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21화
최후의 웃는 자.
“이게 뭐야?”
수련이 다음 날 동천의 방에 와서 제일 처음 물어본 말이었다. 그래서 동천은 기꺼이 대답해주었다.
“이슬이야. 그것도 대려산 제일 꼭대기 부근에서 채취해 온 이슬.”
수련은 대접 안에 맑게 고여 있는 물을 바라보며 감탄에 마지않았다.
“우와! 정말이야? 이렇게 많은 게 정말로 이슬이라고?”
동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마시기를 권유했다.
“그래, 넌 속고만 살았냐? 그거 이슬 맞으니까 쭉 마셔. 몸에 좋은 거야.”
수련은 맑게 찰랑이는 이슬물을 응시하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쩝, 이걸 먹는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깝다.”
쓸데없는 일에 너무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동천은 속으로 씨부렁거렸다.
‘거 참 말 많네. 그냥, 처먹어 이년아.’
그런 동천의 마음이 전달되었음인가? 수련은 주저주저하다 마침내 한 대접을 몽땅 마셔버렸다.
“아아, 시원하다.”
공복에 시원한 물을 들이킨 수련은 소매로 입가를 닦은 후 동천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침은 언제 줄 거야?”
내심 희미한 미소를 지은 동천은 짐짓 딴청을 피웠다.
“아침? 무슨 아침?”
발끈한 수련은 목 부위에 핏대를 올렸다.
“무슨 아침이라니! 네가 아침을 거르고 오라고 해서 그냥 왔단 말야!”
그제야 동천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 그거? 히히! 소연아.”
아주 나직하게 부른 말이었으나 소연은 어떻게 들었는지 신속하게 대령했다. 그녀는 동천의 바로 옆에서 다소곳이 시립 했다.
“부르셨어요.”
동천은 상체를 의자 뒤로 느긋하게 기대며 말했다.
“그래, 다름이 아니라 수련이하고 놀면서 자세한 얘기를 들려줘라. 알았지?”
그토록 반대를 했던 소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주인님. 수련아. 따라와.”
“으응. 그래.”
무언가 이상한 직감을 느낀 수련은 달라져 보이는 언니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딱히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별말 없이 소연의 뒤를 졸졸 따라간 그녀는 채 반각이 되기도 전에 언니의 팔을 뿌리치고 우당탕거리며 동천의 방으로 뛰쳐들어왔다.
“야! 네가 인간이야? 어떻게 나를 그따위 방법으로 써먹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너, 나한테 맞아 볼래?”
동천이 쳤으면 쳤지 맞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이 이후에 수련의 입에서 사정화라는 든든한 배경이 거론되면 골치가 아파졌다. 아니, 골치가 아픈 게 아니라 진짜로 자신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동천은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수련아. 좀 진정하고 내 말 먼저 들어봐. 사실 그 단환을 만드는 것은 다른 애를 쓸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라서 내가 고민 고민한 끝에 너로 정한 거야.”
씩씩거리던 수련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를 말했다.
“흥! 내가 안 하면 남 좋은 일이 뭔데.”
드디어 먹이가 미끼를 물어 제끼자 동천은 나긋나긋하게 수련의 모자란 곳을 파고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네가 먹는 재료가 워낙 희귀한 약초들이기 때문에 첫째로 좋은 것이 네 몸 안의 노폐물을 깨끗이 씻어주어 무공이 급진전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로 좋은 게 이 재료들을 복용하면 피부가 고와지고 나중에 크면 미인이 된다는 거야.”
수련은 너무도 솔깃한 효능에 절로 언성을 높였다.
“뭐? 그게 정말이야?”
“그럼! 당연하지! 이건 소연이가 증명할 수 있어. 소연아 안 그래?”
동생의 옆에서 죽은 듯이 서 있던 소연은 갑자기 자신이 지목되자 놀란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기, 그러니까 전…….”
그것을 본 수련은 동천에게 따지고 들었다.
