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22화
이틀 동안 수련을 굶기면서 자신은 원 없이 먹어댔던 동천은 배고파 죽겠다는 그녀의 부질없는 외침을 한 귀로 듣고 반대편 귀로 흘려보냈다. 다음 날이 오기 전 새벽에 일어나 약탕실(藥湯室)에서 미리 하루치 재료들을 끓인 동천은 자신이 가져온 아침 분량을 허겁지겁 먹어대는 수련을 보고 흐뭇한 마음을 가졌다.
‘자알 먹는다. 얼른 먹고 싸라. 싸! 히히히!’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먹고 난 수련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동천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동천, 더 줘.”
“더 달라고? 알았어. 자, 여기.”
수련은 그릇을 기쁘게 받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울상을 지었다.
“히잉, 또 물이야?”
동천은 정색을 했다.
“어허! 물이라니! 너 그 정도 분량을 구하려고 내가 애들을 얼마나 풀어놓은 줄 알아? 자그마치 오십이야 오십! 여기 암한문의 하인들은 마당을 쓰는 장 노인 빼고는 다 산으로 기어 올라갔다고.”
지금 동천의 말인즉, 이슬을 구하려고 새벽마다 암한문의 전 하인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산에 올라가서 구해온 거니까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받아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련은 이틀 동안 물만 먹고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몸소 체험을 해봤기 때문에 이제는 물만 봐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빨리 더 줘!”
그런다고 냉큼 갖다주면 단환을 만들 수 없게 되는데 동천이 그리하겠는가?
“떽!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서야 어떻게 미인이 될 수 있겠어! 지금 또 먹겠다고? 그럼, 주지 뭐. 하지만 미인이 되는 것은 포기해야 되니까 알아서 해.”
너무도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들여다보는 동천의 엄포에 수련은 찔끔한 나머지 한 꺼풀 꺾인 기세를 보였다.
“알았어. 참으면 되잖아. 그치만 내가 미인이 된다는 것 때문에 참는 건 아니니까 그건 알아 둬.”
동천은 밑지는 게 하나도 없었으므로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히히, 그러지 뭐. 그리고 나중에 오줌을 싸면 말해.”
동천은 질린 얼굴로 이슬물을 응시하고만 있는 수련을 뒤로하고 문고리에 손을 잡았다가 무엇이 생각난 듯 신형을 돌렸다.
“아? 그리고 너 무슨 일이 있어도 운기조식을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이슬물을 먹기 싫었던 수련은 때마침 잘됐다 싶어 그릇을 내려놓고 물어보았다.
“그건 왜?”
“왜긴 왜야. 그 약효를 네가 흡수하니까 그렇지.”
재미있는 이야기에 수련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 정말?”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동천은 만일에 대비해서 수련에게 겁을 주었다.
“얘가 우습게 생각하나 보네? 원래 그 약효는 네 몸속의 노폐물과 탁기를 오줌으로 방출하는 효능이 있는데 만일 네가 운기조식으로 그것을 흡수해 봐. 어떻게 되겠어? 그렇게 되면 부작용으로 얼굴이 거무튀튀해지고 피부가 거칠어져서 추괴한 몰골로 변하게 되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내 말 우습게 듣지 말고.”
열받는데 확 약효를 흡수해 동천의 일을 망쳐 놓으려 했던 수련은 한순간 모공이 오그라드는 듯한 한기를 맛보았다.
“호, 호호! 얘는, 내가 정신 나갔니? 그걸 흡수하게? 걱정하지 마.”
수련의 행동 하나하나에 당황한 티가 물씬 배어 나왔지만 동천은 넓디넓은 마음으로 모른 척해주었다.
“그래그래. 네가 그럴 리 없겠지. 그럼, 쉬고 있어.”
동천은 소연의 방에서 나온 뒤 이제 어디로 향할까 생각했다.
“가만있자. 도연이 그 자식은 꼴 보기 싫으니까 여기로 오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야겠고, 소연이는 지금 내 방을 청소하느라 바쁠 테고, 화정이는 걔 옆에서 싱글거리고 있을 테니 제쳐두고, 히히! 난 약탕실에 가서 최종 점검을 해야겠다.”
동천이 찾은 약탕실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옆쪽으로 나 있는 작은 쪽문을 지나쳐 무성하게 자라난 숲속을 걸어 들어가면 그곳 한가운데에 외로이 자리한 약탕실이 있었다. 처음 동천이 이곳을 발견했을 때에는 바로 옆에 웬 숲이 자리했나 싶어 신기해했지만 나중에 역천에게 듣고 보니, 이곳은 첫째 사형이 사용하던 곳으로서 사형이 죽은 뒤 그대로 방치해두자 2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무성한 숲으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상히 여긴 동천이 어떻게 잡풀도 아니고 이런 나무들이 왕성하게 자랐냐고 묻자 역천 왈. “심심해서 이곳에 씨앗을 뿌렸었거든.”이라는 정말로 한심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뭐, 어찌 되었든 지금에 와서는 이 숲이 은밀히 작업을 하는 동천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결과론적으로는 좋았다.
