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20화
쿠웅!
동천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미, 미쳤어! 이년은 미쳤다고! 버텨? 뭘 버텨 이년아!’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제정신이냐고 고래고래 소리쳐주고 싶었으나 굳게 닫혀 떨고 있는 동천의 입술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동천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러고 있는 사이에 조금씩 떨고 있는 소연의 동체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대범하게 나왔지만 내심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소연의 모습에 동천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됐어. 네 마음 다 아니까 그냥 자자. 알았지?”
생각 같아서는 왜 이딴 짓을 하냐고 윽박지르며 내치고 싶었으나 워낙 심상치 않은 소연의 태도 때문에 동천은 조심스레 대했다. 소연은 자신이 너무도 생각 없이 행동한 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천의 품에 더욱 안겨들었다. 아마도 동천의 품이 그녀에게는 쥐구멍인가 보다.
“말씀대로 할게요.”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안겨드는 소연의 몸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화정이를 끌어안고 자는 버릇 때문인지 그녀가 파고들자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화정이를 껴안을 때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넘치는 화정이를 대하다 자신의 품에 딱 들어맞는 소연의 몸을 대하니 성취욕 비슷한 감정이 고개를 든 것이다. 동천은 끌어안은 김에 두 팔에 힘을 가해보았다. 그러자 소연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밀려왔다.
“으응…….”
애매모호한 소연의 신음성에 깜짝 놀란 동천은 황급히 힘을 풀었다.
“…….”
방안은 금세 정적이 감돌았다. 감히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콩닥거리는 동천의 심장 소리와 소연의 심장 소리가 어우러져 묘한 화합을 이루었다. 좋았다. 동천은 다 좋았다. 안기는 게 아닌 자신이 안는 것과 소연의 숨결과 애매모호한 떨림조차 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동천은 갑자기 소연이 무서워졌다.
‘으으,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밤새 소연을 껴안고 자느라 새벽까지 잠을 설쳐대야만 했던 동천은 겨우 잠이 든 뒤, 아침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다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아암. 쩝,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졸리지?’
하도 졸려서 일어나기가 귀찮았던 동천은 옆에서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자 덥석 껴안고 능숙하게(?) 상의를 헤치고 들어가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으음, 좋다……가 아니라, 으응?’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동천은 잠깐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시 멈추었다. 결국,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린 동천은 옆에서 자고 있는 상대를 확인하고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비명은 튀어나오질 않았다. 동천이 비명을 지르려다 얼른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어젯밤의 일을 꿈으로 치부해버렸던 동천은 그게 진짜 일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천은 넋이 나간 얼굴로 자고 있는 소연을 빤히 바라보다 풀려있는 그녀의 가슴 섶을 발견하고 진땀을 삐질삐질 흘려댔다. 동천은 손으로 소연의 얼굴 위를 여러 번 지나쳐보았다.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마 그녀도 동천 이상으로 밤잠을 설치다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최대로 기척을 죽이며 소연의 가슴을 여며주었다. 잠깐이었지만 그 긴장감은 예전에 황룡미미의 밥반찬을 몰래 훔쳐 먹을 때와는 비교도 되질 않았다.
‘헉헉, 큰일 날 뻔했다. 만약에 이년이 알았다면……. 끄, 끔찍하다.’
동천은 자신의 방이면서도 마치 밤손님처럼 소연의 눈치를 살피며 걸어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방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아, 안돼! 오지 마!’
전음으로 상대할 수 있었으나 워낙 당황한 탓인지 동천의 외침은 공허하게 머릿속을 유영할 따름이었다.
“주군, 깨어나셨습니까?”
‘헉?’
기겁을 한 동천은 도연의 목소리가 들린 동시에 소연에게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혹여, 그녀가 깨어났나 해서 돌아본 것이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소연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너무도 긴장한 탓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동천은 새파래진 얼굴로 나왔다. 동천은 방문을 닫고 급격히 허물어졌다.
“헉헉,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당황한 도연은 얼른 동천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겁니까?”
동천은 아까보다 몇 배나 커진 도연의 목소리에 진한 살기를 내뿜었다.
“이 씹새끼야! 조용히 하란 말야! 그러다가 쟤가 깨어나면 네가 책임 질 거야? 엉?”
그러면서 정작 자신이 소리를 질렀으나 동천은 못 느끼는 듯했다. 이는 시끄러운 주위의 소음에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자 목청을 높이는 이치와 비슷했다. 그리고 결국 소연을 깨운 것은 동천이었다.
‘무슨 소리가……. 으음, 어디서 들리는 거지? 마치 주인님의 목소리 같았는데 말야. 주인님 목소리……, 주인님. 앗?’
소연은 벌떡 일어났다. 잠깐 동안 낯선 주위 환경에 당황했지만 그보다 더 당황한 것은 자신이 늦잠을 잤다는 사실이었다.
‘아아, 난 몰라. 내가 더 일찍 일어났어야 했는데. 주인님께서 내가 자는 모습을 보시고 흉하다고 생각하셨으면 어쩌지?’
턱도 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연은 곧이어 자신이 속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올 때 이렇게 입고 온 것이었다.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동천의 옷을 꺼내 입고 나오다가 황급히 신형을 멈추었다. 자신 못지않게 당황한 눈초리로 서 있는 동천을 본 것이었다.
