓지 못하다 결국에는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고야 말았다.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동천이 깊은 잠에 빠져 꿈나라에서 한참 놀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문밖에서 소연의 모기만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동천을 깨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소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음인가? 잠시의 여유를 두고 들려온 소연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게 들려왔다.

“주인님. 주인님!”

무의식중에 동천의 한쪽 눈썹이 치켜 떠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주인님, 깨셨어요?”

꿈틀거리던 동천은 마침내 소연의 물음에 보답하듯 잠에서 깨어나고야 말았다. 동천은 게슴츠레한 눈빛을 하고 문밖에다 소릴 질렀다.

“으이 씨! 어떤 쌍놈의 새끼가 잠을 깨워?”

그러자 다시 작아진 소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소연이.”

동천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뭐, 뭐? 네가 이 밤중엔 웬일이냐?”

“저기, 들어가도 돼요?”

“안돼!”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동천의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 그러든지…….”

동천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소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천은 방안의 불이 꺼진 상태여서 소연의 자세한 모습은 알아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공을 운용한 동천은 그제야 소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간단한 경장차림이었다. 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걸어온 소연은 침대 끝에 살짝 엉덩이를 걸쳤다.

“뭐야, 왜, 왜 왔어?”

동천이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자 그녀는 상체를 동천 쪽으로 약간 비틀었다.

“주인님. 저어…….”

동천은 식은땀을 다 흘려가며 소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소연이 말했다.

“여기에서 자도 돼요?”

‘허억?’

기겁을 한 동천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소연이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이다니, 이게 될 법한 일인가?

“너, 너! 누구야? 소연이라면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누구야!”

소연은 달아오르는 양 볼을 두 손으로 지긋이 눌렀다. 그녀는 지금이 밤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잠시 후 손을 내린 소연은 자유로워진 두 손을 사용해 동천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주인님, 저 소연이 맞아요. 그리고 지금 저는 굉장히 용기를 내서 온 거예요. 만약, 만약 뿌리치시면……. 흑! 저를 버리시는 걸로, 흑흑!”

소연이 울자 동천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저어댔다.

“아니야! 괜찮아. 네가 여기에서 잔다는데 누가 말려? 자, 자라고!”

소연은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뚝 그쳤다.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기가 무서웠던 동천은 침대 맨 끝쪽에 누워 소연에게 말했다.

“난 여기에서 잘 테니까 넌 거기에서 자. 알았지?”

소연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동천을 불렀다.

“저어, 주인님.”

그녀와 등을 돌리고 누워있던 동천은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불러.”

소연은 머뭇머뭇 거리다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옷……, 벗을까요?”

“뭐, 뭐야? 옷을 벗어?”

동천은 안 일어날래야 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동천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연을 쳐다보았다.

“너 미쳤어? 어디에서 옷을 벗어! 안돼!”

찔끔한 소연은 눈물을 글썽였다.

“왜요?”

당연한 소리를 해줬는데 이래서는 안될 소연이 다소 원망스레 물어보자 동천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했다.

“으음, 그게 그러니까. 아? 네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소연은 자신을 생각해주는(?) 주인님의 드넓은 마음에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 이렇게 좋은 줄을 미처 몰랐다.

“흑흑, 주인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니까 안 벗을게요. 그리고 너무 감사해요.”

아무리 동천이라도 기뻐서 우는 것과 슬퍼서 우는 것쯤은 구별할 줄 알았다. 왠지 기분이 묘해진 동천은 말을 꺼내면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올까 봐 잠자코 자리에 누웠다.

‘으으, 이제 와서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앗? 이, 이 계집애가 내 옆으로 와서 나란히 누웠잖아?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아이고, 아주 죽겠네.’

동천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소연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기묘한 침묵이 소연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의붓아버지와 살았을 때 잘 알던 언니가 있었어요. 그 언니는 행실이 좋지 않다고 평판이 자자해서 사람들은 별로 싫어했는데 나는 괜찮았어요. 왜 인지 알아요?”

동천은 내심 소리쳤다.

‘네가 속없는 년이니까 그렇지!’

주인님이 대답이 없자 소연은 하는 수없이 혼자 말을 이었다.

“나에게 무지 잘 대해줬거든요. 그래서 그 언니와 자주 놀았는데 한번은 그 언니가 지나치듯 해주는 말이 몸이 깨끗한 여자는 남자에게 몸을 줄 때 무지하게 아프대요. 그리고 그 후로 몇 번은 더 아파야 비로소 아프지가 않대요.”

동천은 소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대로 잘 나가다가 요상한 이야기로 빠져나가서 그도 모르게 소연을 바라본 것이었다.

‘이년이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창문은 침대 머리맡 쪽으로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 사이로 달빛이 어렴풋이 스며들어와 소연의 얼굴을 환상적으로 물들여갔다. 동천이 붉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고 느낀 순간 소연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가며 말했다.

“전 버틸 수 있어요. 하고 싶으시면……, 마,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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