“소전주님.”
바삐 걸어가던 동천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신형을 멈추었다.
“응? 송 노인 아냐? 나 불렀어?”
당연한 거겠지만 감송은 밖에서는 소문주라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동천을 소전주라고 불렀다. 여하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멈춰 서 있는 동천에게 다가갔다.
“그렇습니다. 허허, 청뇨로명단을 만드신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동천은 갑자기 주위의 시선을 두루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동천은 그제야 감송에게 가까이 몸을 기대며 살며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지? 설마, 벌써 소문이?”
감송은 다소 불안해하는 동천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아닙니다. 며칠 전 소전주님께서 제 아내에게 청뇨로명단의 효능을 자세히 들으신 후, 사람들을 풀어서 대려산의 이슬을 받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저 혼자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에 동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그래? 이렇게 된 거 결론을 말하자면 맞아. 하지만 비밀인 거 알지?”
감송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럼요. 소전주님의 내공을 높이시는데 쓸데없는 소문은 피해야겠지요.”
일이 잘 마무리되어 빨리 약탕실에 가고 싶었던 동천은 감송에게 예의상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거 물어보려고 날 찾은 거야?”
감송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그 청뇨로명단을 만드는데 있어 긴히 드릴 말씀 때문에 바쁘신 소전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건성으로 듣고 있었던 동천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청뇨로명단에 대해?”
“예. 원래 제가 어렸을 적에 전대의 문주님을 모시던 하인이라서 전대 문주님께서 그 청뇨로명단을 만드실 때 바로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소전주님께 말씀드리길 첫날과 둘째 날의 오줌은 단환으로서 효과가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뭐? 그게 정말이야?”
감송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아내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닙니다. 아무리 극독이라도 그것을 은근한 불로 끓이면 독한 성분이 날아가게 됩니다. 비록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의 크기라 할지라도 정화된 결정체가 남게 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첫날과 둘째 날의 오줌을 받아내는 족족 한곳에 모아서 은근한 불로 끓이게 되면 그렇게 만들어진 단환의 효과가 사흘째 것만 못해도 적어도 2개 정도를 만들 수 있게 된답니다.”
“히야! 송 노인은 정말로 아는 게 많구나. 그런데 어째서 민 할멈은 나에게 그따위 망발을 한 거지?”
감송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청뇨로명단의 진정한 제조법을 아는 것은 전대 문주님의 바로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저밖에 없어서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달려와 긴히 말씀을 드린 것이니, 제 아내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요.”
생각 같아서는 단환 두 개를 그냥 날려 보낼 뻔한 민소희를 조져 패고 싶었으나 감송이 이렇게 나오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대신 이따가 나 도와주러 와야 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감송은 그제야 안색을 풀고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말 안 하셔도 제가 옆에서 거들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허허허!”
동천도 따라 웃었다.
“히히, 그럼 이따가 보자고. 히히히!”
감송과 헤어지고 숲속을 지나 약탕실에 들어간 동천은 아담한 정방형 구조물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왼쪽 벽에는 여러 가지 집기들이 하나하나 걸려 있었고, 반대편에는 국이나 약을 끓이는 탕관(湯罐)들이 크기별로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이곳은 20년이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으면서 아직까지도 약재 냄새가 은근히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사형은 생전에 이곳에서 여러 가지 실험들을 했던 것이 분명했다.
“캬아! 냄새 좋고!”
동천은 무쇠로 제작된 탕관을 하나 내려놓고 틀 위에 고정을 시켰다.
“흐흐흐, 그러니까 여기에다 수련이 그년의 오줌을 부은 다음에 불을 지피면 된다 이거지?”
음침하게 웃어대던 동천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쳇! 아무리 내공에 좋다고 해도 오줌으로 만든 걸 먹어야 하다니. 내가 비위가 좋아서 그렇지 아마 다른 인간들 같았으면 벌써 토하고 지랄을 했을 거야. 그러고 보면 난 참 강한 아이라니까? 아아, 하늘님! 이렇게 한 인간에게 모든 뛰어난 능력을 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동천은 굳이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으나 밖에까지 나와서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동천이 미리 준비해 놓은 탕관 말고, 바로 옆에 이미 끓여진 걸쭉한 탕약이 보였다. 동천은 그것을 손으로 콕! 찍어서 맛을 보았다.
“크엑! 더럽게 쓰네! 퉤퉤!”
동천은 절로 수련이 생각났다. 손으로 찍어서 이렇게 쓴데 그걸 먹고 더 달라는 수련을 생각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동천은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고 입가를 닦아낸 뒤, 재료들을 살폈다. 이상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동천은 기분 좋게 밖으로 나왔다.
“히히, 지금쯤 오줌을 쌌나 가 볼까나?”