“아, 안녕히 주무셔, 셨어요?”
동천은 애써 신형을 바로잡고 소연의 인사를 받았다.
“으음. 그래. 잘 잤다. 너도 잘 잤지?”
잘 잤냐는 말의 뜻을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인 소연은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가 동천의 다리가 네 개인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앗? 도, 도연아!”
도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여태까지 자신의 모든 행동을 보였다고 생각한 소연은 부끄러웠는지 동천의 방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소연은 부끄러워했고 도연은 무덤덤한 표정이었으나 동천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펴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년이 지 방을 내비두고 왜 내 방으로 기어 들어가는 거지? 이제는 자기 방이라 이거야?’
동천은 주먹을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포기하고 도연에게 관심을 돌렸다.
“야! 사부님께서는 좀 더 쉬라고 하셨는데 넌 뭐 하러 왔어?”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도연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수련이 찾아와 있어서 온 겁니다.”
순간 동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응? 수련이가?”
“예.”
수련이 어제의 일 때문에 울기는 했지만 곧 수긍을 해서 왔다고 생각한 동천은 기뻐했다.
“히히, 어디야! 어디에 있어!”
도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접견실로 보냈습니다.”
동천은 만족해했다.
“좋아, 안내해.”
동천이 도연의 안내를 받아 접견실에 도착하자 차를 마시고 있던 수련이 새침한 얼굴로 동천을 힐끗 바라보았다.
“야, 손님인 내가 이렇게 기다려야 하겠어?”
평소 같으면 “응.”이라고 했겠지만 동천은 앞일을 생각해 장난기를 죽였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오늘 늦잠을 좀 자서 그래. 이해해라.”
수련은 생각 외의 상황을 접해서인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술을 오물거리다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지 뭐.”
우선 선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동천은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도연은 알아서 밖으로 나갔다. 동천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어?”
수련은 동천과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후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알면서 딴청 피우지 마. 계속 그러면 부탁이고 뭐고 없는 걸로 칠 테니까.”
동천은 수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졌다.
“알았어. 알았어. 히히, 고마워. 정말 너처럼 약속을 잘 지키는 애는 처음이라니까? 어쨌든 진짜 잘 왔어.”
수련은 동천의 말을 끊어 쳤다.
“그만하고, 그 부탁이라는 게 뭐야?”
목소리는 여전히 뚱했으나 표정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동천은 그녀의 표정보다 억양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이년 말하는 것 좀 보게? 싸가지가 아주 바가지네? 아휴, 내가 단환만 아니었으면 이걸 확!’
수련은 무엇을 느꼈음인지 동천을 노려보았다.
“불만 있어?”
“아냐, 헤헤. 없어. 없다고.”
동천은 고개를 저으면서 내심 가슴을 쓸었다.
‘음, 이 계집애가 나이를 좀 처먹더니 눈치가 늘었구나. 조심해야겠다.’
이미 기가 살아날 대로 살아난 수련은 동천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나 바쁘니까 빨리 말해. 오늘은 아가씨께 음식을 가져다주는 날이란 말야.”
“알았어 말할게.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고픈 것은 나에게 5일만 시간을 투자해달라는 거야.”
수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5일 동안?”
동천은 수련의 마음이 나쁜 쪽으로 흔들리기 전에 재빠른 입놀림을 보였다.
“그래. 아주 간단한 거야. 5일 동안 이곳에서 소연이와 놀면서 지내기만 하면 돼. 정말 간단하지?”
말을 들어보면 동천의 말대로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으나 어쩐지 믿음이 안 갔다. 그 정도로 동천은 신용이 없는 인간이었다.
“정말로 그것뿐이야?”
동천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것뿐이야.”
너무도 자신 있어하는 동천의 모습에 수련은 신중히 생각하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5일이 너무 길기는 하지만 별로 어려운 부탁이 아니니까 들어주기로 할게.”
일이 잘 풀려가자 동천은 너무도 좋아했다.
“역시, 화끈하구나? 좋았어. 히히!”
“그런데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야? 오늘부터 하면 돼?”
동천은 잠시 머리를 굴려보다 물어보았다.
“너 오늘 아침밥 먹고 왔냐?”
“응, 그건 왜?”
수련의 물음에 동천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럼, 내일부터 하기로 하지 뭐. 아? 그리고 아침밥 먹지 말고 그냥 와. 알았지?”
수련은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시려다 내려놓았다.
“왜?”
지금 말해주기 곤란했던 동천은 진실은 약간 꼬아서 말해주었다.
“으음, 그건 말야. 네가 내일 와서 확인해 봐. 아마 놀라운 걸 먹게 될 걸? 히히!”
수련은 동천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일 아침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줄 알았다.
“알았어. 내일 올 때 아침을 거르고 올게. 이제 됐지?”
“그래그래. 됐어.”
오랜만에 동천의 콧대를 눌러주었다고 생각한 수련은 ‘착각은 자유.’라는 문구가 어색하지 않게 거만한 몸짓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내일 보자.”
동천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수련을 마차까지 바래다주었다. 동천은 떠나는 마차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준 후 눈매를 약간 구부리며 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수련아, 이제부터 죽을 맛일 거다. 이히히히!”
최후의 웃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