“동천! 순진한 우리 언니에게 거짓말을 시키지 마! 내가 바본 줄 알아? 나쁜 놈! 내가 가서 아가씨께 이를 테다!”
수련의 행동에 당황한 사람은 동천보다 소연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니야. 주인님 말씀이 맞으셔. 방금 전에는 갑자기 물어보셔서 당황해서 그런 거야.”
밖으로 나가려던 수련은 뚝 멈추었다. 언니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의상 다시 물어보았다.
“정말?”
소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그래, 정말이야. 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야.”
소연이 말을 끝낸 후 동천을 바라보자 동천이 잘 했다는 무언의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동생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동천이 첫 번째로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비록, 재료를 먹는 대상자가 생명력을 약간 빼앗기기는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 1년 동안 성장이 거의 멈춘다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그 사이 세상의 탁기(濁氣)가 대상자의 몸속에 침범을 못하기 때문에 무공 증진에는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다.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무공을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반가워해야 할 일이었지만 글쎄, 팔등신 미인을 꿈꾸는 수련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어쨌든 이런 사실을 몰랐을 때의 반응은 이랬다.
“으음. 좋아요. 내가 동천은 몰라도 언니를 믿고 하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연은 뜨끔했지만 이미 벌여 놓은 일이라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 그래. 잘 생각했어. 배고픈 것만 참으면 아마 너에게 나쁜 것은 없을 거야.”
소연이 수련을 구슬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동천은 오늘따라 그녀가 이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우와! 쟤가 잘할 때도 있네? 아이고 예쁜 것. 아무래도 오늘 밤 귀여워 해줘야겠구만? 히히히!’
동천은 이틀째 밤을 맞이하고서야 소연이 매우 순종적으로 자신을 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늦게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게 어디인가? 뭐, 그 덕분에 화정이와 같이 잘 수는 없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만지며 잘 수 없다는 제한이 뒤따랐으나 그것은 아직까지 참을 만 했다. 정 뭣하면 아무 때나 만지면 되기 때문이다.
“수련아. 그럼 잘 참아라. 히히, 이틀 굶는다고 안 죽으니까 엄살 피우지 말고.”
아름다워진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던 수련은 산통을 다 깨는 동천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다.
“걱정 마. 내가 너냐? 여하튼 네가 말한 대로 효과가 없으면 나중에 알아서 해.”
“히히, 알았어. 그리고 내가 소연이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라. 정 뭣하면 소연이 방에 가서 있어도 좋아.”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데 여기에서 수련이 나서기가 뭐했다. 언니와 동천이 주종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이 끼어들 수 없다는 얘기이다.
“언니, 나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빨리 와요.”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가 있어.”
수련이 나가자 동천은 의자 하나를 자신의 바로 옆으로 끌어들인 후 손으로 그 의자를 탁탁 쳤다.
“이리 와서 앉아 봐.”
“네.”
소연은 동천의 바로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동천은 씨익 웃더니 소연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있잖아. 오늘부터 수련이 갈 때까지 걔하고 같이 자라.”
주인님의 팔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탓에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소연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획 고개를 쳐들었다.
“예? 왜, 왜요? 설마 저를…….”
동천은 너무도 순진한 소연의 반응에 낄낄거리며 웃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야, 그런 표정 짓지 마. 하여튼 너는 너무 앞서가서 탈이라니까? 네가 수련이와 자야 하는 이유는 네가 언니이니까 걔를 혼자 재우게 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수련이 걔가 배가 고파서 다른 것을 먹는 걸 감시하라는 뜻에서 함께 자라는 거야.”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그녀는 금세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아아, 알겠어요.”
동천은 낮게 웃었다.
“히히, 알았으면 됐어. 아? 네 동생이 기다리겠다. 어서 가봐.”
소연은 동천의 말을 따랐다.
“예, 주인님.”
소연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혼자 남게 된 동천은 창가로 다가가 따스한 햇살을 받았다. 좋은 느낌에 잠시 그러고 서 있던 동천은 자신이 우러러보는 (필요할 때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킬킬킬킬!”
너무도 좋은 동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